우리는 지역구 선거를 대체하는 권역별 비례대표 선거가 지니는 의미와 장점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이걸로 민주주의가 충분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권역별 비례대표들은 지역을 대표하기에는 충분하지만, 지역을 넘어서는 다양한 목소리, 가치, 이익을 대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이 대목에서 서양 정치학자 데이비드 헬드(David Held)가 자신의 책 <민주주의의 모델>에서 제시한 다원적 대표 모델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가치나 이익을 공평하게 대표하는 의회를 구성할 때 가장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 이러한 가치나 이익에는 지역 외에도 계급/계층, 성별, 직능, 직업, 소수자, 지역, 세대, 환경/생명, 인권 등등이 포함된다. 그래서 다양한 가치나 이익을 대표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부문에서 골고루 대표자를 뽑을 수 있는 절차를 만드는 것이 가장 민주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민주적인 선거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것은 권역별 비례대표와 함께 이미 익숙해져 있는 전국 비례대표를 함께 선출함으로써 가능하다. 전국 비례대표제를 통해 우리는 이미 다양한 부문에서 전문성을 가진 인재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가치와 이익을 반영할 수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물론 어떤 전문가나 인재를 발굴하느냐 하는 것은 각 정당의 선택에 달려있으며, 그동안 이 과정이 결코 합리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했다는 점도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보면, 한편에서는 권역별 비례대표 선거를 통해 지역구 선거를 대체함으로써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을 뽑고, 또 한편에서는 전국 비례대표 선거를 통해 다양한 가치, 이익, 부문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을 수 있는 선거제도를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권역별 비례대표와 전국 비례대표의 선출을 병행하는 선거제도', 즉 '전국-권역 병행 비례대표 선거제도'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제도는 표의 등가성과 비례성을 보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을 포함한 다양한 이익과 가치를 대표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선거과정에서 지긋지긋한 문제가 되었던 비례위성정당도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자. 우선 각 정당들이 기본적으로 다양한 계급/계층의 이익이나 가치를 대변한다고 본다하면, 시민들은 전국 비례대표 선거 통해 특정 계급/계층 이익이나 가치를 대표하는 정당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이나 가치를 표현할 수 있다. 물론 환경, 여성 등 특정한 가치나 이익을 추구하는 정당들이 다양하게 출현하여 시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각 정당들은 정당 차이만으로는 대표하기 어려운 다양한 가치, 이익, 부문을 대표하기 위해, 비례대표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성별, 세대, 소수자 등의 인구특성이나 농업, 제조업, 서비스업, 정보산업 등 다양한 직능과 직업 특성을 고려하여 후보순위를 배분함으로써 대표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전문가들, 인재들을 발굴한다면 정당의 정책 생산 능력이 확대되고 또 정치력도 커질 수 있을 것이다.
또 신생정당들이나 소수정당들이 활성화되면 다양한 부문, 다양한 가치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어 기존 정치구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다. 전국 비례대표 선거는 새로운 가치나 이익을 추구하는 정당들이 시민들에게 자신을 알릴 기회를 공정하게 제공할 수 있다. 여기서 필요하다면, 소수정당들이 정치적으로 서로 연합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
물론 전국 비례대표 선거와 병행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통해서도 지역을 넘어서는 다양한 부문이나 가치를 대표할 수 있다. 각 정당에서 권역별 비례대표 후보를 농촌과 도시 또는 농업, 공업, 서비스업 부문들을 골고루 대표할 수 있도록 선출한다면, 다양한 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인들이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역구 선거를 통해서는 쉽지 않다.
이제 전국-권역 병행 비례대표 선거제도를 현재의 선거제도에 대입하여 생각해보기로 하자. 현재의 국회의석은 300석이다. 우선 이 의석수가 많은 것인지를 따져보면, 선진국들과 비교해 보거나 다양한 이익, 가치, 부문을 대표해야 한다는 현실로 보더라도 결코 많지 않으며 오히려 부족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의석을 늘리는 것을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가 지역구를 없애고 비례대표 선거를 도입함으로써 정책 선거를 하고 표의 비례성도 확보하게 된다면, 국회에서 다양한 이익, 가치, 부문을 대표하는 전문가와 인재들이 법과 정책을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일은 국회의원의 특권을 모두 폐지하여 국회의원이 출세나 과시의 상징이 아니라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리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선진적인 정치로 가는 길이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주어진 의석수인 300석을 기준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을 텐데, 이제 편의상 '전국 비례대표 50% + 권역별 비례대표 50%'를 가정해보자. 여기서 권역별 비례대표의석과 전국 비례대표의석은 각각 150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권역을 현재의 광역 시도로 나눈다면, 시도의 인구비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면 표의 등가성을 확보할 수 있다. 물론 지역구 선거를 대체한다는 점에서 보면 인구가 많은 시도에 한해 권역을 나누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표의 등가성과 비례성 문제는 다 해결될 수 있으며, 비례위성정당이 생겨날 여지도 없다.
이제 정당들은 내부의 민주적 선거절차를 통해, 다양한 인구특성이나 가치, 직능, 부문 등을 골고루 반영할 수 있는 권역별 비례대표 명부와 전국 비례대표 명부를 작성해야 한다. 물론 각 정당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후보선출 과정에서 당내민주주의가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경우 필요하면 당내 비례대표 선거를 위한 민주적 선거절차를 강화하여 법으로 정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정당별 비례대표 후보들이 정해지면 선거과정에서 각 정당들은 자신이 대표하는 이익이나 가치를 내세우며 정책을 개발하고 홍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유권자들과 만날 수 있게 되고, 유권자들은 이들의 이념, 가치, 정책을 평가하여 자신이 원하는 정당을 선택하면 된다. 정당들은 권역에서나 전국에서나 각 정당의 정책과 가치를 두고 서로 경쟁하게 되며, 이제 선거운동은 개별 후보보다는 정당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선거문화와 정치문화를 바꾸는 길이다.
이처럼 '전국-권역 병행 비례대표 선거제도'는, 지역구 선거제도의 폐해를 없애면서 전국과 권역(지역)에서 정책 경쟁을 통해 다양한 민의를 대표할 수 있도록 하고, 또 표의 등가성과 비례성을 확보하도록 함으로써, 대의제 민주주의의 원리에 가장 잘 부합하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선거제도라고 하겠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새로운 선거제도에 대한 상상이 부딪히는 최대의 벽은 바로 선거제도를 바꿀 수 있는 주체인 국회, 즉 국회의원들이다. 이들에게 지역구는 다음 선거를 기약할 수 있는 보루이며, 최고의 기득권이다. 여기서 주권자인 국민들이 선거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국회의원들이 자신을 선출하는 선거제도를 스스로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최대의 역설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제 공정하고 합리적인 선거제도를 만들 것을 요구하는 국민들, 시민들의 목소리만이 국회의원들을 움직일 수 있는 최대의 무기가 된다. 그래서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여론을 모아나가는 시민행동이 필수적이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개혁의지가 열렬히 표출된 상황에서도 국민 다수의 의사에 역행하는 기재부의 퇴행적 행태를 보고 있어야 하는 답답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만약 선거제도가 개혁되고 국회가 전문능력을 가진 의원들과 그들을 보좌하는 전문가들이 합리적으로 소통하는 장이 될 수 있다면, 사실 국가 예산을 짜는 역할을 더 이상 행정부에 둬야 할 이유도 없다. 선거제도 개혁은 단지 제도 개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숨겨져 있던 관료제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와 정치를 개혁할 수 있는 중요한 방안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 더 민주적인 대한민국을 위한 상상, 공정하고 합리적인 선거제도를 위한 상상을 펼치고 또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논쟁과 토론과 합의의 실천과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기 위한다면 더욱더!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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