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임기 4년차 진입을 한 달 앞두고 치러진 4.15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은 보수 야당을 향한 맹렬한 심판론이었다. 냉담해진 유권자들의 중간평가를 피해간 정권이 드물어 '여당의 무덤'으로 통했던 임기 중후반기의 총선 공식이 깨졌다.
이명박 정부 말기인 2012년 19대 총선 때 새누리당이 과반(152석)을 얻은 이변이 있었지만,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이 얻은 180석에 견줄 바가 못 된다.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은 개헌 저지선을 살짝 웃도는 102석에 그쳤다. 20대 국회 출범 당시 123석(민주당) 대 122석(새누리당)으로 나뉘어 팽팽했던 국회 지형은 한 순간에 여당의 압도적 우위 구조로 재편됐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국정 안정론이 정권 심판론의 예봉을 방어한 방패로 작동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저변의 지각 변동이 총선 민심으로 표출됐다는 평가다.
'탄핵정부 2인자'가 이끈 예정된 참패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 이어 미래통합당은 세 번째 탄핵 쓰나미를 맞았다. 현재의 보수당 체제가 구축된 1990년 3당 합당 이래, 민주자유당 법통을 이은 정당 의석이 120석 밑으로 떨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30년 간 미래통합당 계열이 얻은 의석은 149석(14대), 139석(15대), 133석(16대), 121석(17대), 153석(18대), 152석(19대), 122석(20대)이었다. 미래통합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최악의 위기에 처했던 17대 총선 때보다도 못한 성적표를 받은 셈이다.
대선과 지방선거 연패에도 불구하고, 미래통합당은 '탄핵 정부 2인자'를 당의 간판으로 세움으로써 예견된 몰락 경로를 그대로 걸었다. 이번 총선이 2년 뒤 치러지는 대선의 전초전 성격이었음에도 통합당은 상황 인식, 태도, 인물, 메시지에서 모두 실패했다.
지난해 2월 자유한국당 대표로 취임한 이래, 황교안 대표는 보수 재건의 첫걸음인 '탄핵의 강'을 건너지도, 개혁 보수의 길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1년 2개월을 허비했다. 국회 패스트트랙 국면에서 황 대표가 삭발과 단식을 감행하자, 의원들도 너나없이 머리카락을 밀고 충성 경쟁을 했다. 통합당은 여권의 최대 위기 국면이던 조국 사태 때도 광화문 집회에 몰려 나가 보수우파 총궐기만 도모했다.
그 사이 광주 5.18 망언자들은 솜방망이 징계에 그쳤다. 박근혜 정부의 무능으로 빚어진 세월호 사태에 망언을 퍼부었던 인사(차명진 전 의원)는 공천장을 들고 더 심한 망언을 해댔다. 다채로운 막말로 '저주의 정치'를 선보였던 친박계이자 황교안계 인사(민경욱 의원)도 컷오프→경선승리→공천취소→재공천 곡예를 벌인 끝에 구제됐다.
총선에 앞서 보수 통합을 완성하고 당명도 바꿨지만 덩치 커진 '자유한국당 버전2'에 그쳤다. 미증유의 코로나19 사태를 맞아서도 통합당은 '중국인 입국 봉쇄'를 되풀이하며 정부 때리기에만 열을 올렸다. 시대감각과 정치 감수성을 완전히 상실한 통합당에 '김종인 매직'인들 통할 리 없었다.
정부여당의 가장 약한 고리인 조국 프레임도 애당초 통합당이 주도권을 쥘 수 없는 이슈였다. 문재인 정부 핵심 실세의 위선에 대한 실망이 쌓여도 국정농단으로 탄핵당한 세력에게는 반사이익도 돌아가지 않았다. 지난해 조국 정국이 한창일 때조차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은 꿈쩍 않고 횡보했다. 여권은 검찰개혁 프레임으로 태세를 전환해 통합당을 반개혁 세력으로 손쉽게 몰아붙였다.
통합당은 한동안 보수의 보루인 영남권을 중심으로 반전을 모색해야 할 형편이다. 수성을에서 무소속으로 나선 홍준표 전 대표를 제외한 대구‧경북권을 석권했고, 격전지이던 부산‧울산‧경남과 충청권에서 비교적 선방을 한 대목이 유일한 위안거리다. 그러나 탄핵 정부에 대한 반성, 기득권화된 정당 풍토에 대한 집단적 각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통합당의 위기는 향후에도 심화될 것이란 관측에 이견이 없다.
민주당 기록적 대승, 양당 정치 부작용 우려
4.15 총선 대승으로 민주당은 지난 2016년 총선 이래 치러진 전국단위 선거에서 네 번 연속 승리를 거둔 진기록을 세웠다. 개헌을 제외한 모든 것을 단독으로 할 수 있는 180석을 확보한 기록적 대승으로 문재인 정부 임기 후반기를 뒷받침할 토대가 마련됐다는 평가다.
위기의 터널에 갇힌 통합당 상황과 맞물려, 이해찬 대표가 목표로 삼은 '민주당 장기 집권 체제'가 시작된 게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온다. 통합당과의 비교우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집권이 가능한, 극단화된 양당 정치가 구조화됐기 때문이다. 양당의 독과점 체제는 필연적으로 격렬한 갈등을 유발하지만, 통합당이 집권을 위협하지 못할 정도로만 관리된다면 '양자택일' 승부에서 승리가 보장된 적대적 공존은 민주당에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21대 국회가 최악의 국회가 될 것이라는 비극적인 전망은 민주당의 이 무한 팽창 전략과 맞닿아 있다. 자신들이 참여한 개정 선거법 취지에 정면으로 역행해 민주당이 비례 위성정당을 창당하는 순간부터 예견된 일이다. 다당제를 기반으로 연합정치의 가능성을 일부 보여줬던 20대 국회와 달리, 21대 국회는 사실상 유일한 제3세력이 된 정의당조차 의석수 확장에 실패했다. 정부여당의 독주를 통합당과 다른 방향에서 견제할 세력이 원내에서 사라졌다는 의미다.
이처럼 정치적 다원성이 사라진 양극 정치는 민의를 제대로 반영할 수단도, 실질적인 문제해결 능력도 상실한 채 거대 양당의 담합 정치로 나아갈 것이란 우려가 크다.
조국 사태가 전조를 보여줬다. 평등, 공정, 정의는 구호일 뿐,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학력과 부의 축적과 대물림을 향한 집착만큼은 놀랍도록 똑같다는 기득권 정치의 민낯을 드러냈다. 계급적 구분이 희미한 양대 정치세력은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장소만 달리한 지지자들 눈치만 봤다.
이로 인해 박근혜 탄핵에 합심한 촛불 세력이 분열하는 촉매제가 된 반면, 민주당엔 친문‧친조국 성향의 강성 지지자들이 좌우하는 순혈주의가 강화됐다. 조국 수호대를 자처한 이들, 윤석열 검찰을 마지막 적폐 청산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이 대거 입성한 21대 국회가 시작부터 순탄치 않으리라는 전망은 그래서 나온다.
21대 국회를 사실상 독점한 민주당에도 기회와 위험이 동시에 존재한다. 152석을 얻은 열린우리당이 노무현 정부의 성공과 정권 재창출을 견인하지 못했던 17대 국회가 반면교사다. 옛 집권당에 대한 심판론이 우선시 되면서 현 집권세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유보된 이상, 한국 정치의 앞날은 항상 예측불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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