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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치는 ‘자본주의 발전속 생활 공동체복원’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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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치는 ‘자본주의 발전속 생활 공동체복원’이 답이다

[김주원 박사의 '마을자치에 학과 습을 이야기하다'] ㉕마을단위 자치는 결과보다 과정과 절차가 더 중요하다

우리 삶 속에서 ‘입에 풀칠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1960대까지 우리에게 익숙했던 말이다. 역사적으로 민란이 있던 조선 18세기 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제일 심각했다. 1921년 수탈자 입장에 있던 일제 조선총독부 당국자가 “먹을래야 먹을 것이 없고, 입을래야 입을 옷이 없는 방랑의 신세가 되어, 산이나 노변에 쓰러져 친구의 간호도 받지 못한 채 외로이 인생행로를 종언하는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먹지 못하면 남에 것을 빼앗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공포속 마트 생필품 매대가 텅비는 해외영상들을 보면서, 우리는 행복하다 혹은 우리가 더 선진국이라는 생각마져 든다.

이 시점에 입에 풀칠하는 일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다시 생긴다. 세계 어느 곳을 가나 볼 수 있는 성벽(walls)과 요새(fortress), 그리고 튼튼히 쌓은 성채(castle)들은 가진 것을 지키려는 물리적 방어벽이었다. 입에 풀칠하는 일을 관리하는 최후의 보루가 성채였다.

ⓒ김주원 농도상생포럼 회장

역사기록을 보면 중세 유럽에서는 무사의 투구하나가 황소 세 마리 값이었다. 말 한필이 암소 20마리 값이었다고 한다. 남이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해, 그리고 가진 자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쟁용 무기가 그만큼 필요했다는 말이다.

성안에 사는 사람들의 생명, 재산, 삶을 지키는 힘이 권력이었다. 그 권력의 힘을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잘 쓰는 사람이 위대한 지도자로 영웅이었다. 평화롭게 잘 사는 시절에는 권력자가 누구인지 잊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다. 권력부패는 그 힘을 사용해 약한 자를 수탈하는 것이 곧 약육강식으로 이어진다. 이 무정부 상태를 타파하고 좀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려는 인간 노력의 결과로 법과 질서를 내세우는 정부를 창안했다. 그렇지만 정부의 시장개입과 관련해서는 점점 자유방임보다는 국가개입 강화로 격차로 인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발전은 낙수효과 논쟁을 일으켰다. 자유방임적 낙수 효과는 이미 현실적으로 없다는 게 정설이다. 정부개입으로 분수효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가 새로 필요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확대와 발달은 빈부격차, 계층별 격차를 더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시장이 상품생산과 분배의 주된 동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야 가능했다. 당시 상품의 생산과 분배에 관한 결정은 시장이 아닌 정치적・사회적 권력자들에 의해 내려졌다.

비록 시장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엄격히 제한되고 규제되었다. 상업과 무역이 발전했던 중상주의시대에도 시장이 고도로 발전했었지만,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통제 속에서 발전되었다.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시장의 요구사항들이 공동체의 삶과 정치권력의 한계를 결정하게 되면서 국가-시장-사회 간의 전통적인 관계가 뒤집히게 되었다.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들이 시장경제의 힘에 맡겨지게 된 것은 18세기말 19세기 들어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하기 시작한 이후였다. 자본주의는 개인들에게 자신의 지위와 생활이 주로 특정집단 혹은 공동체에 의해 규정되던 세상의 종말을 의미했다.

국가와 시장의 관계는 점점 더 밀접하게 발전하였지만 바람직한 생활공동체 사회는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사회란 공공선에 대한 비전을 공유할 때만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지될 수 있다. 시장의 기능이 커지고 자본주의가 활성화되면서 이득의 추구가 사회 속에서 해로운 영향을 점점 더 미치게 되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사람들은 돈을 중시할수록 미덕을 경시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은 “돈에 대한 사랑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시장에 기반을 둔 사회는 탐욕과 부도덕을 부추길 뿐만 아니라 삶의 헌신이 필요한 공적 목표와 고귀한 이상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게 된다.

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사적 이익이 공적 이익보다 우선시 되었고 시민들간의 유대관계는 일시적이고 변하기 쉬운 교환관계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가장 영향력 있는 논의는 퇴니스(Ferdinand Tonnies, 1855.7.26.~1936.4.9., 독일사회학자)의 선구적인 저서 「공동사회와 이익사회, Gemeinschaft und Gesellschaft」다. 퇴니스는 사회적 삶에는 두 가지 기본 형태가 있다고 한다. 그 형태 구분은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했던 것과 그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다.

전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공동체가 최고의 권위를 지녔다. 공동선에 대한 헌신은 최상의 가치였고, 공동의 관점 그리고 본능적이면서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사회적 연대의 감정이 시민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그러나 시장이 확산되면서 공동의 삶을 유지해 주던 전통적 요소들이 파괴되었고 공동의 이익보다는 사적 이익이 우선시되는 사회 조직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퇴니스는 유명한 주장을 남겼다." 공동사회(공동체)의 사람들은 모든 분열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통합됐지만, 이익사회(결사체)의 사람들은 여러 통합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현재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에 대한 냉소, 문화적 공허함, 그리고 개인들의 절망감이 점점 더 심화하여 세상이 잿빛으로 물들고 암울한 세상으로 보이는 것은 자본주의가 가져온 병폐다. 그 결과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 발전에 따른 격차의 문제, 과실에 대한 분배가 문제다.

사회와 시장 그리고 제도를 이어주던 신뢰가 무너지면서 더 이상 법제도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도처에 산재되어 드러나고 있다. 정치인들이 부패한 거짓말쟁이로 전락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신뢰가 사라지면 사회는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신뢰 없이는 사회계약도 무용지물이며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방어적인 인간으로 변모해 시민사회는 만들어지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마을단위로 생각을 연결하고 의미를 창조하고 마을의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때 국가적으로 혹은 광역지역단위로는 어렵지만, 마을에서 신뢰가 만들어질 수 있다.

ⓒ김주원 농도상생포럼 회장

이 신뢰, 사회적 자본이 다른 마을로 확산되면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사회적 자본은 더 잘 만들어져 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을공동체의 자치 활성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 즉 마을단위 자치는 결과보다는 과정과 절차가 더 중요하고 필요한 이유다.

1950년대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자인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는 불평등은 어떤 경제에서든 발전의 초기단계에서 늘어나지만, 경제가 더욱 진보함에 따라 결국 줄어들 거라고 보았다.

쿠즈네츠의 생각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보릿고래를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쿠즈네츠의 주장과 달리 낙수효과는 없었다. 수도권중심 경제에서 지방은 늘 소외되었다. 지방에 분수를 만들자고 혁신도시 기업도시를 만들었다.

지역격차를 해소하는 균형발전의 헌법정신을 지키기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강력한 균형발전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렇지만 수도권 인구는 지난해 50%를 넘었다. 더 강력한 봉쇄정책을 택하지 않고는 이러한 추세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행정학에서 민주성과 효율성은 상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성이 강화되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집권이 더 효율적이고 분권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도 평등을 향상시키면 경제적 성과의 감소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오쿤(Arthur Okun)은 언젠가 서로 반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 효율과 평등의 관계를 커다란 상충관계(big tradeoff)라고 묘사했다. 그 시기에 평등을 진작시키기 위한 중점과제는 재분배(누진세 강화와 이전 지출의 확대)였다.

이러한 재분배 조치들은 경제적 유인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것이며 그러면 당연히 경제적 성과 또한 나빠질 것이라는 게 당시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불평등의 수준을 낮추려면 경제적 성과를 희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여러 나라에서 드러난 새로운 증거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국가가 경제적 성과를 해치지 않고도 심지어 경제적 성과를 촉진하면서도 불평등과 싸움을 성공적으로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말 이래 성장률은 떨어졌고,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침체를 포함해 커다란 경제침체가 네 차례 일어났다. 그리고 성장 폭이 줄어드는 와중에 상위층에 돌아가는 몫은 자꾸 늘어나는 반면, 다수의 소득은 정체되고 중산층은 자꾸 쪼그라들어 공동화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상위층 소득만 늘어나면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던 낙수효과(trickle down)는 효과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반대로 새롭게 등장한 견해는 중간에서부터 경제를 키워가는 식의 분수효과(trickle up)가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즉 평등과 경제적 성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이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대체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을은 그 분수효과를 낼 수 있는 최소한의 국가단위다. 마을자치는 분수효과를 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마을자치가 잘되어야 민주성과 효율성의 가치가 조화롭게 균형을 갖는 모델이 만들어질 수 있다. 도시집중으로 인한 도시문제도 농촌지역 소멸문제도 마을자치로 해결할 수 있다.

1)여기서 공동사회는 공동체로 이익사회는 결사체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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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준

강원취재본부 전형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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