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글로벌 재난을 겪고 있는 요즘이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장기전을 대비해야 한다는 전망이 나온다. 감염비상이 경제비상으로 전이되는 가운데 국내외에서 다양한 대응책이 제안되고 실행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낯선 풍경이 일상이 되고 있고, 재난을 극복하는 미담들도 화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있어 감염 예방과 차단만큼이나 재난 불평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몇몇 나라에서 제기되는 것처럼 정의로운 전환 관점에서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상치 못한 사건은 그 사회시스템의 회복력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마련이다. 여기서 말하는 회복력은 사건 발생 이전 상태로 돌아간다는 일차원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건을 경과하면서 ‘전환적 적응’을 수행하는 역량과 성과를 의미한다. 메르스 사건에서 얻은 교훈 덕분에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낫다고 평가되는 방역체계, 개선될 과제가 많지만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공공의료체계, 그리고 성숙한 시민의식과 의료진의 헌신이 방역-의료체계와 합쳐져 상황 악화를 막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다. 그럼에도 조류독감, 사스, 신종플루, 구제역, 메르스 등의 전염병, 그리고 가습기 살균제와 세월호 등 사회를 뒤흔든 각종 재난 이후 한국 사회는 바뀐 것도 있지만 바뀌지 않은 것도 많다.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진단한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단계적) 반응은 개인의 죽음 말고도 사회적 재난을 겪는 개인적, 사회적 심리 상태를 진단하는 데에도 제법 잘 들어맞는다. 슬라보예 지젝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기(Living in the End Times )>(2010년)에서 경제, 기후, 기술 등의 분야에서 총체적 난국을 맞아 어떻게 생존해야 할지 탐구하면서 ‘비관적 파국론’에 빠지지 않고 ‘비판적 기회론’을 성찰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해방적 유토피아를 위한 새로운 실험과 급진적 실천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더해 현 체제를 재생산하는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편을 선택할 수 있다는 옵션도 남겨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코로나19 국면에서 ‘재난 유토피아’(리베카 솔닛)나 ‘재난 꼬뮤니즘’(애슐리 도슨)의 징후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인간을 바이러스의 숙주로 대하는 순간 연대와 협동의 원리를 실현하기 곤란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사회적 교류와 지역적 협력의 여려 사례들을 접하고서부터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생태적 기본소득에 옹호적인 입장에서 최근의 변화는 긍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비록 재난 특수적인 상황에서 제한적인 방식으로 수용되고 있지만, 대안 담론이나 작은 실험으로 취급받던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고려되는 재난기본소득이나 재난수당이 생계유지를 위한 긴급지원에 가깝고 재난 이후 과거의 제자리를 찾기 위한 지렛대일지라도 기본소득을 공론화하는 데 기여한 바는 인정할 만하다. 다만 혁신적 정책 하나로는 재난 국면을 제대로 헤쳐 나가기 어렵다. 따라서 다른 정책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향할 것인지,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대한 잘못된 해결책이 또 다른 재난을 낳는, 즉 재난의 악순환을 경계해야 한다.
코로나19 여파로 경제-사회 활동과 이동이 위축되고 에너지소비가 감소하면서 온실가스 다배출 국가를 비롯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이 감소했고, 당분간 이런 추세가 유지될 것이라고 예측된다. 이런 식의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한 의도치 않은 결과를 대면하면서 복잡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민주적이고 계획적인 방식을 통하지 않고 외부 충격에 의해 강요된 탄소감축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지만 기후과학과 기후정치가 제시하는 감축 목표와 시기를 맞추려면, 2030년까지 시스템 전반의 대전환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변화의 속도와 규모와 범위가 전쟁과 재난에 비유될 만큼 신속하고 대규모로 광범위하게 미칠 영향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정의로운 전환 전략이 필수적이다.
3월 20일 유럽환경청(EEA)의 지적처럼, 온실가스 배출이 줄고 미세먼지가 걷힌 것은 일시적인 현상, 다시 말해서 지극히 비정상적인 조건에서 발생한 에피소드에 불과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면 배출이 급증해 원상태로 되돌아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이런 반등효과는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코로나19와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할까? 이 비상시국에서 기후비상을 말하는 것은 한가한 소리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코로나19 경기부양책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그 후과는 상상하지 못할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산업전환, 노동전환, 사회전환을 위한 녹색혁명에 모든 자원을 동원하고 투자하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그렇게 새로운 주장도 아니다. 그린딜(Green Deal)을 기후비상과 경제비상은 물론 감염비상을 동시에 해결하는 방안으로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유럽의 제안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제는 재난에 내재한 복합성과 복잡성에 주의해야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국제사회의 최대 이슈는 기후위기였다. 당면 최대 과제가 코로나19 해결이지만 기후위기는 멈추지 않는다. 핵심은 두 쟁점의 연결고리를 찾아 위기 가중의 상충관계로 배치하지 않고 문제 해결의 상승효과를 꾀하는 방향에서 해결책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시스템전환의 비전과 내러티브는 이런 구상 속에서 나와야 한다. 전환적 사회혁신론(Transformative Social Innovation Theory)으로 보자면, 지금 상황 자체가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라 할 수 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의 이슈페이퍼 <기후국회・녹색사회 5대 전환 프로젝트>(2020년)도 그런 전환의 내러티브에 해당한다. △탈석탄과 탈내연기관차로 2050년 배출제로 △그린뉴딜 전환과 좋은 일자리, 더 나은 삶 △에너지전환 가속화를 통한 RE100 △에너지 분권・자치와 기후대응을 위한 지역전환 △모두를 위한 정의로운 전환. 이 제안들은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정답도 아니다. 그런데 세계사적 국면에서는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흐름과 반대로 퇴행적인 흐름이 서로 각축하는 ‘이중 운동’이 나타나곤 한다. 이격과 격리라는 ‘신체적 거리두기’가 중요한 지금이 역설적으로 정치하기 좋은 시기여야 하고, 연구소의 전환 프로젝트 제안이 이때 쓰일 정치 소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재난 이후의 재난을 내다보는 시야가 없다면, 앞으로도 과거와 같은 회색 경기부양책을 고집한다면, 또 다른 결과, 그러나 예상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바로 기후재난을. 기후재난은 보고 싶지 않아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당장은 피하고 싶어도 훗날 묵시론적인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다. 토마스 홉스가 말한 “지옥은 너무 늦게 보이는 진실”인 것처럼. 대응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재난은 그 문제를 발생시킨 그 시대의 지배적 사고방식을 갖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 포스트 코로나는 정상적 일상을 되찾으면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전환적 적응의 교훈을 선제적으로 창조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질문하자. 우리는 코로나19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계기로 삼아야 하는가? 지금 하는 일이 미래를 결정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