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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의 '비밀병기' 인재근 "2012년을 점령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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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근태의 '비밀병기' 인재근 "2012년을 점령하겠다"

[인터뷰] 민주주의자 故 김근태의 '바깥사람' 인재근

"제가 제일 하고 싶은 말은, 그 분이 가시는 길에 외롭지 않게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정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 말을 인터뷰 첫머리에 꼭 써 주세요. 특히 아이들 손 잡고 오신 엄마들. 감사드립니다."

'김근태의 바깥사람', '김근태의 비밀병기' 인재근 '사랑의 친구들' 운영위원장은 웃음이 많았다. '2012년을 점령하라'고 한 김 상임고문은 정작 2012년 뜨는 첫 해를 볼 수 없었지만, 인재근 위원장은 2012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인 위원장은 '김근태 냄새'가 나갈까봐 집에서 문도 잘 열어놓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2012년을 점령하기 위해 뭔가 할 것이다. 제가 스스로 '김근태의 비밀병기'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미래를 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김근태 상임고문도 과거에 갖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는 그를 가뒀다. 적어도 그의 육체는 그랬다.

6.3세대. 65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을 했던 그였다. 그러나 열 아홉살 청년 김근태가 그렇게 외쳤던 일제 잔재 청산은 아직도 요원하다. 80년대, 그가 겪은 '고문 재판'은 21세기 하고도 12년이 지난 지금 개봉한 영화 <부러진 화살>보다 더 처참했다. 그 재판은 잔혹한 80년대 판 <부러진 화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삶을 한 번도 놓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의 생명이 지켜보지도 못한 2012년을 말했다.

지난해 12월 30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타개한 지 보름이 조금 넘은 시점에 인재근 위원장을 서울 도봉구 한반도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민주주의자' 김 상임고문과의 인연, 역경, 삶을 웃으며 담담히 털어 놓았다.

인 위원장은 김 상임고문을 김근태 씨, 남편, 김근태 의원, 김근태 형 등 다양하게 호칭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도 김근태 의장, 김근태 선배, 김근태 의원을 섞어서 사용했다. 다양한 '호칭'들 속에 김 상임고문의 삶이 제각각 녹아있는 만큼, 호칭을 통일하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인터뷰에 앞서 인 위원장이 신신당부한대로, 김 상임고문 영결식에 오신 분들에 대한 감사 인사를 첫머리에 올렸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편집자>
▲ 인재근 사랑과친구들 운영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너무 갑자기 돌아가신 것 같다. 아쉬움도 있고 궁금증도 있다. 유족들은 어떻게 살고 계신지도 궁금하고.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유산은 무엇이고, 과제로 남겨놓은 것이 무엇인지 얘기를 듣고 싶다. 개인적으로 10월 말 경에 김근태 전 의장과 점심을 했다. 그 때만 해도 '다음 총선에 나오시겠구나' 생각했고 '건강이 괜찮으시구나' 생각했는데, 이렇게 됐다. 돌아가신 게 실감이 나시나?

인재근 : 떠났다는 생각이 안 든다. 옆에 있는 것 같고, 내 주변을 돌면서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아직도 체취가 느껴진다.

프레시안 : 12월 초, 따님 결혼식 직전에 입원하셨는데, 대부분 '조금 있으면 나오시겠지' 하고 생각했다.

인재근 : 저도 그렇다.

프레시안 : 왜 이렇게 갑자기 안 좋아졌을까?

인재근 : 뇌정맥혈전증인데, 혈전을 용해하는 작업을 병원에서 계속 했다. 그 과정에서 자꾸 부작용이 나는 것이다. 마지막 돌아가실 때는 (혈액) 순환이 안 돼서...결국 그것(혈전)을 뚫지 못했다. 그래서 돌아가신 것이다.

프레시안 : 많은 분들이 고문 후유증을 얘기한다.

인재근 : 뇌정맥혈전증이 흔히 얘기하는 뇌졸중과 비슷한 것인데,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있는 사람 등에게 흔히 있는 병이다. 그런데 김근태 씨는 혈압도 높지 않고 그래서 그런 의심조차 안했다. 나중에 검사에 그렇게(뇌정맥혈전증) 나왔다. 그리고 평소에 파킨슨병이라는 지병을 앓고 있었다. 신경계 교란으로 인한 것인데, 보통 전기고문을 받으면 신경계 교란이 생긴다고 외국의 논문에 발표된 게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신경계 교란은 전기 고문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뇌졸중, 뇌정맥혈전증을 유발할 수 있는 게(지병이) 평소에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의심(돌아가신다는 의심)도 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 파킨슨씨 병을 앓는 다는 것을 언제 알았나?

인재근 : 6년 전 쯤 됐다. 약을 계속 먹고 있었다. 그렇게 많이 진전되지 않았었다. (85년) 9월에 고문을 당했는데, (매해) 9월, 추워지는 시기를 건강하게 넘기기가 어려웠다. 몸살 같이, 열병 같이 매년 열흘 쯤 앓는다. 그런 때가 되면 각별히 조심을 한다. 일정도 너무 빡빡하면 몸살 날까봐 굉장히 조심하는 시기였다. 그 때 (박인규 대표가) 만났을 때도 그런 시기였다. 이미 몸이 아팠을 때였다. 그런데 어떻게 식사도 하고 대화도 하셨는지...

프레시안 : 제가 만나 뵀을 때는 손 쓰임만 조금 불편했지, 괜찮으셨다.

▲ "저에게 (동지들이) 전화 하면 다 '조금 기다리면 좋아지니까, 병실에 초대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제가 장례식에 초대한 셈이 돼 버렸다." ⓒ프레시안(최형락)
인재근 :
그런 것을 다 고문 후유증으로 생각했겠죠. 말이 어눌해도, 동작이 어색해도 그렇게 생각을 했죠. 그런데 올해 유난히, 이상하게 많이 아팠다.

프레시안 : 10월, 11월에 유난히 몸 상태가 안 좋으셨나보다.

인재근 : 그리고 MRI를 찍어서 혈전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입원한 것이다.

프레시안 : 그 때만해도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한 것 같다.

인재근 : 위험한 것은 하루였다. 우리가 계속 좋아진다, 좋아진다, 그렇게 얘기했다. 그래서 여기 동지들도 조금 좋아지면 면회 오라고 말하려고 했었다. 저에게 (동지들이) 전화 하면 다 '조금 기다리면 좋아지니까, 병실에 초대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제가 장례식에 초대한 셈이 돼 버렸다. 누나가 한 분 있는데, 누나도...

프레시안 : 못 보시고?

인재근 : 마지막 날 봤죠. 위험한 날 본 것이다. 29일이었는데, 그 29일이 진짜 힘들었다. 예상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위험하다고 그러니까... 그리고 그냥 돌아가신 것이다.

프레시안 : 유언도 못하시고.

인재근 : 그럼요. 박 대표님 만나기 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 '2012년을 점령하라', 그것이 유언이 돼 버렸다.

프레시안 : 영결식 때 함세웅 신부님이 '천주교 쪽에서도 김근태에게 (정치 활동 등)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고문 후유증 때문에 힘든 것을 모르고 너무 세게 몰아 붙였나 보다. 미안하다'고 하시더라.

인재근 : 젊은 신부가 그랬다고 하더라. '좀 박력 있게 싸우라'고 무슨 모임에서 그랬다고 하대요. 그런데 (그 신부님이) 그 얘기를 한 것이 너무 가슴 아파 죽는다고 했다. (함 신부님 얘기가) 그 얘기네요. 아파서 그런 줄 몰라서 그랬다고, 아파서 가슴을 치시더라.

프레시안 : 결국은 이 모든 일의 시작이 고문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영결식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의지를 말씀하셨다. 무엇보다, 김근태를 고문한 대한 가해자의 사과랄까, 용서와 같은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근안 씨가 정말 참회하고 용서를 빈 것일까? 그 부분에서 김근태 선배가 용서를 한 것인가?

인재근 : (이근안이) 여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잠깐 면회를 갔는데 사죄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근태 씨 눈에는 사죄하는 모습으로 안 비쳤던 것 같다. 진정으로 사죄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본인도, '이것은 내가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굉장히 괴로워했고, 갔다와서 며칠 저한테 말을 안했다. 사실 바깥 얘기도 잘 하고 그러는 사람인데, 그 부분에 대해 얘기를 안 해서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심적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용서가 안 되는데, 용서했다고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인지, 갈등을 하신 것 같다.

프레시안 : 그게 이근안의 요청에 의해 만난 것인가?

인재근 : 그게 아니고 우연히 도봉구청장 하셨던 분이 (이근안이 수감된) 거기(여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그 분 면회를 갔다가 우연히 알고 만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굉장히 고민했던 것 같고, 나중에 얘기하는데, 자기 고민을 누군가에게 말한 것 같다. 그래서 (김근태의 고민을 들은 사람이) '당신이 고민할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그러니 신에게 맡겨라' 그렇게 조언을 해 준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떤 성직자가 얘기해준 것이 아닌가 한다.

프레시안 : 그 이후에 이근안 씨를 만난 적이 없나?

인재근 : 예.

프레시안 : 이근안 씨는 충분한 사과를 안 한 것 같다.

인재근 : 사과라고 한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진짜 참회하는 모습으로 본인(김근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다.

김근태의 '바깥사람', "고문 사실을 알고 이를 '바드드득' 갈았다"

프레시안 : 김근태 의원 생전에 많은 사람들이 '인재근은 김근태 바깥사람'이라고 했다는데, 활동적이어서 그런 별칭이 붙은 것인가?

인재근 : 그것은 제가 말한 것인데, 스토리가 있다. (90년에) '윤석양 이병 양심선언' 사건(1990년 노태우 정권 당시 보안사령부에서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민간인 사찰 자료가 담긴 디스크를 가지고 탈영해 그 목록을 공개한 사건-편집자주)이 있었는데, 당시 보라매 공원에서 큰 집회가 있었다. 집회를 마치고 각 단체별로 플랜카드를 들고 막 대방역으로 진출하는 행사가 있었다. 제가 아마 민가협 소속으로 플랜카드를 들고 나왔겠죠. 그런데 뒤에서 누가 인사를 했다. 지금 생각난 게 건약(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의 당시 회장 임종철 씨였던 것 같다. 임종철 씨가 나와 인사를 하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데?'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분이 '응, 김근태 의장 안 사람이야. 김근태 의장은 감옥에 있고 그래'라고 했다.

프레시안 : 그 때도 감옥에 있었죠?

인재근 : 네. 그래서 내가 뒤돌아보면서, '뭐? 아니 내가 바깥사람이지 내가 안 사람이냐. 안 사람은 거기(감옥)에 있지' 해서 생긴 말이다.(웃음) 보통 어른들이 그러셨다. 내가 바랑 메고 막 뛰어다니니까, '이것은 밖에서 뛰는 김근태다. 안에 김근태는 저기 있다', '밖에서 뛰는 김근태가 인재근이다'라고 어른들이 말씀을 많이 하셨다.

프레시안 : '바깥사람' 되신 지가 85년부터인가?

인재근 : 83년 민청련 의장하면서 노상 수배당하고 그랬으니까, 그 때 (80년대 초반)부터였다.

프레시안 : 고문 당하신 사실이 폭로된 게 85년이다. 김근태 의원의 뜯긴 살점을 들고 직접 폭로를 하셨다. 당시 심정이 어땠나?

인재근 : 그 때는, 고문 사실을 알고 이를 '바드드득' 갈았다.

프레시안 : 면회 때 알게 됐나?

▲ "그 때는, 고문 사실을 알고 이를 '바드드득' 갈았다." ⓒ프레시안(최형락)
인재근 :
아니다. 남영동에서 고문을 당하고 송치될 때다. 남영동이나 치안본부에서는 면회를 허가 안 해주니까 제가 '언제 송치되나' 하고 검찰청에 매일 갔었다. 검찰청 4층에 가면 사건과가 있다. 사건과에 가면 그날 송치될 명단이 올라오고, (사건과에서) 담당 검사가 정해진다. 내가 (85년 9월) 24일도 가고, 25일에도 갔다. 그런데 26일 날, 아침에 사건과에 가니까 '김근태가 그날 송치된다'더라. 담당 검사가 김원치 (80년대, 90년대 공안 정국 하에서 활약했고 '검사가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무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신조를 내걸었다. 운동권 학생들에게는 '저승사자'로 통했다. 당시 법정에서 '김근태의 주장만이 있을 뿐, 고문을 뒷받침할 자료가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 2003년 참여정부 때 검찰 인사에 반발해 검복을 벗었고, 2008년 사망했다.-편집자주)로 돼 있다.

김원치 검사실이 521호였다. 제가 오늘 중으로 이 사람(김근태)이 5층 엘리베이터를 통과해서 김원치 방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5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렸다. 경비하는 아저씨 한 분이 책상 조그마한 것 하나 갖다 놓고 앉아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2시 경,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드디어 우리 남편이 한 사람의 경찰의 부축을 받으면서 내렸다. 5층에서 직접 김원치 방으로 가는 게 아니라 4층에 대기실로 먼저 가는데, (김근태를 부축하며) 대기실로 한층 내려가는 그 사이에 자기가 '고문당했다'고 얘기한 거예요. 우리 남편이 별로 기억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고문 과정을 아주 치밀하게 외운 것이다. 누가 들어오면 '오늘 며칠이예요?'라고 물어보고, 고문 시작하기 전에 시간도 확인했다. 다 머리 속에 입력을 한 것이다. 그것을 한층 내려가는 사이에 얘기를 했고 저는 또 그것을 머리 속에 입력을 했다. 4층 대기실에 앉아, 거기에서 양말 벗고 전기 고문 자국을...가뭇가뭇하게 탄, 똥글똥글하게 탔더라고, 발가락 사이 같은데...그런 것을 보여주고, 뒤꿈치 딱지도 보여줬다. 그 때는 딱지가 안 앉았었는데, (상처 위에) 빨간 약 칠하고 하얀 가루 약을 뿌려 놓았었다.

그렇게 상처 난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이 사람들(경찰, 경비 등)이 경계를 하더라. 나한테 얘기를 많이 하니까, 얘기하는 나를 막았는데, 당시 (대기실에) 문이 양 쪽에 (두 개가) 있었다. 이 쪽에서 막으면 저 쪽(문)으로 뛰어가고, 저 쪽에서 막으면 이 쪽(문)으로 뛰어가고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김원치 방으로 올라갔다. 그 때는 나한테 접근을 못하게 막더라. 김원치 방으로 들어갔을 때 내가 담당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다. 김상철 변호사다. '우리 남편이 김원치 방에 들어갔는데 (남영동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하더라. 와 봐라' 그래서 그 분이 와서 봤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이다. 그날이 목요일이었던 것 같다. 기독교 회관에서 목요 기도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 뛰어가서 폭로를 시작했다.

프레시안 : 바로?

인재근 : 바로. 목사님에게 '저에게 (발언) 시간을 좀 달라'고 메모를 올렸는데, 시간을 안 주셔서, 제가 막 뛰어올라가서 마이크 잡고 폭로를 그날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때 신문기사는 다 보도 통제를 했으니까, (언론 보도는) 안 되는 시대였다. 농성을 통해 알렸다. 그날 민청련 중앙위원회가 있었다. 장충동 형제 교회에 있었는데, 거기에 동지들이 모여 있으니까 거기에서 또 얘기를 했다. 동지들과 우리 집에 가서 그날 밤을 새워 농성 준비를 했다. 민청련 성명서도 만들고 제 호소문도 만들어서 이튿날 아침부터 기독교 회관 인권위원회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고문 폭로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격려도 해 줬다. 많은 외신 기자들이 와서 취재를 해 갔다. 외신에 많이 나가서 오히려 여기 (한국의 신문사)에서 받지 않을 수 없게 됐었다. 외국에 있는 동지들이 와서 내 증언을 녹음해 가서 밖에서 인권 집회를 했다.

"김근태도 '인재근이 가만 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프레시안 : 그래서 두 분이 87년도에 '로버트케네디국제인권상'을 받았다. 당시 김근태 의장은 참석을 못하기도 했는데, 이후 그런 고문 같은 것은 없어졌을까?

인재근 : 제가 고문 폭로를 한 뒤에 그것을 듣고 (민주화 운동 와중에 감옥에 간 자식을 둔) 엄마들이 '우리 애들도 고문을 당할 수 있다' 그런 생각에서 적극적으로 면회를 갔다. 면회 안 시켜주면 난리를 폈다. 고문을 안당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 받고 오기도 하고.

프레시안 : 고문의 폭력성을 우리 사회에 각인시킨 계기가 됐던 것 같다.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설립도 당시(85년)에 주도한 것인가?

인재근 : 그렇다. 제가 9월 26일날 김근태 씨를 만나서 고문을 폭로하면서 이를 바드득 갈았다. 김근태 씨도 '내가 인재근한테 얘기했으니 인재근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생각했을 것이고, 남편이 불기(火氣)도 없는 병사(病舍) 방에 버려졌지만 그 희망 때문에 살아났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인재근이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다. 밖에서 뭔가를 할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소생한 것이 아닌가.

프레시안 : '바깥사람'의 역할을 확실하게 했다.

인재근 : 확실하게 했고, 그 다음 첫 재판인 12월 19일까지 저희가 면회를 못 했다. 김오수 판사라는 사람(당시 김근태 측이 제시한 고문 흔적에 대한 증거보전신청을 이유 없다고 기각했다. 김 판사는 후에 대법원 재판연구관, 부패방지위원회를 거쳤고,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편집자주)이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면회 금지를 했다. 증거 인멸은 걔네들이 하는 거지. 누누이 말하지만 딱지(살점)도 못 받게 하고, 걔네들이 다 한 것인데, 저를 만나서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금지시켜달라고 (검사 측에서) 요구해서 김오수 판사가 받아들인 것이다. 첫 재판 때까지 면회를 못했다. 그 사이에 내가 엄청난 일을 한 거지. 농성을 계속 하면서 사람을 끌어 모으고 고문 폭로도 하면서 민가협을 조직한 것이다.
▲ "갑자기 애가 없어지고 구속되고, 그런 줄도 잘 모르고 있는, 그런 어머니들이 민가협을 찾아오셨다. 점점 의식화 돼서 자기 자식을 이해하고, 자기 자식을 이해함으로써 이 나라의 민주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민가협'을 만든 것인가?

인재근 : 창립을 했다. 그 분들이 부문별로, 노동자 가족, 학생 가족,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의 가족, 장기수 가족, 이런 분을 다 엮어서 협의체를 만든 것이다. 협의체 총무 역할을 제가 하기로 하고 한 것이다.

프레시안 : 김근태의 수난이, 인재근이 사회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인재근 : 그렇게 말하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김근태의 수난이 그 시대의 대표적인 사건이지만, 많은 분들이 있다. 85년 86년에 가장 구속자 수가 많았기 때문에 제가 활동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던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갑자기 애가 없어지고 구속되고, 그런 줄도 잘 모르고 있는, 그런 어머니들이 민가협을 찾아오셨다. 점점 의식화 돼서 자기 자식을 이해하고, 자기 자식을 이해함으로써 이 나라의 민주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프레시안 :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으로 80년대에 권력의 탄압이 강화되고 있던 때였다. 수감자도 많아졌고, 그런 상황에서 민가협 출범은 그들을 도와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인재근 : 어머니들이 우왕좌왕하고 가슴이 막 벌렁벌렁해져서 뛰어 다니고 할 때였다. (민가협과 함께 하면서 그 분들이) 자기 자식 재판만 가는 게 아니라 다른 아이들 재판에도 가고, 또 책은 어떻게 넣어줘야 하고 신문은 어떻게 정리해서 넣어줘야 하는지 보고 배웠다. 우리가 책 빌려주는 사업도 했다. 어머니들에게 도움이 됐다. (자식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때 '이 쪽으로 갔을 것이다' 알려주고 보따리 싸서 면회 가서 아들 잘 있는지 보고 항의하라고 하면 어머니들이 굉장히 용기를 얻었다. 그게 힘이었다.

그런데 부인들하고 어머니들하고 또 다르다. 저는 애가 그 때 네 살, 일곱 살이어서 집에 와서 애도 돌봐야 하는데, 어머니들은 아들이 거기 (감옥에) 있기 때문에 집에도 안가. 아들 만나게 해 줄때까지 안 간다. (수감자) 부인들은 다르다. '어머니가 그렇게 귀하게 생각하는 아들이 저기 안에 있지만 내 아이들은 여기 있어서 나는 이 아이들 돌봐야 한다'는 것도 있고. 부인과 부모가 다르더라.

프레시안 : 인 여사가 김근태 고문 사건으로 활동했던 것들이 민주화 운동의 저변을 넓히는 데 역할을 한 것 같다.

인재근 : 상당한 역할을 했다. 6월 항쟁에서도 (민가협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김근태, 노무현, 피차 바보였어"

프레시안 : 개인적인 얘기인데, 김근태 의원은 어떻게 만나셨나?

인재근 : 소개팅...(웃음)

프레시안 : 소개팅이었나? 운동할 시간은 없고 소개팅할 시간은 있었나?(웃음) 누가 소개를 했나.

인재근 : 제 선배다. 지금은 국회의원인데 최영희 (민주통합당) 의원과 장명국 씨(내일신문 사장) 부부가 소개해줬다.

프레시안 : 장명국 사장은 김근태 의원의 고등학교 후배인데?

인재근 : 한 해 후배다.

프레시안 : 그 분들이 소개한 것인가?

인재근 : 네.

프레시안 : 첫 인상은 어땠나? 한 눈에 반하시고 그랬나?

인재근 : 아, 아니예요. 아니예요. (웃음)

프레시안 : 별로였나?

인재근 : (웃음) 수배 생활 오래해서 우울함이 얼굴에 배어 있었다.

프레시안 : 그 전에도 성격이 좀 우울하지 않았나?

인재근 : 저를 만나서 굉장히 명랑해졌다.

▲ 잘 됐다. (김근태) 의장님이 원한만큼은 안 됐다. 박용진, 이학영, 그런 분들이 좀 지도부에 들어갔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한 30년 이상 살았을텐데, 개인 김근태는 어땠나. 바깥사람이 보시기에는. 제가 듣기로는 양성평등상도 받았다고 하더라.

인재근 : 인성이 약간 우울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귀어보니까 여성에 대한 편견이 적은 사람이었다. 제가 앞으로 활동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하고 결혼하면 계속 제가 활동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그 점수를 많이 줘서 결혼을 한 것이다.

프레시안 : 집안일도 하시나. 청소, 빨래도 하시나?

인재근 : 하죠. 저보다 더 잘해요. 그 전에 약속했다. 내가 요리는 더 잘하니까. 애기가 나오면 애기도 보고, 집안일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결국은 그것을 다 어긴 거죠. 감옥에 갔으니까. 감옥에 가면 다 하나도 못하잖아.

프레시안 : 정치하신 뒤에는 집안일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인재근 : 집안일 하기는 어려웠죠. 설거지 같은 것은 잘 못하지만, 설거지를 할 수 있도록 치워놓고, '물 줘, 뭐 줘' 이런 것은 절대 안하고, 스스로 했다. 제가 없을 때는 밥도 다 챙겨서 먹고, 그런 것은 했다.

프레시안 : 제가 10월에 만났을 때는 앞으로 뭔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싶다는 의지가 굉장히 강해 보였다. 혹시 어떤 구상이 있었는지, 아시나?

인재근 : 대충 안다. 그 때쯤은 이미 통합이 이뤄질 즈음이었고, 그 전에는 통합을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전혀 아픈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 정도로 사람을 많이 만나 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중간에 저에게 그런 얘기는 했다. '통합이 굉장히 절실한데, 내 마음대로 안 돼서 내가 아플 것 같다'고 했다. 그 때 만난 분이 문성근, 김기식, 이정희, 김영훈 민노총 위원장, 장원석 민노당 사무총장, 죽 만났다.

프레시안 : 통합이 일단 이뤄졌다. 보시기에 잘 됐나?

인재근 : 잘 됐다. (김근태) 의장님이 원한만큼은 안 됐다. 민주 진보 진영을 다 통합하는 것을 원했는데, 그렇게까지는 안 됐다. 박용진, 이학영, 그런 분들이 좀 지도부에 들어갔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프레시안 : 2002년도 정치헌금 고백하신 부분 때문에, 당시 노무현 후보 측을 포함해 당내에서 '바보' 소리를 들었다. (2002년 3월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김근태 후보는 기자회견을 열고 '2000년 전당대회 때 권노갑 고문에게 2000만원을 받았고, 2억4000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밝힌다'고 고백했었다-편집자주)

인재근 : 피차 바보였어. 그 사람들(김근태, 노무현)은 둘 다 바보였어.(웃음)

"2012년, 인재근이 가만 있지 않을 거다"

프레시안 : 김근태 의원이 돌아가신 다음에 저는 명동 성당에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일 줄 몰랐다. 저는 '에이, 생전에 조금 밀어주시지'라고 생각도 했었는데, 민주주의자라는 칭호를 받으셨다. '정치인 김근태'가 남긴 게 뭐라고 보나. 그리고 김근태가 남긴 미완의 과제는 뭐라고 보나?

인재근 :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하는 분이라고 후대에 알려질 것 같다. 이번에 엄마들이 애기들을 데리고 오고, 일반 시민들이 많이 와서 애도를 표했는데, 그 엄마들이 아이들이게 그렇게 얘기했겠죠.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고,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고 얘기를 했을 것 같다.

제가 늘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읽는다. 12월 14일 내가 수첩에 글귀를 적었더라. 그 때 로마서였던 것 같다. 제목이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고 가르쳐라'였다. 그 때는 돌아가시리라고 꿈에도 생각을 못했는데, 제가 왜 그랬는지, 그 글귀를 수첩에 적어놓았더라. 마음에 확 와 닿아서 적었겠죠? 그 글귀가 생각났다. 아이를 데려와서 추도해주신 분들이 바로 그것을 실천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비 고비 때마다 '김근태는 지지도가 낮다.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지 않나. 이번에 보니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더라. 역사에 길이 남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슬프면서도 자랑스럽고 그랬다. 그리고 와주신 그 분들에게 이 지면을 통해서 꼭 '가시는데 외롭지 않게 애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꼭 말씀을 드리고 싶다.

프레시안 :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시고 돌아가셨는데, 김근태의 유산, 김근태가 해 온 일을 계승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인재근 : 유언같이 남긴 말에는,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고 했다. 총선과 대선을 얘기하는 것이다. 총선에서 이기고,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 국민들은 다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줄 알았는데, 반대로 자영업자, 식당 하는 사람들은 다 망해서 진짜 '못살겠다'가 됐지 않나.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 진짜 모두 참여해서 권력을 바꿔야 하는데, 저는 정말로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근태 씨 장관할 때, 역대 장관들이 한번도 안 간 소록도에 가서 한센인들을 격려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예산을 주고 그랬다. 당시 환자나 환자 가족은 물론 거기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도 너무 고마워했다. 중요한 자리에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앉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하물며 최고 권력자 자리에 어떤 사람이 앉느냐,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거기 (후보로) 나서는 사람도 중요하고 그 사람을 뽑는 온 국민이 중요하기 때문에 온 국민이 참여해서 권력을 바꿔야 한다.

프레시안 : 영결식이 끝난지 오래 지나지 않았다. 김근태 없는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인재근 : 사진 보고 '김근태 굿모닝' 하고, 잘 때 '잘 자라'고 하고.

프레시안 : 유품 같은 것도 아직 정리 안했나?

인재근 : 그대로 뒀다. 문도 잘 안 열어 놓아요. 냄새 나갈까봐.(웃음) 꽉 가두고 있어요.

프레시안 : 저도 64세는 짧다고 생각했다. 70, 80까지 활동을 하셔야 했는데, 최근에 보니 인터넷, 트위터 등에서 '김근태 대신 인재근 여사가 출마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있더라. 너무 성급한 질문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나?

인재근 : 예, 뭔가를 하긴 해야죠. 2012년을 점령하기 위해 뭔가를 하긴 해야 하는데, 제가 아직까지 결심은 못했다.

프레시안 : 추모 문화제 때 '김근태의 비밀병기'라고 스스로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중대 결심'을 하실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꼭 정치만이 아니라, '김근태 정신'이랄까, 하는 부분을 계승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실 것 같다. 김근태가 하고자 했던 것 중에 '미완의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완성해 나갈 수 있을까?

인재근 : 하여튼 2012년을 점령하기 위해 뭔가 할 것이다. 제가 스스로 '김근태의 비밀병기'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다. 제가 85년 민가협을 만들어 민주화 운동을 했으니까, 그런 것에 비춰 봤을 때, 저는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다. 하늘나라로 간 김근태 동지도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뭔가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 "2012년을 점령하기 위해 뭔가 할 것이다. 제가 스스로 '김근태의 비밀병기'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다. 저는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다. 하늘나라로 간 김근태 동지도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뭔가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김근태 씨'라고 하시는데, 평소에 호칭은 어땠나?

인재근 : 김근태 씨는 저를 꼭 인재근이라고 불렀다. 저는 대충 불렀다. 병준이 아빠라고도 부르고, 의장님이라고도 부르고, 근태 형이라고도 불렀다.

프레시안 : 사위가 민주통합당 박선숙 의원실 비서관이다. 정치에 뜻이 있나?

인재근 : 본인이 하고 싶어 한다.

프레시안 : 아드님도 정치하고 싶어 하나?

인재근 : 아니다.

프레시안 : 건강은 괜찮아요?

인재근 : 네. 건강하려고 한다. 그래야 일을 잘 마무리하고, 이룰 것 다 이룰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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