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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종주의'를 극복해야 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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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종주의'를 극복해야 할 시간

[민미연 포럼] 그대로의 북한과 마주하기 위해서

북미정상회담이 결정된 뒤 언론에 자주 나온 표현 중 하나가 '북한의 정상국가화'라는 말이었다. 미국과의 정상회담은 국제사회에 정상국가로 진입하려는 북한 지도자 김정은의 염원이라는 분석들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이 '정상국가'라는 표현의 적실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필자는 이것을 보고 무척 의아했다. 비정상국가는 정상국가라는 개념을 전제로 성립된다. 그런데 북한은 아직 정상국가에 이르지 못했다는 우리의 판단은 정당한 것일까? 아니 우리는 북한과 달리 정상국가인 것일까? 일본이 북한에 대해서 언제나 '납치문제해결'을 말한다. 10여 명의 일본인을 납치한 사실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북한의 약점이 되었다.

정상국가는 절대 외국의 민간인을 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북한 여종업원 집단탈북사건은, 언론보도에 따르면 국정원과 식당지배인이 공모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이제 비정상국가가 된 것일까? 트럼프의 지시로 미국 대사관이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비무장 봉기가 시작되었다. 진압에 나선 이스라엘군인들에 의해 피해자는 급격히 늘어나 사망자만 벌써 120명을 넘어섰다. 비무장민간인 120여 명을 살해한 이스라엘 정부는 정상국가인가? 아닌가? 이런 사례들만을 살펴보아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세계의 대부분 국가는 아직도 야수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남한을 포함하는 많은 나라의 비정상적 행위는 비정상으로 인지되지 않고, 오직 북한만 비정상국가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왜일까?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즉 '인종주의' 때문이다.

인문학자인 박홍규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에드워드 사이드를 20세기 최고의 사상가라 말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평생을 서구에 의해 해석된 동양관, 즉 오리엔탈리즘과 싸운 학자였다. 그에 따르면 19세기 서양은 동양을 침략하면서 동양학을 연구한다. 동양 연구를 지칭하기 위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오리엔탈리즘을 분석한 후,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에 관한 이야기와 담론을 서구가 주도적으로 만들어내고 제도화해 서양의 동양 지배를 정당화하는 권력 장치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구별에서부터 이미 권력과 힘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서양과 동양은 문명과 야만으로 바로 연결된다. 서구와 달리 본질적으로 미개한 지역에서는 비백인계 인종들이 살아간다. 오리엔탈리즘은 결국 인종주의로 귀결된다. 인종주의는 다른 인종 간 우열이 있음을 말한다. 인종주의는 인종 간에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인종주의는 우리 같은 문명인과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문명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본질적으로 '열등한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우리와 그들을 구별한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그들이 가진 야만성에 따르는 자연적 결과다. 하지만 우리의 야만성은 드물게 발생하는 실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바로 인종주의다.

오리엔탈리즘으로 무장된 서구인들에게 비서구인들의 문명은 야만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가 만든 세계시스템에 합류하게 되면 야만의 주홍글씨는 희석된다. 인도는 영국 점령 이전에 세계 경제의 24%를 차지했으나, 영국에 의한 착취에 시달리다 독립 후 4%로 급락했다. 스스로를 문명의 진보로 자처하는 서구의 대표선수 영국은 단 한 번도 인도점령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죄한 적이 없다. 잔혹한 노예노동으로 콩고인 1000만 명을 죽게 한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은 여전히 벨기에 여기저기 남아있다. 이 모든 잔혹함은 '문명적 진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었다. 안드레 블첵은 촘스키와의 대담집 <촘스키, 은밀한 그러나 잔혹한>(권기대 옮김, 베가북스 펴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의 개입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숫자가 무려 5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그럼에도 서구는 자유의 수호자로 인식된다. 어째서 이런 코미디가 생겨난 것일까? 알제리 독립운동가 프란츠 파농은 그의 저서 <검은 피부와 하얀 가면>(노서경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서구가 만든 모험 이야기를 읽을 때 이야기의 주인공으로부터 공격당하는 흑인을 같은 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흑인을 공격하는 백인 주인공들에게 감정 이입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독서 경험으로 흑인은 백인 아닌 백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흑인에게 깊은 열등감의 원천으로 작용한다고 파농은 말한다. 서부영화를 보던 한국 어린이들이 인디언을 공격하는 장면에서 백인 기병대에 감정 이입한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하겠다. 바로 이것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의 시각 대신 서구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인종주의다.

현대의 인종주의는 백인과 비(非)백인을 경계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서구가 만든 세계시스템에 참여하는 비서구국가들이 증가했기에 인종주의는 더욱 정교해져야 한다. 현대의 인종주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그어진다. 인종주의적 오리엔탈리즘도 서구식 자본주의에 편입되는 국가들을 향해서는 면책된다. 인도는 세계적으로 최악의 인권 후진국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이며 민주주의의 외피를 쓰고 있어서 잔혹한 미개인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반면에 인도의 카슈미르탄압에 비교하자면, 훨씬 온건하게 티베트 현지를 통치하는 중국은 악의 제국으로 투영된다. 중국은 서구의 기준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두 가지 중 한 가지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 시스템에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시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서구의 기준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모두를 철저하게 배척해온 나라가 있다. 바로 북한이다. 북한에 대한 악마화는 세계시스템에 대한 그들의 거리감만큼 강화되어왔다. 북한에 대한 악마화를 벗겨내는 작업조차 이제는 우리의 지적 능력으로 수행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북한 악마화'를 벗겨내기 위해 또다시 서구출신 연구자의 책을 참조해야 한다.

뛰어난 북한 연구자 헤이즐 스미스의 책 <장마당과 선군정치>(김재오 옮김, 창비 펴냄)를 살펴보면, 우리가 그동안 언론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북한 이미지가 북한의 실상이 아닐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스미스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1940년 북한 주민의 평균수명은 40세였다. 처음 실시한 북한 인구조사 자료에서는 1993년 기대수명이 73세였다. 이미 달성했던 성과물로 본다면 북한의 정책은 주민들을 굶겨 죽이는 게 아니라 먹여 살리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급성 영양실조의 지표인 체력저하율은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에 최고였던 1998년 15.6퍼센트에서 2012년 5퍼센트로 줄어들었다. 이는 동아시아의 평균 4퍼센트보다 약간 나쁜 수치이다."

"2012년 체력저하율이 각각 20퍼센트와 13퍼센트이고 발육부진율이 각각 최대 48퍼센트와 36퍼센트인 인도와 인도네시아와 비교할 때 북한의 아동영양실조 수치는 세계보건기구 기준으로 공중보건중요성에서 '중간' 정도였다. 북한이 주민들을 굶겨 죽이고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민주적 정부가 상습적으로 계속해서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누구나 불편해할 수 있는 주장을 해야 할 것이다."

"마약 공급처로 북한의 수입에 대한 모든 전체적인 추정치는 단편적인 자료에 기반하고 있고 기껏해야 추측에 불과하다."

"놀랍게도 북한의 국가범죄에 관한 격렬한 반응과 당연시되는 가정에도 불구하고 북한 국적자가 위조 물품 생산과 밀수로 기소되거나 유죄판결을 받은 국제소송사건은 거의 없다."

이 책의 서론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남한의 분석가나 학자는 국내정치와 법에 의해 일상적으로 제약을 받아왔는데, 북에 동조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어떠한 형태의 활동도 형사적 처벌을 통해 금지되었다."

북한은 지옥도 천국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북한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서구가 만들어 놓은 북한 악마화, 즉 '인종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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