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며칠 동안,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이는 두 장면이 동시에 전개됐다. 하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미 협상의 드라마다. 미국 대통령의 느닷없는 협상 중단 엄포로 세상이 깜짝 놀라는 일도 있었지만, 어쨌든 싱가포르 회담은 성사됐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가 보인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했다. 자유한국당 정치인들 정도를 제외하면 누구든 정부의 이런 노력에 박수치며 힘을 몰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정부와 여당이 같은 시간에 국내에서 보인 모습은 전혀 상반됐다. 이들은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의 유례없는 지지를 받으며 최저임금제도를 개악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상여금뿐만 아니라 복리후생비까지 최저임금에 산입해 사실상 임금 인하를 강행했다. 물론 민주노총 등 진보-노동 세력이 반발했지만, 선거 국면임에도 정부와 여당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선거를 앞두고 더 신경 써야 할 세력이 누구인지 계산이 끝난 탓이라 볼 수밖에 없겠다.
이 두 장면은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 중 첫 번째는 역시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이다. 한반도 평화를 둘러싼 행보만 보면 '촛불' 정부가 맞는데, 최저임금 문제에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그림자가 연상되기까지 한다. 도대체 어느 쪽이 문재인 정부의 진짜 얼굴인가? 촛불의 사명을 '리버럴 세력 집권'보다 더 크고 준엄한 무엇으로 생각해온 모든 이들에게 사뭇 중대한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부의 성격만 문제가 아니다. 위 두 장면은 노동운동의 이후 과제를 놓고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한반도 평화 국면과 최저임금제 개악 국면 모두 노동운동이 과거와는 다른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할 이유로 다가오고 있다. 아니, 최저임금제 개악 반대 투쟁을 통해 이미 노동운동의 무게 중심이 바뀌었음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평화 국면과 최저임금 국면의 동시 전개가 뜻하는 바
사실 낯설지 않은가. 지금 노동운동 전체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쟁점은 어느 대기업의 협약 임금이나 정리해고 문제가 아니라 최저임금제도다. 새 정부 출범 전만 해도 최저임금은 최저임금위원회 결정이 이뤄지는 6월에나 잠깐 주목받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최저임금 인상이 가장 중대한 일상 과제로까지 느껴진다. 민주노총 스스로 최저임금 쟁점을 부각시키려고 '최저임금 1만원' 운동에 앞장서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이 이렇게 빨리 닥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 상황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이 만들어온 문제 해결 구조가 정작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병폐인 소득-자산 양극화를 해결하는 데는 무용하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 돼 있다. 기업별 노동조합 중심 체제에서 비롯된 기업별(더 정확히 말하면, 대기업-공기업 정규직 중심) 단체협상 구조는 실은 소득-자산 양극화를 치유하기는커녕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톱니바퀴 중 하나였다. 뜻 있는 이들 모두가 노동운동의 중심을 이 구조로부터 다른 쪽으로 옮겨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런데 이미 무게 중심이 눈에 띄게 이동한 것이다! 최저임금 논란 정국이 이를 보여준다. 노동운동은 메아리 없는 문제제기만 반복했던 게 아니라 나름 진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존재하는 다른 문제 해결 통로, 즉 최저임금제도에 과거와는 다른 무게를 부여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운동 양태를 발전시켰다. 물론 아직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진화의 여정에 스스로 두 발을 담근 것만은 틀림없다.
한데 바로 이 시점에 한반도 평화 국면이 열리려 한다. 어찌 보면 노동운동과 직접 연관되지 않은 변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분단 질서의 규정력은 좁은 의미의 군사 대결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남북 두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가 모두 이 질서의 그림자 속에서 자라났다. 국가기구가, 국민경제가, 대중문화가 다 그 짙은 그림자 속에서 발육(아닌 발육을)했다. 평화 프로세스란 이 분단 질서를 교류와 협상을 통해 해체-재편하자는 것이고, 해체-재편의 목록에는 그래서 남북의 정치, 경제, 문화가 다 포함돼야만 한다.
노동운동은 이 과정을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다. 이제까지 노동운동은 재벌, 관료, 보수정치세력이 만들어놓은 질서를 규탄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애초에 노동운동이 대변하는 사회 세력에게는 이 질서를 만드는 데 목소리 하나 더할 기회조차 부여되지 않았다. 따라서 비판자의 위치에 서는 것은 선택 이전에 필연이었고, 어떤 경우는 기존 질서를 전적인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 국면에 이 위상을 그대로 이어갈 수는 없다. 오히려 적극적인 참여와 개입이 필요하다. 남북의 협상을 통해 두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가 변형될 기회가 열리려 하기 때문이다. 노동 대중의 참여와 권리를 짓밟으며 등장한 분단 질서와는 정반대로 이 질서의 해체-재편 과정에서는 노동 대중의 존재가 항상 부각되고 그 목소리가 울려퍼져야 한다. 그러자면 노동운동이 이 과정에 처음부터 두 발을 깊이 담가야 한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남북미 정상회담 전개와 함께 남북 경제 협력이 급물살을 타리라는 기대가 일고 있다. 그 목록 안에는 남쪽 노동시장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대북 인프라스트럭처 투자도 있지만, 관계가 없다 할 수 없는 제2, 제3 개성공단 건설 전망도 있다.
이런 식으로 남쪽 자본의 이동이 지금보다 자유로워지면, 노동의 이동 없이도 노동시장이 확대되는 셈이 된다. 가뜩이나 낮은 소득과 격차에 신음하는 남쪽 노동시장의 약자들이 북쪽의 새로운 경쟁자들과 저임금 일자리 경쟁을 하는 상황이 열리는 것이다. 대북 투자의 방향과 규모, 속도를 국가가 조절하지 않고 이러한 국가 개입에 노동 대중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는다면, 일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모처럼의 평화가 노동력 덤핑으로 이어지지 않게 한다는 이런 소극적인 측면에서든, 아니면 노동과 지역 공동체, 생태계가 함께 살아나는 한반도 경제를 만든다는 적극적인 측면에서든 노동운동은 평화 협상 국면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다. 참여하고 개입해야 한다. 과거에는 사후적 '비판'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국가 운영에 선제적으로 '개입'해야만 한다.
일자리-복지 확대를 위한 개입 전략
지금 노동운동이 국민경제 운영에 개입할 통로는 거의 최저임금제도 하나뿐이다. 그러다보니 최저임금제에 과도하게 하중이 걸린다는 느낌이다. 최저임금은 물론 중요하지만, 여기에만 집중하다보니 막상 넓어져야 할 전선이 넓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현 정부가 가장 바라는 반응은 아닐까.
정부 역시 '소득 주도 성장'을 외치면서 정책 수단으로 최저임금제도만을 강조한다. 최저임금을 상당히 인상해 '개혁'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반대로 최저임금 인상을 사실상 뒤로 돌리는 조치를 통해 '온건'한 면모도 과시한다. 일석이조다. 아니, 삼조다. 눈길을 온통 최저임금으로만 돌림으로써 정부가 지금 쓸 수 있고 마땅히 써야 할 다른 소득구조 개선 정책을 쉽게 뒤로 미룰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최저임금 전선은 지속돼야 한다. 그러나 전선이 한 곳으로만 집중될수록 행동의 여지가 좁아지는 것은 단연 노동 쪽이다. 달리 말해, 지금 제2, 제3의 전선이 열리도록 쟁점을 확산시켜야 하는 쪽은 진보-노동운동이다.
이를 위해 우선 최저임금위원회 외에 또 다른 개입 통로를 열어야 한다. 넓은 의미의 경제 정책을 놓고 노동운동 대표들이 참여하는 테이블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좋다. 과거 논란의 기억 때문에 이런 테이블 이야기만 나오면 '타협'이나 '투항'부터 떠올리는 관성에서는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번 최저임금 개악 국면이 좋은 사례다. 국회가 개악안을 밀어붙이자 민주노총은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파업 투쟁을 벌였다. 모처럼 기업 울타리를 넘어서고 여론의 상당한 지지를 받은 파업이었다. 이 사례가 말해주듯이, 경제 정책을 둘러싼 사회적 협상은 투쟁 노선의 강온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런 테이블이 열리기만 한다면, 노동운동이 제기할 의제는 차고 넘친다. 무엇보다 소득-자산 양극화에 맞설 긴급 대책을 요구해야 한다. 자산 양극화와 관련해서는 자영업 부문의 최저임금 인상 제약과도 연관된 임대료 문제 해결이 그런 긴급 대책일 것이다. 정부가 영세자영업자들의 처지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노동운동은 상가 임대료 문제를 다루자고 해야 한다. 최저임금위원회 같은 기존 기구로는 그런 의제를 다룰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런 의제를 다룰 또 다른 테이블을 열라고 해야 한다.
소득 양극화에 맞설 긴급 대책은 공격적인 재정 확대 정책을 통한 공공 일자리 확대와 복지 확대다. 이것은 어쩌면 노동운동의 고전적인 공식이라 할 수 있다. 세계 노동운동은 자국의 경제 정책에 개입하면서 늘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와 복지 확대의 최적 조합을 추구해왔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정책 조합 안에서 일자리와 복지가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해결하지 못하는 소득 문제에 대처하려면 일자리 보장과 복지 확대가 병행돼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한국 노동운동도 집회에서 이런 내용들을 구호로 외치기는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최저임금 인상 요구안만큼 구체적인 방안을 협상 테이블에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점도 우리 노동운동이 전면적 개입 전략에 적극 나서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노총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사회적 협상 기구 참여를 둘러싼 악무한적 논란이 아니라 우선 이런 구체적 요구안부터 토론하고 입안하며 선전하는 게 아닐까.
이탈리아 국민고용계획의 교훈
나는 최근 읽은 한 역사책에서 노동운동 측의 일자리-복지 확대 요구안의 훌륭한 선례를 발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몇 년 뒤, 아직 혼란한 이탈리아 사회에 제1노총인 이탈리아노동총연맹(CGIL)이 제시한 '국민고용계획'이다. 이를 소개한 책의 한 대목을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실업과 빈곤이라는 쌍둥이 악마와 대면했던 이 시절에 CGIL은 국민고용계획(피아노 델 라보로)이라고 알려진, 장기적 관점의 전략으로 대응했다. 1949년 10월 CGIL 제2차 대회에서 디 비토리오[CGIL 사무총장]가 노조 계획을 공개했다. 세 가지 영역에 집중된 공공 지출 프로그램이 구상되었다.
첫째, 전력산업을 국유화할 것이고, 새 발전소와 수력발전 시설과 급수장이 가장 필요한 곳, 특히 남부에 건설할 것이다. 둘째,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농업 프로그램이 있는데, 광범위한 토지 간척과 관개 사업에 따른 혜택은 농업 종사자들이 받게 될 것이다. 셋째, 주택과 학교, 병원이 급격하게 부족해지는 문제에 전국적 건설 계획으로 즉시 대처할 것이다.
세 영역 모두, 정부 특수 기관을 창설해 프로젝트의 재원을 조달하고 사업을 완수할 것이다. CGIL은 자신들의 계획이 성사되면 3~4년에 걸쳐 60만~70만 명의 사람들에게 일을 제공하게 되리라고 추산했다. 그 재원은 높은 세율의 누진세로 조달될 것이지만, 디 비토리오는 계획이 수용되기만 한다면 노동계급 역시 새로운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언했다." (폴 긴스버그, <이탈리아 현대사 1943-1988: 반파시즘 저항운동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의 몰락까지>, 안준범 옮김, 후마니타스, 2018. 274쪽)
노동운동이 개별 산업이나 기업의 단체협상에 그치지 않고 이런 종합계획을 내놓아 광범한 저소득층, 실업자, 미조직 노동자의 이해까지 대변하려 한 것이다. 역사가는 이렇게 평가한다.
"1949년 계획은 실업자와 남부 빈민의 욕구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언제나처럼 디 비토리오는 동일한 투쟁 안에서 북부와 남부를, 취업자와 실업자를, 조직된 노동계급과 노조에 속하지 않는 노동계급을 연결하기를 바랐다." (위의 책, 275쪽)
애석하게도 국민고용계획은 제대로 관철되지 못했다. 이탈리아 사회에 아직 반파시즘 투쟁의 열기가 남아 있었음에도 이 절호의 기회를 부여잡지 못했다.
한 번 때를 놓치자 그 뒤에는 좀처럼 그와 같은 기회가 다시 오지 않았다. 이후 이탈리아 좌파는 '구조개혁'을 외치며 경제 운영에 개입해보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촛불 이후 정세와 한반도 평화 국면이 겹치는 지금이야말로 그런 기회가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우리 나름의 '국민고용계획'일 것이다. 한국 노동운동이 21세기 한국판 '국민고용계획'을 들고 말 그대로 노동'계급'의 대표로 협상장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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