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작고한 리영희 선생님일까? 아니면 70-80년대 외롭게 진보정당운동을 해왔던 김철 사회당 당수였을까? 아니면 남민전과 같은 지하운동을 했던 김남주 시인일까?
아니다. 이들보다 진보의 부활에 더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광주학살을 통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수일변도의 한국사회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만듦으로써 수많은 진보정치인, 학자, 운동가들이 평생을 걸고 온 몸을 바쳐 노력했지만 실패한 진보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한 칼에 해결해주고 말았다. 이 점에서 때로는 전두환이 '진보의 불모의 땅'에 진보를 부활시키기 위해 군에 위장취업하여 기회를 노려온 '위장취업 좌파'가 아니었던가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한다.
그렇다.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력 중의 하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역사는 결코 특정인이 의도한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우리가 역사를 '주체 없는 과정'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두환과 같은 극우파시스트도 때로는 의도하지 않게 진보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고, 진보운동도 자신의 의도와 달리 보수의 강화에 한몫을 하기도 한다. 사실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면에서 보자면, 노무현대통령은 신자유주의정책에 따른 사회적 양극화 등 여러 실정을 통해 어느 한나라당 당원보다도 한나라당 집권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면, 이제는 이명박 대통령이 마치 2007년 대선에서 노대통령에게 진 빚을 갚아주려는 듯 최고의 '민주통합당 비밀당원'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을 폭로한 고승덕 의원. ⓒ뉴시스 |
2004년 탄핵정국에서 총선불출마라는 깜짝 카드로 서울시장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든바 있는 오 전시장이 무상급식 논쟁 속에서 또 한번 깜짝 카드로 대선경쟁의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주민투표라는 극약처방을 선택했다. 그러나 주민투표에서 패배함으로써 2012년 총선과 대선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오 전시장의 돈키호테식 도박덕분에 서울시장 재선거판이 만들어지면서 안철수 현상이 폭발했고 박근혜 대세론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 전 시장이 주민투표에서 패배하고 시장직을 물러나면서 한나라당의 대선구도는 흥행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나라당의 대선구도는 오 전 시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정몽준 의원, 이재오 의원 등 수도권의 거물들이 수도권을 대표하는 경선주자자리를 놓고 일종의 예비경선을 거치고 이들의 승자가 영남권을 지지기반을 하는 박근혜 의원과 다시 경선을 하는 구도로 나가야 국민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그러나 오 전시장이 낙마하면서 이같은 그림은 완전히 깨져 버렸고 사실상 박근혜 독주구도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한나라당 당대표 선출과정에서 뿌려졌다는 돈봉투를 폭로한 고승덕 의원의 폭로도 마찬가지다. 물론 고의원이 이같은 핵폭탄을 폭로한 동기는 알 수 없다. 구체적으로, 그같은 폭로가 가져올 엄청난 사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우발적인 폭로였는지, 아니면 일부 언론이 전하듯이 친이계에서 친박계로 변신하기 위해 계획된 추파였는지, 돈봉투를 돌린 사람으로 거론되고 있는 박희태 국회의장의 측근이 자신의 지역구를 노리는 데에 대한 자구적인 선제공격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고 의원이 한나라당에 대한 민심을 이반시켜 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개혁세력이 승리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폭로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 의원의 폭로는 의도하지 않게 그러한 방향으로 민심을 몰고 가고 있다.
사실 언론의 보도와 고 의원의 폭로처럼 박희태 국회의장이 금품살포의 장본인이고 돈봉투를 전달한 사람이 김효재 청와대 정무수석인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 그 파장은 단순한 민심이반에 따른 정권교체 이상의 충격적인 것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현직 국회의장과 청와대 수석이 사법처리대상이 되게 된다는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아들 김현철 게이트 등으로 임기 말 1년 전에 식물대통령으로 전락하고 만 김영삼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임기를 일 년이상 남겨 놓고 심각한 레임덕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가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이와 정반대의 상황도 상정해 볼 수 있다. 고승덕의원의 폭로가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당혁신 작업에 저항하고 있는 친이계과 당내 기득권세력을 무력화시키고 한나라당의 발본적인 혁신에 기여하는 반면에 민주통합당과 민주개혁세력이 자만에 빠져 자기혁신에 게으르게 만듦으로써, 오히려 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승리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이와 관련, 타이밍에서 다소 생뚱맞기는 하지만 자신이 민주통합당의 전신인 야권에 몸담았을 시절 "금품 살포를 목격한 바도, 경험한 바도 있다"는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의 발언, 이에 이어진 동아일보 종편인 <채널A>의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 금전 살포 보도, 이에 따라 터져 나오고 있는 민주당 전당대회의 금품살포에 대한 익명의 폭로, 그리고 이에 대한 민주당의 미온적인 대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박근혜 의원이 주도한 비대위가 친이계 등의 반발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고의원의 폭로가 터져나와 친이계의 반발이 상당히 동력과 모멘텀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 김대중 정권 말기인 2002년 초 만하더라도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이 줄줄이 연루된 '홍삼게이트'등으로 정권재창출이 어려워 보였으나 그 같은 위기의식이 국민경선제의 도입 등 민주당의 발본적인 자기혁신을 촉발시킴으로써 정권재창출을 가능하게 만든바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세훈 전시장도 마찬가지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패배와 시장직 사퇴가 안철수 현상을 가시화시켰고 박근혜대세론에 타격을 가했지만 이것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한나라당과 박근혜 진영이 대세론에 머물러 안주하는 것을 막아줬고 안철수 현상을 조기에 가시화시킴으로서 이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줬다. 또 복지에 대한 민심에 어디에 있는가를 잘 보여줌으로써 한나라당과 박근혜 진영이 민심의 방향으로 좌경화하는데 기여를 해줄 수 있는 바, 이미 비대위가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민주통합당과 민주개혁세력은 잊지 말아야 한다. 오세훈 사태와 고의원의 폭로 등 한나라당의 자중지난에 희희낙락하며 자만에 빠져 자기혁신에 눈을 감아서는 오세훈의 무리수에 따른 서울시장직 획득과 한나라당의 동봉투 사태라는 복덩어리가 오히려 재앙이 되는 '전복위화'사태가 생겨날 수 있다.
오세훈전시장과 고승덕의원이 정권교체의 영웅이 될 것인가, 아니면 역으로 민주개혁세력을 무장해제시켜 정권교체에 실패하게 만드는 '트로이의 목마'가 될 것인가는 결국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과 같은 구체적인 정치적 주체들이 이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있다.
정권교체의 영웅인가? 아니면 트로이의 목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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