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인 한홍열 한양대 교수는 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인영 의원실과 코리아컨센서스연구원(KCI) 공동 주최로 열린 토론회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경제정책과 평화체제 구상'에서 "남북 경협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의 전제가 중요하다"며 "남북 경협에서의 익숙한 패러다임(개발론)은 '북한은 어떤 경제정책을 추구하느냐'에 대한 고려가 전혀 안 돼 있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한반도에는 남북한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경제 시스템이 있고, 각자가 경제정책을 취하는 가운데 협력한다는 관점에서 경협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며 "우리가 북한 경제를 어떻게 '개시시킨다(initiate)'는 관점은 안 된다"고 비판했다.
한 교수는 "북한의 경제적 목표는 산업화와 공업화"라며 "북한의 경제발전 정책은 경공업 중심의 수입대체(Easy Import substitution)"라고 분석했다. 그는 "북한이 매년 신년사에서 제시한 연도별 분야별 정책과제를 보면, 지난 5~6년간 일관되게 주민 일상생활 수요를 충족시키는 경공업 육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금속·화학 등 중공업은 이런 경공업 발전을 위해 원자재나 중간재를 국산화해 충분히 공급하는 역할"이라고 분석했다.
한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신 경제지도' 구상에 대해 "기본적으로 좋은 방향이지만, 동쪽에는 가스관, 서쪽에는 바다를 이용하고 철도를 놓고 이런 물류 시스템 얘기가 대부분이다. 즉 인프라스트럭처 개발에 매몰돼 있다"고 지적하면서 "인프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인프라는 '지원'하는 것이다. 무엇을? 산업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남북 경협과 투자를 말하지만 산업화 얘기는 빠져 있다. 인프라 투자는 북한 산업화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며 "한반도 경제 통합의 1단계는 '한반도 산업개발공동체'의 형성이 돼야 한다. 이는 북한의 산업 생산력 복구·개발에 초점을 두는 단계"라고 제안했다.
한 교수는 "북한 산업생산 능력 복구를 위한 정책수단은 '공동산업개발구'라는 새로운 형태의 합작공단"이라며 "물론 개성공단은 재개돼야 하지만, 개성공단은 남북 협력을 위한 상징적 모형이었고 이제는 그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기업이 북한의 싼 임금을 이용해 우리의 최종생산재 경쟁력을 올리는 방식은 이제 그만하고 남북한 산업이 유기적 생산분업체계를 구축하는 모형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개성공단 방식의 한계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공동산업개발구에는 물론 한국 중소기업도 진출하지만 '북한 기업'이 생겨나야 한다"며 "북한 기업이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바탕이 될 공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개성공단 방식'이나 인프라 개발에 치중한 투자는 "철도를 깔아놓고 북한을 '패싱'해 우리 물건이 중국·러시아로 간다는 얘기"라며 "인프라를 통해 실어나를 북한 물품 생산력(성장)을 경협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북한 자원 개발, 가스관 사업 등은 조심해야 한다. 러시아의 사례에서 보듯, 산업 구조를 독점적으로 바꿀 위험이 크다"며 "그에 비해 개발구 중심의 제조업 육성은 산업 구조 면에서 민주적이고 고용 창출 효과도 크다. 산업 개발을 통해 신 경제지도 구상을 뒷받침하는 게 좋다"고 주장했다.
그는 '1단계'인 산업개발공동체 구성 단계 이후의 전망으로 '한반도 공동시장(2단계)', '경제 공동체(3단계)'를 제시하며 "2단계에서는 북한 경제가 제조업 중심으로 고도 구조화하는 과정에 들어가고, 그 고도화를 위해서는 북한 경제가 세계 시장에 편입돼야 한다"고 전망했다. 그는 EU의 전단계인 유럽의 시장 통합(EEC)과 같은 '공동 시장' 구상이 현실화되기 위한 조건으로는 "양 경제가 일정 수준으로 수렴돼야 한다"며 "그 기준은 (시장을) 개방하더라도 일방적으로 북에서 남으로 이동할 수요가 크지 않은 상태, 북에서 계속 경제활동을 해도 큰 문제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그는 2단계인 시장 통합 단계에서 경제 규약(code) 제정 등이 필요해지고, 이때부터는 경제를 떠나 정치적 영역으로 접어들게 될 것이라며 "한반도 경제공동체 부분은 매우 규범적인 이야기다. 장기적 비전으로 남겨둬야 한다. (오히려) 그 비전 때문에 지금 해야 할 일이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토론에 나선 이영훈 SK경영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의 수요(needs)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며 "북이 그 동안 '설탕 없이는 살아도 총알 없이는 못 산다'는 식의 선군경제노선, 김정일 노선에서 '병진노선'을 거쳐 최근에는 경제 우선 노선으로 전환했는데, 그냥 전환된 것도 아니고 굉장히 성과를 보이며 전환했다. 산업정책이 군수공업 중심에서 경공업으로 전환하면서 김정일 때와는 달리 시장을 억압하지 않고 제재라는 제약 속에서도 성장했다"고 분석했다.
이 연구위원은 특히 "최근 북한은 평양의 거리 명칭을 모두 과학기술 관련 이름으로 붙일 만큼 지식산업, 과학기술을 중시하고 재정 투입도 상당히 하고 있다. 4.27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정보통신기술(ICT) 관련 남쪽이 투자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했다는데, 이는 평양의 은정과학기술특구를 염두에 둔 것 같다"며 "북한의 니즈(수요)는 정상적 단계를 밟아가는 발전 방식이 아니라 단번에 도약하고 싶다는 의지다. 그게 전제돼야 한다"고 한홍열 교수의 '단계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연구위원은 또 "경협에 들어가려면 전력·에너지 등 인프라가 가동돼야 하고, 인프라 투자가 되려면 대규모 외자가 들어가야 한다"며 "그게 가능하려면 국제 금융기관의 협력이 있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게 IMF다. IMF에 가입하려면 미국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결국 시간을 두고 공적개발원조(ODA)-외자직접투자(FDI) 순서로 들어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베트남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그것을 건너뛰고 산업협력 공동체 형성으로 바로 가는 것은 '점프'를 하는 것"이라고 지나친 속도론을 경계했다. 그는 또 "한국이 모든 것을 독점할 수 없다"며 "미국 컨소시엄이나 중국·일본 자본이 들어올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개혁개방 모델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대부분 "중국식도, 베트남식도 어렵다. 어떤 식을 해도 결국 '북한식'이 될 것"이라는 의견에 수렴되는 양상을 보였다. 북한의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는 "경제 개발 노선에서는 북한은 중국·베트남식을 채택하기 힘들다"며 "지금 베트남식 모델이 거론되는 것은 경제개발이 아니라 미중 양국 사이에서의 '헷징(위험 분산 투자)' 때문"이라고 했다.
한홍열 교수는 "중국은 아주 큰 나라이고, 베트남은 베트남전쟁 이전에 시장경제 경험이 있었다"며 북한이 처한 상황은 그 두 나라와는 전혀 다르다고 지적하고 "남쪽에 한국이 존재한다는 것도 차이다. 한국이 어떻게 핸들링하느냐에 따라 세계사적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북한식 모델이 결정될 수 있다"고 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