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에 거리에 선 도시인들은 광화문 한복판의 스피커 소리에 놀란다. 그 소리는 귀를 따갑게 했고, 펄럭이는 군대 깃발은 미술관의 전시보다 더한 역동이었다. 씁쓸한, 그리고 빛바랜 그들의 군가는 태극기를 펄럭이게 하고 미국의 성조기와 동조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말했다. 성조기가 왜 그 마당에 나와야 하느냐고. 볼멘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우리는 그렇게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난장을 본다. 과거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그곳에서 볼 수 있음은 다른 학습이다. 안타깝고 안쓰러운 풍경들. 그들은 국민일까, 국민이 아닐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던데, 그 국민은 어디로 갔을까.
그 건너편에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 그들의 목소리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일민미술관 옆 동아일보사, 그 앞마당에서도 강연회가 열렸다. 여지없이 군대의 깃발과 군화, 군복이 동원된다. 애국가는 새로운 버전의 유행가로 사람들을 발맞추어 행진하게끔 한다. 적은 선명하고 구호는 크다. 그런 거리를 지나 미술관에 들어섰다. 투명한 미술관의 창은 따뜻한 봄볕을 가득 담아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입장한 전시에서 발견한 놀라움,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을 나는 목격했다.
그 건너에 있는 서점. 새로운 책들의 제목은 '4차 산업혁명', '블록체인기술', '변화의 시대'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고, 이 변화를 주도하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경쟁이 아니라 평화를, 이기기 위해 겨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손잡기 위한 연대를 원했다. 평화 올림픽이 열리는 이 시간, 나는 봄볕을 따라 ‘혁명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미술관을 찾았다. 진실의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인간의 ‘그 무엇’이 원인이고, 이는 온갖 문제가 되는 결과를 빚어낸다. 그 과정을 미술관의 작품이 그려낸다.
점령당한 거주자
전시는 <다공성 계곡>으로 우리를 몰고 갔다. 커다란 비디오에서 내심 뿜어져 나오는 광물은 '같은, 그러나 다른' 존재를 그린다. 너의 모습은 나와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다르다. 그들은 같은 계곡에 살고 있으나 그들의 데이터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데이터는 누군가에 의해 심사되고, 그것은 강력한 결정과 판단의 근거가 된다. 4차 산업혁명 신화가 작품 속에서 신랄하게 저격당하고 있었다.
작품은 데이터를 수집한 자와 수집당하는 자 사이의 문제를 다룬다. 광물은 존재의 은유로 이동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겨룬다. 그들은 데이터를 평가 받아 이주와 점검, 조치를 받는다. 그들의 몸은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표준화되기 위해 해체된다. 기준은 그들의 삶에서 정당성과 타당함의 순위를 획득한다. '혁명적' 검열은 조직적이고 과학적이며 정확하다. 기술은 발전했고 데이터는 축적되고 있다. 그 한 복판에서 사람의 '순도'는 더 분석되고 더 차별화된다. 누구는 정보를 갖고, 누구는 정보를 네트워크화한다. 또 다른 누구는 그 정보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정보는 이미 권력의 자리를 확보했다. 데이터 마이닝과 데이터 이송은 정보를 재배치하고 플랫폼화한다. '이것은 옳다, 이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은 그들 고유의 것이다. 그들은 판단을 통해 사회를 정화한다. 피부가 검거나 그 계곡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은, 감히 그들의 검열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검역당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인격이 될 수 있다.
누군가의 머리 위로 투명하게 이동하는 빅데이터를 생성하는 권력. 그 권력의 권좌에 누군가를 앉힌다. 그는 과학이고, 그는 사실이며, 그는 진실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법이 되고, 그가 말하는 세계는 질서가 된다. 그를 따르지 않는 자, 범법이다. 그는 도태되어야 할, 혹은 삭제되어야 할 무가치한 존재로 인지된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닥쳐올 미래는 이렇게 우리의 낱낱의 조건을 해부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인격을 평가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무섭다. 그리고 다른 방법을 모르겠다. 피해갈 방도도 없다. 혁명은 두려움이기 이전에 존재를 불안하게 한다. 그 조정자의, 혹은 그 조직자의 양심을 믿을 뿐.
작가는 어디에 서 있는 걸까. 작가의 시선은 상품이 된 정보에 주목했다. 작가의 관심은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를 다뤘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보려는 사람들, 그것으로 규제와 기준을 세우고 그래서 배제와 선택을 행하려는 자들. 행복의 오아시스가 그들 때문에 안 된다는 논리를 만들려는 사람들, 그 속에 있음을 역설한다. 작품은 노란 자본주의의 색깔로, 백인여성의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말한다. "새로운 변화가 유토피아가 된다"고. <클라우드 너머, 국경너머 오셔닉 매직 솔루션>은 이렇게 전한다.
"하지만 이주자가 새로운 삶을 시도할 때 복잡한 과정과 막대한 비용은 그들을 더 취약하게 만든답니다. (...) 안전한 루트를 선택하세요. (...) 마이그레이션 과정 실패. 계획하고 보호하세요. (...) 그렇다면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죠!"
"국경에 멋진 딜이 있어요. 저희의 VIP전송으로 진정한 속도를 경험하세요. 옵션을 고르시면 가격을 맞춰 드립니다. 늦지 않았어요. 더 나은 미래를 시작하세요."
√안전조치
√상황파악
√위기대응
√시스템 건강인식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백업 프로세스
√이주 후 3년간 케어보장
"신속하고 안전한"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는 이주 설계 프로그램.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왜 그곳에 가려 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이주민. 그에게 초대된 VIP는 '스스로를 보호하라'는 경고장을 날린다.
파열·철거·건설되는 도시
이문주의 개인전 <모래산 건설>은 도시 폐허의 동일한 모습을 담았다. 도시는 부흥전략으로 인해 철거 되고, 거주자들은 밀리고 밀리는 경험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러한 현실, 전 세계의 도시들에는 사람이 있다는 진실을 작가는 규명하고자 했다. 작가의 정신은 우리가 만드는 도시가 외면한 존재들에 대하여 묻는다. 그게 누구냐고. 그 누구를 위한 도시 부흥인가를.
우리는 작품에서 해체되고 파괴된 새로운 '건설 도시'를 위한 도시의 민낯을 만나게 된다.
정면으로 만날 수 없는 인간 군상들. 사람들이 내몰리고 있는 도시의 한복판, 작품은 그 무리수를 고발하는 장면의 연속이다. 현장에서 만난 밀리고 밀린 사람들. 외곽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에게서 도시가 만들려는 풍경들의 패턴은 같다. 자본과 결탁한 신자유주의 행복의 질서, 그 동질성의 맥락을 들추어낸다. 작품에서 화면은 사각으로 도려내 지거나 뭉개져 있다. 높은, 혹은 무너진 담벼락에는 여지없이 허물어져 가는 기둥이 있고 문지방이 있다. 자본주의의 구축이 의미하듯, 작품은 여러 도시를 무너뜨리고 다시 새로운 일의 반복이 일어남을 여실히 묻는다. 낙동강 주변, 베를린 크루즈 관광의 모습, 정부의 도시개발 청사진들에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자본만 보이는 현상을 고발한다. 이러한 동질성의 패턴은 작가의 상상이 아니라는 점이 더 놀랍다. 작가는 연구했고 현장을 탐색했다. 어떤 가난한 사람들은 파푸아뉴기니아에 갇히기도 했다는 걸 보면, 신자유주의는 또 다른 은폐와 권력이 작동되는 토대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국가정책이 가난한 사람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도시의 경쟁은 탈락자를 소외시키고 결국은 제거해 버린다. 자본주의 재생산의 토대가 튼튼한 구성을 갖추게 됨을 역설한다. 모든 것을 삼키게끔 하는 그 패턴을 우리가 수용하고 당연한 듯이 인식하는 그 문제. 그 문제에 답이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人形
정윤석의 <눈썹>은 백인 여성의 마네킹 제조과정을 담았다. 매끄러운 몸매, 흰 피부, 볼륨감 있는 인체다. 모든 인형들은 발가벗겨진 채로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모든 인형들은 관람자 앞에서 인형이 아니다.
'말하자면' 사람이다. 섬뜩했다. 그건 인형인데... 인형인데... 자꾸 '나'로 보였다.
그 마네킹을 제조하는 그 공장 노동자들의 작업에서 나는 인형을 본 것이 아니었다. 나는 끔찍한 사람을 보았다. 둥근 가슴 속에서 빼낸 커다란 둥근 공이 마치 내 앞에 어떤 여인을 그리 다루는 듯 했다. 절묘한 작가정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다. 인형이되 인형이 아닌 것. 그 앞에서 사람들은 떠날 줄 몰랐다. 마네킹이 분명했지만 그것은 마네킹이 아닌 것이 되었다. 사로잡힌 시선은 마네킹의 몸속에서 무엇이 나오고 무엇이 넣어지는지를 목격했다. 나는 순간 질겁했고, 순간 찌푸리게 되었다. 그것이 인형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작은 한숨을 쉬기도 했고, 움찔 놀라기도 했다. 마치 '내 몸'을 누가 그러는 듯이. 왜 그런 강렬한 느낌이 들었을까.
중국의 노동자들은 '웃어야 한다'고 복창했다. 아침 이른 시간, 작업 시작 전에 하는 일종의 의례행위였다.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는 전시를 보기 방금 전 지나친 건너편 식당의 글귀와 꼭 같았다. 그곳에서도 식당 종업원들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액자 흰 바탕에 검은 한석봉체로 살아 명령한다.
"사훈.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직무에는 '웃는 것'도 포함됐다. 웃지 않으면 상품이 팔리지 않는다는 전제. 자본은 웃음 속에서 사고 팔린다. 웃음은 그런 진리를 증명해 줄 것이다.
전시를 보는 내내 그것은 인형이 아니었다. 여성이었고 그것은 살아있는 몸처럼 느껴졌다. 인형이라고 안도감을 가지고 보고 있었지만, 그 인형이라는 물질은 사람으로 중첩되면서 자꾸 감정이 빨려들었다. 그 희한한 감정을 작가는 의도했을 것이리라.
인형과 마네킹은 물질이었지만, 말하자면 사람이었다. 인형의 자궁에 어떤 물질을 찔러 넣는 과정은 성폭력으로 느껴질 만큼 생생한 경험을 주었다. 마네킹이 <눈썹>을 깜박이는 순간마다 새로운 장면이 나를 강타했다. 과거 고문이 이랬을까. 성폭력이 이랬을까. 인형이라는 설정, 그 기묘한 제시가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울만큼 충격을 준다. 여성이어서일까. 남성도 이럴까. 인형인데도 사람이야기를 하는 이 전시는 문제를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우리의 현실을 보라.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것은 어떤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떤 세계를 원하는가. 무엇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는가. 그런 질문을 던지게 했다.
'어린아이들이 있다면 이 전시는 삼가라'는 전시 큐레이터의 문구가 있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경고였다. 전시는 진실을 은유로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눈썹>을 깜박이는 순간순간에 목격한 것들을 우리가 방조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적어도 방조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용기를 내기 어렵다. 회피하거나 묵인하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좋을 수도 있다.
'말해도 괜찮은' 공동체를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묵직한 책임. 그것은 작은 삶의 무게가 되기도 하겠지만, 더 멀리 혹은 깊이 보면 그 책임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다. 이전에 그렇게 되었던 이상한 관습들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게 했더라도, 우리는 지금 그 관습들에 동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증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해야 한다. 그게 시대의 요구다.
기획자 조주현의 시각, 그리고...
어느 사회나 어느 시대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그 문제를 누가 어떻게 인지하느냐가 중요하다. 특히 근대 이후 국민주권시대에서는 훨씬 쉬워 보인다. 이를 '인식의 전환'이라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우선 손익을 따진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 군상은 어떠한가를 그린 이 전시는 국경을 그어 놓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경계 짓고, 공공재인 토지를 제 것으로 착각하는 '그 문제'를 문제 삼았다. 이 전시는 기획자 조주현이 '예술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기여해야 할까'를 고민한 결과다.
예술은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예술이 찾은 새로운 질서, 신자유주의'는 작가의 연구와 깊은 문제의식을 통해 작품이 되었다. 작가의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시대의 무엇인가'를 생각하게끔 한다. 세 작품은 인공지능 시대의 정보가 어떻게 권력이 되는지, 자본주의 도시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내모는지, 인간의 몸이 어떻게 사람들의 욕망의 수단이 되는지를 짚어내고자 한 것이다. 작가의 시선을 알아차린 기획자 조주현의 감각은 어디서 연유했을까. 작가들의 작품을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이고, 이들의 작업에서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발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원래 그렇다고 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인간의 속성. 이익은 그래서 서로에게 환상이 되고 로망이 된다. 그런데 그 이익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큰 희생을 치르거나 수많은 싸움에서 실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래서 싸움은 필수불가결한 것이 된다. 싸움은 그러니까 새로운 방식의 논의인 것이다. 무엇이 우리 이익을 지속 가능케 할 것인가.
그 속성은 게임에서 누가 이기냐의 문제다. 이기는 것은 지배하는 것과 밀접하다. 역사적으로 영토전쟁은 이긴 자가 지배하는 것이었다. 진 자는 지배당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했고, 그들의 몸종이 되어 살아야했으며, 심지어는 그와 나는 한 몸이니 그가 죽으면 나도 세상을 하직해야 했다. 이긴 자에게는 진 자의 전부를 빼앗는 권력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이기는 것은 인생 전체의 문제다.
이 문제를 조주현 기획자는 어떻게 다루었을까. 전시는 3개의 방에서 3명의 작가를 3가지의 주제로 소개한다. 1층에서는 김아영의 개인전이 열렸다. <다공성 계곡>이다. 2층 전시는 <모래산 건설>로 도시의 건설과 파괴를 다룬다. 3층 전시 <눈썹>은 백인 여성의 몸을 만드는 마네킹 제조공장에서 있었던 일을 다룬다. 조주현 기획자의 문제의식은 무엇일까. 그는 왜 이런 전시를 기획했을까. 그가 노리는 우리 사회의 문제는 무엇이고 그는 작가들을 어떻게 발굴했을까. 이 전시가 노리는 효과는 무엇일까. 관람자들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을까. 3명의 한국작가들이 보는 세상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걸까.
현실적으로 미술관이 작품에서 다루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술관은 현실 정치에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기관이 아니다. 미술관은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수는 있다. 작가의 상상력에 기대어 물을 수 있다. 따라서 미술관의 사회적 책임은 미술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일 수 있다. 미술의 공공성은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사람들을 교육하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일 게다. 미술작품의 공공성과 미술의 공공성, 미술관의 공공성은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미술작품의 공공성은 작품 속 작가의 발언이 될 것이다. 미술의 공공성은 미술을 하는 사람들의 공공마인드일 수 있다. 미술이 어떻게 생산되고 소비되며 우리 사회의 어떤 문제를 다루는가의 문제다.
마지막으로 미술관의 공공성은 ‘기관의 정체성’을 요구한다. 그 기관이 무엇을 하는 곳인가, 그 기관에서는 누가, 어떤 사람들이 의사결정 하는가, 그 기관에서 이루어지는 공공의 의미는 ‘누구나, 어디서나, 언제나, 수준에 맞게’의 의미다. 미술관에서 관람자들의 반응은 깊이 관찰되지 않는다. 미술관의 관람자들은 미술관의 소비자이지만, 주체자로 인정되는 것은 매우 드물어 보인다. 그들은 작품을 읽고 내면을 성장시킨다. 성장 여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가 어떤 과정에서 어떻게 학습했고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는 것이 될 수 있다. 미술관이 던지는 질문은 보다 본질적이다. 그런 질문에 당혹스러울 수 있다. 우리는 문제를 외면하려 한다. 그러나 전시는 그 문제 앞에 우리를 잡아 놓았다. 마치 덫에 걸린 그 누군가의 먹이처럼. 작품은 우리를 그렇게 유인했고, 그 작품은 덫에 걸린 나를 전시 후에도 두들겼다. '그게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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