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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 '정치 참여' 욕구는 커질 것이다

[최성흠의 문화로 읽는 중국 정치] 시(習) 황제의 책사 왕후닝

지난 2월 26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주석과 부주석은 임기가 두 회기를 초과할 수 없다"고 규정한 헌법 79조 조항을 삭제할 것을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중국 내의 일부 언론과 학계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는 했지만, 공산당이 결정한 사항이니만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부결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했었다. 예상대로 3월 11일 찬성 2958표, 반대 2표, 기권 3표(무효 1)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다. 덤으로 국가감찰위원회라는 강력한 사정기구가 신설될 수 있는 근거도 마련했다.

중국의 최고 권력자는 국가주석,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 세 개의 직위를 갖는다. 이 중에 국가주석은 실질적 권한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지만 헌법을 개정한 것을 보면 장기집권을 향한 시진핑의 의지를 확신할 수 있게 됐다. 총서기와 군사위 주석은 연임 제한이 없다.

중국에서 권력자가 장기집권을 하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마오쩌둥이 그랬고, 그다음 덩샤오핑도 비슷했다. 국가의 체제가 공산당 일당독재를 기본으로 삼고 있는 나라에서 당의 유력자가 장기집권 하는 것이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다. 어쩌면 덩샤오핑이 설계했던 집단지도체제가 사회주의 중국에서 오히려 낯설고 어색한 것일지 모르겠다. 적어도 시진핑과 그를 따르는 집권세력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 지난 11일 중국 전인대에서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 개헌안이 통과됐다. ⓒAP=연합

현재의 중국은 마오쩌둥이 집권했던 1950년대의 중국과 다르다. 경제 체제가 다르고, 그 안에서 부자 되기를 갈구하는 중국인도 그때의 중국인이 아니다. 베이징, 상하이뿐만 아니라 웬만한 대도시의 빌딩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고, 도시를 가르는 도로들은 저기를 어떻게 찾아가나 싶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중국은 20세기 후반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가히 경탄할만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게 마련이다.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 전통적인 사회조직을 붕괴시킨다. 예를 들어 가족관계나 계급 질서가 무너지고 개인주의가 전파된다. 미래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아지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기회를 찾는다. 그중에 성공한 졸부가 등장하여 기존의 질서에 흡수되기보다는 자신의 부에 걸맞은 권력을 원하게 된다. 그들은 새로운 질서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권력을 잡거나 권력의 후원자가 되어 부패의 근원지가 된다.

농촌의 인구는 도시로 이동하고, 도시거주자의 빈부격차는 커진다. 문맹률이 낮아지고, 교육과 대중매체가 발전하여 현실 수준 이상으로 기대수준이 높아진다. 절대적 수입은 증가하지만 상대적으로 삶의 질이 낮아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대중들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불만이 커져서 사회적 연대를 맺거나 혹은 극단주의 동맹을 이루기도 한다. 각종 사회단체와 조직들의 역량이 강화되어 정부가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를 하기 시작하고, 저축과 소비의 분배를 놓고 종교적, 인종적, 지역적 갈등이 시작된다.

다소 암울해 보이는 위 내용은 미국의 정치학자 사뮤엘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이 1968년에 발표한 '사회변천 중의 정치 질서'(Political Order in Changing Societies)의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헌팅턴은 여러 나라의 근대화 과정을 조사하면서 경제성장과 정치적 안정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기본적으로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면 정치는 불안정해진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빈곤은 정치 불안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니다. 빈곤한 사람들은 그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꿀 뿐이다. 현재의 질서가 유지되어야 그나마 내일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보수적이다. 북한에서 정치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변화는 경제가 성장할 때 찾아온다.

헌팅턴은 그의 분석을 토대로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공식을 제시했다.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변하기 시작하면 개혁가와 혁명가가 이끄는 사회변혁운동이 시작된다. 그들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대중들의 열망을 자극하여 결과적으로 사회적 동원을 유발한다. (1)번 등식에서 보듯이 경제발전의 정도보다 사회적 동원이 커지면 사회적 좌절이 증가한다. 반대로 경제발전 정도가 사회적 동원의 정도보다 크면 사회적 좌절은 감소한다.

경제가 발전하면 계층 간, 지역 간 유동성의 기회가 증가한다. 경제발전 초기에는 농촌지역의 인구가 도시로 이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사회적 좌절보다 유동성의 기회가 더 크다. (2)번 등식에서 보듯이 유동성의 기회가 증가하면 정치적 참여 욕구는 저하한다. 그러나 더 이상 지역 간 유동성의 기회가 없고, 계층 간 유동성의 기회마저 없어지면 정치참여의 욕구는 커진다. 특히 농촌에서 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유입됨으로써 도시의 빈부격차는 더욱 커지고, 정치참여 욕구도 증가한다.

(3)번 등식은 정치참여의 욕구가 증대했을 때 적절하게 정치적 제도화를 이루면 정치적 불안정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대로 제도화를 이루지 못하면 정치는 불안해지고 경제성장은 멈추게 되며 이는 다시 (1)번 등식으로 돌아가 사회적 좌절이 증대하도록 한다. 만약 이런 식으로 순환되면 결국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헌팅턴이 원래 의미했던 제도화는 정치적 참여를 제도화하는 것이지만 모든 나라에 동일하게 그런 제도화를 권유하고 있지는 않다. 경제 수준이 이미 높은 나라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대중의 정치 참여를 제도화함으로써 안정을 이룰 수 있지만 경제 발전 수준이 낮은 후진국에서는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가 경제 질서를 유지해야만 경제 발전을 지속할 수 있다고 암시한다. 그렇게 해서 일정 정도 이상의 경제수준이 되면 중산층이 늘어나고 그들이 민주화를 요구하게 될 때 민주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마 이렇게 민주화를 달성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지 않나 싶다. 산업화 시대에 경제발전 속도가 빨라서 사회적 좌절이 상대적으로 감소했고, 지역 간, 계층 간 유동성의 기회도 많아서 정치참여의 욕구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IMF를 기점으로 경제발전은 둔화됐고, 사회적 좌절이 늘었으며 유동성의 기회도 줄었다. 먼저 올라간 사람들이 사다리를 걷어차서 계층 상승의 기회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치참여 욕구는 증대됐고, 민주화의 요구가 거세졌다. 더 이상 권위주의 정부의 강권적 통치로는 정치적 불안을 해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소득과 분배의 불균형을 완화시켜야 할 단계에 와 있다.

중국은 여전히 경제가 성장하고 있으며 유동성의 기회도 아직은 여유가 있다. 당연히 대중의 정치참여 욕구도 거세지 않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멈춘다면 도미노가 무너지듯이 연쇄적으로 그리고 아주 빠르게 정치 불안을 야기할 것이다. 중국 당국은 아마 그것이 가장 두려울 것이다. 공산당의 집권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헌팅턴의 글을 길게 설명한 이유는 현재 중국의 정치국 상무위원인 왕후닝(王滬寧)이 헌팅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88년 3월 왕후닝은 상하이에 있는 푸단(復旦)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푸단학보>에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제목이 '현대화과정 중의 정치영도방식 분석'(現代化進程中政治領導方式分析)인 이 논문은 헌팅턴의 '사회변천 중의 정치질서' 중국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보수적인 학자들은 헌팅턴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었다. 급속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자가 중앙집권통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지이다.

왕후닝은 처음에 자오즈양(趙紫陽)을 지지하는 학자였을 뿐이지만, 장쩌민이 집권했을 때 중앙정책연구실의 정치조 조장으로 들어가면서 현실정치에 발을 들였다. 이 당시 왕후닝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98년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였다. 저녁 만찬장에서 장쩌민 주석이 왕후닝의 학술적 능력을 높게 평가하며 클린턴에게 자랑을 했다. 그만큼 장쩌민은 왕후닝을 총애했다. 그러자 클린턴은 미국에도 사뮤엘 헌팅턴이라는 훌륭한 학자가 있는데 왕후닝의 글에서 그를 많이 인용했더라고 대응했다. 미국은 이미 왕후닝의 정치적 노선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지도자에 의해 발탁된 인물은 그 지도자의 퇴진과 함께 물러나기 마련인데 왕후닝은 후진타오가 집권했을 때 오히려 중앙서기처 서기로 승진했고, 시진핑이 집권하면서 중앙정치국 위원이 됐다가 지난해에 드디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까지 오르게 됐다. 현재 그가 맞고 있는 직책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중앙전면심화개혁 영도소조 판공실 주임, 중앙문명위원회 주임 등이다. 왕후닝은 명실상부한 중국의 통치이념을 담당하는 핵심 지도자가 된 것이다.

왕후닝은 자주 인민에 대한 통치는 헌법에 기초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이번에 헌법이 바뀌었다. 합법적인 장기 집권을 위한 첫발이다. 왕후닝이 천안문 사태 이후에 지속적으로 승진해온 과정을 보면 중국 당국은 애초부터 서구식 민주화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장쩌민의 삼개대표론이 만들어질 때 거기에 왕후닝이 있었고,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이 만들어질 때도 왕후닝이 있었다. 시진핑의 신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는 그렇게 탄생했다.

왕후닝이 학자로 활동할 당시 상하이 일원의 학자들을 신보수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들의 보수는 서구의 학문적 개념의 보수가 아니다. 단지 통치에 있어서 익숙한 것을 지키자는 뜻이다. 그것은 마오쩌둥 사상일 수도 있고, 유교 사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강력한 지도자가 권위적인 정부를 통해 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소프트 파워' 개념을 중국에 처음 소개하며 중국 문명의 정수인 유교 문화를 고양시키자고 한 사람도 왕후닝이었다.

언젠가는 중국의 경제성장이 둔화될 것이다. 유동성의 기회도 줄 것이고, 정치참여의 욕구는 커질 것이다. 그때 과연 중국공산당은 대중의 정치적 참여 욕구를 무마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정치 불안은 가중될 것이고, 안정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더욱 강력한 철권통치가 시행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오래가도 철권통치자의 사망과 함께 사양길로 접어들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부분 그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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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중국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대륙연구소, 북방권교류협의회, 한림대학교 학술원 등에서 연구원을 역임했다. 중국의 관료 체제에 관한 연구로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중국의 정치 문화에 대한 연구로 건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 권으로 읽는 유교> 등의 번역서와 <중국 인민의 근대성 비판> 등 다수의 연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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