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초기 여러 차례 핵전쟁의 위험을 겪었던 미국과 소련은 1971년 9월 우발적인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그 취지는 이랬다.
"가장 정교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인 결함이나 인간의 실수, 그리고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나 비인가자의 행동에 의해 핵 재앙이나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선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 이후에도 우발적인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적은 여러 차례 있었다. 심지어 1989년 미국과 소련이 냉전 종식을 선언한 이후에도 황당한 사고들이 이어졌다. 미국과 러시아가 상대방의 미사일 공격이 탐지되면 15분 이내에 핵 보복이 가능한 '경보 즉시 발사(launch on warning)' 체제를 유지해온 탓이 크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5년 1월 25일 러시아에서 발생했다. 러시아가 노르웨이의 과학 위성 발사를 미국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로 오인한 것이다. 불과 5분이면 모스크바에 미사일이 떨어질 것이라고 오판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핵공격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핵 가방(nuclear briefcase)'을 가동했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몇 분후에 러시아의 조기경보 레이더가 미사일의 탄착지가 러시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고 미국의 추가적인 미사일 발사 징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핵 보복 태세를 해제했다.
그런데 사건의 발단 자체가 황당했다. 노르웨이는 러시아를 비롯한 35개국에 로켓 발사를 통보했으나, 이 정보가 레이더를 운용하는 러시아 장교들한테까지 전달되지 못해 발생한 것이다. 의사소통의 실패가 불러온 '아찔한 소동'이었다.
황당한 핵 사고는 세계 일류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에서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미국 과학자연맹(FAS)은 따르면, 미 공군에서 발생한 핵무기 취급 부주의 사례는 2001년부터 2007년 9월 27일까지 모두 237건이나 있었다고 한다.
2007년 8월 말에는 장거리 폭격기인 B-52가 6기의 핵미사일을 장착한 줄도 모른 채 36시간 동안 북부 노스다코타주에서 남부 루이지애나주까지 미 본토를 종단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평시 전폭기 비행 시에는 핵미사일을 탑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이를 확인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36시간이 지나서야 B-52 정비병이 6기의 핵미사일이 탑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선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 이 사건을 두고 1996년부터 98년까지 전략사령관을 지낸 하비거(Eugene Habiger)는 "내 평생 이렇게 역겨운 일은 처음 봤다"고 한탄했다.
또한 2008년 3월에는 미 공군이 대만에 헬리콥터 배터리 대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폭 장치 4개를 잘못 보낸 것이 2년 만에 드러나 국제사회를 또 다시 놀라게 했다. 대만에 실수로 인도된 기폭 장치는 핵분열 물질은 아니지만 핵분열 연쇄반응을 일으켜 핵폭발을 가능케 하는 핵무기의 핵심 부품이다.
2010년 10월 23일에는 50기의 미뉴트맨-3 ICBM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은 사건도 벌어졌다. "발사 시설 다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와이오밍주 워렌 공군기지의 관할 하에 있는 50기의 핵탄두 장착 ICBM이 1시간 동안 통신 분량으로 소재 파악이 안 된 것이었다.
사건의 원인은 회로카드 하나가 컴퓨터에 잘못 설치되었던 데에서 비롯됐다. 이 공군기지 대변인은 "이처럼 큰 문제가 벌어진 적은 없었다"며 "우리는 1시간 동안 50기의 ICBM에 대한 지휘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었다"고 말했다.
북미간에 우발적인 핵전쟁?
다행히 지금까지는 우발적인 핵전쟁은 없었다. 하지만 과거의 사례들과 현재의 핵 통제 체제를 두루 고려하면, 그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특히 실수를 용납하기에는 핵전쟁이 가져올 피해 규모는 너무나도 크다.
이에 따라 일촉즉발(hair-trigger) 상태에 있는 핵미사일 발사 태세를 해제하는 것이 우발적인 핵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오인과 오작동으로 인한 우발적 핵전쟁의 위험은 '경보 즉시 발사' 태세와 맞물릴 경우 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탄도미사일은 일단 발사되면, 전략 폭격기처럼 되돌아올 수도 없고 목표물을 변경할 수도 없다.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는 여전히 '경보 즉시 발사'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발적인 핵전쟁의 당사국들이 북한과 미국이 될 수도 있다는 데에 있다. 트럼프가 북한을 상대로 "화염과 분노", "완전 파괴" 등을 언급한 것은 유사시 핵 공격도 불사할 수 있다는 점을 내비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트럼프는 2017년 11월 8일 한미정상회담 공동언론발표문을 통해 "점증하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핵과 재래식 전력 등 미국의 모든 범주의 군사력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음을 강조했다."
이에 질세라 김정은도 올해 신년사에서 "적들의 핵전쟁 책동에 대처한 즉시적인 핵반격 작전 태세를 항상 유지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밝혀 '경보 즉시 발사' 태세도 구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양측 모두 즉각적인 핵 공격 태세를 갖춤으로써 상대를 억제하겠다는 취지이지만, 이 과정에서 안보 딜레마를 격화시켜 우발적인 핵전쟁의 위험을 높일 수도 있다. 특히 미국에 비해 핵 전력이 크게 떨어지고 영토도 좁은 북한은 "잃기 전에 사용한다"는 핵 교리를 신봉할 공산이 크다.
이와 관련해 2018년 1월 14일 자 <뉴욕타임스>는 최근 있었던 하와이 소동과 1983년 미소 간의 핵전쟁 위험을 비교 분석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불완전한 정보, 호전적인 국방 태세, 몇 분에 불과한 반응 시간이 미국과 소련 모두 원하지 않았던 핵전쟁으로 몰고 갈 뻔 했다"며, 하와이 사건은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이 (북미 간에)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1983년 핵전쟁 위기 당사자였던 레이건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KAL기 사건은 세계가 얼마나 핵 재앙에 다가설 수 있는지를 증명해주었다. 그리고 핵 군비통제의 필요성을 일깨워줬다."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그 직후 소련의 지도자가 된 고르바초프도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반드시 정치적 결정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기술적 실패로도 일어날 수 있다."
두 지도자는 결국 역사적인 핵군축 협상에 돌입했고 이는 총성 한방 울리지 않고 냉전을 종식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김정은과 트럼프는 아직까지는 다르다. <뉴욕타임스>의 평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여전히 1983년에 머물러 있다. 도발적인 언행과 핵 공격을 할 수 있는 버튼이 있다고 위협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과 우리의 운명을 계속 도박으로 삼고선 말이다."
결국 38분간의 하와이 소동을 거치면서 어떤 교훈을 추출하느냐가 중요해졌다. 미국 내에선 크게 두 가지 주장이 맞서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에 대비해 미사일 방어체제(MD)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이고, 북미간의 우발적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이 확인된 만큼 양국이 군사 핫라인을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 또 하나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면, MD 강화는 위험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 시대에 그나마 핵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국과 소련이 MD를 자제키로 한 탄도미사일방어(ABM) 조약에 있었다. MD는 위기관리와 군비경쟁 억제 모두를 어렵게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과 소련은 극심한 핵 군비 경쟁의 와중에서도 대화 채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북미간의 대결은 거꾸로 가고 있다. 세계 최강의 공격력을 갖춘 미국은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다며 MD를 강화하고 있고, 이에 맞서 북한은 "핵무력 건설"에 박차를 가해왔다. 설상가상으로 우발적인 충돌을 막을 수 있는 대화 채널도 부재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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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wooksik@gmail.com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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