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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공포의 38분'과 우발적 핵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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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공포의 38분'과 우발적 핵전쟁

[정욱식 칼럼] 장비 오작동, 세계를 위기에 빠뜨릴수도 있다 (상)

하와이 시각으로 2018년 1월 13일 오전 8시 7분, 하와이 주민과 관광객들의 휴대폰에 긴급 문자가 전송됐다. "탄도미사일이 하와이를 위협하고 있다. 즉각 대피처를 찾아라. 이건 훈련이 아니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1일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에 대비해 30여 년 만에 대피 훈련을 받았던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훈련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받았고, 그래서 하와이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북한의 핵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20분.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던 사람들은 차를 버리고 피신했다. 호텔에 있던 사람들은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하와이 주의회 매트 로프레스티 의원은 미국 방송 CNN과 인터뷰에서 "아침에 경보를 받고 공포에 떨면서 아이들과 함께 욕조 속으로 대피해 기도했다"고 말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소니 오픈에 참가하고 있던 미국 골퍼 존 피더슨은 이런 트위터를 날렸다. "욕조의 매트리스 밑에 아내와 아기가 있습니다. 제발 미사일 위협이 사실이 아니길 빕니다."

미사일 공격 경보 발령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 골프장에 있었다. 발칵 뒤집힌 백악관은 트럼프를 수행하고 있던 릭키 와델(Ricky Waddell) 안보 부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고 와델은 트럼프에게 보고했다. 트럼프는 마라라고 별장으로 황급히 돌아오는 길에 또 보고를 받았다. "잘못된 경보입니다."

그는 열흘 전에 자신의 책상 위에 "핵 단추"가 놓여 있고 "작동도 한다"고 자랑했었지만, 정작 미국이 핵 공격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를 숙지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최초 경보 발령 13분 뒤인 오전 8시 20분에 하와이 주 정부는 "하와이에 대한 미사일 위협은 없다"고 급히 트위터를 날렸다. 하와이 소재 태평양사령부도 "하와이에 대한 탄도미사일 위협은 감지되지 않았다"며, "앞선 메시지는 실수로 보낸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정정 발표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고, 또한 정정 내용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8시 45분에 휴대전화 메시지로 "잘못된 경보였다"는 받고서야 하와이 사람들은 38분간의 악몽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데이비드 이게 하와이 주지사는 "미사일 경보가 잘못 발령된 것은 주 정부 비상관리국 직원이 작업 교대 중 경보 시스템을 점검하다가 빚은 실수"라며 "버튼을 잘못 누른 탓"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CNN을 통해 38분 동안의 악몽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절대로 잊지 못할 날이 될 것입니다. 하와이 주민들에겐 최악의 악몽이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다고 여겨진 날입니다."

미국 국방부 장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는 하와이 소동을 접하고는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우발적인 핵전쟁은 가상적인 상황만은 아니다. 과거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있었고, 사람은 또다시 실수할 수 있다. 수백만 명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만큼, 우리는 실수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해야 한다."

▲ 경보기 오작동 이후 아무런 위협이 없다고 알리는 하와이 내 알림판 ⓒAP=연합뉴스

과거의 사건들을 보니

페리의 지적처럼, 과거에도 하와이 소동과 같은 흡사한 사건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핵시대평화재단(Nuclear Age Peace Foundation)과 참여 과학자 모임(Union of Concerned Scientists)이 정리한 것을 바탕으로 주요 사고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수에즈 운하 위기(1956년 11월 5일) :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공격하면서 발생한 수에즈 운하 위기 당시 미국의 북미방공사령부(NORAD)는 정체불명의 항공기가 터키 상공을 비행하고, 여러 대의 소련 전투기가 시리아 상공에 진입했으며, 영국의 전폭기가 시리아 상공에서 격추되고, 소련의 비행편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이동하는 것을 포착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나토와 소련이 핵전쟁을 전개할 가능성을 크게 우려했다.

그러나 이들 정보는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정체불명의 항공기는 백조들이었고, 여러 대의 소련 전투기는 시리아 대통령이 소련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항공기들이었으며, 영국 전폭기의 추락 원인은 기계 결함이었고, 다르다넬스 해협에 출현한 소련 전투기는 통상적인 군사훈련에 따른 것이었다.

월출(月出) 오인 사건(1960년 10월 5일) : 그린란드 툴레에 설치된 미국의 조기 경보 위성은 소련이 미국을 향해 수십 발의 미사일을 발사한 것을 탐지했다고 콜로라도에 있는 북미방공사령부(NORAD)에 전달했다. 그러자 북미방공사령부는 최고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가 미국 뉴욕을 방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 지도자가 미국에 와 있는데 소련이 미국을 향해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미국이 추후에 조사해보니 그린란드 레이더가 노르웨이 수평선으로 떠오르던 달을 미국에 대한 소련의 핵미사일 공격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덜루스 침입자 사건(1962년 10월 25일) : 미소 간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 직후, 미국 미네소타 주 북동부 소재 덜루스 센터의 한 경비병이 침입자를 발견했다. 그는 그 침입자를 향해 사격을 가했고, 비상경보를 발동했다.

그런데 위스콘신에 있는 볼크 필드 기지에서 이 경보를 출격 신호로 오인해 핵무기를 탑재한 상태에서 F-106A 폭격기를 출격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덜루스 센터와 교신을 통해 오작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덜루스 센터의 침입자는 사람이 아니라 곰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정전사태와 폭발 경보(1965년 11월) : 미국의 주요 도시 및 군사 시설 인근에는 핵폭발이 발생한 지역을 즉각 알려주는 경보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평상시에는 녹색등으로 나타나고, 정전이나 기계 고장 등으로 경보등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노란색을 띠어야 한다.

그런데 1965년 11월 미국 북동부에서 발생한 정전사태 당시 두 지역의 경보 시설에서 핵폭발을 알리는 빨간등이 켜졌다. 이는 마치 정전사태가 핵폭발에 의해 발생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고, 비상계획위원회는 완전 경계상태에 돌입했다. 그러나 곧 경보 시설의 오작동으로 판명났다.

중동위기와 경보 오작동(1973년 10월 24~25일) : 유엔의 개입 하에 아랍-이스라엘 전쟁 휴전 논의가 막바지에 달하고 있었던 1973년 10월 24일, 미국 정보 기관은 소련이 이집트를 돕기 위해 중동사태에 개입하려고 한다는 보고를 백악관에 올렸다.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 수행이 불가능했던 리처드 닉슨 대신 다른 고위 관료들이 데프콘-3를 발령했다. 이에 따라 미소 양측의 군사적 준비태세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다음날인 25일에 미시간 소재 미공군 기지를 수리하고 있던 정비공이 실수로 전체 경보시스템을 발동시켰다. 전투비행사들은 즉시 핵무기를 탑재한 B-52 전폭기에 탑승했고 시동을 걸었다. 다행히 이 오류를 발견한 장교가 조종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추가적인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컴퓨터 연습용 테이프(1979년 11월 9일) : 미소간에 유럽에 중거리 미사일 배치 문제로 긴장이 고조되었던 79년 11월 9일, 미국의 북미방공사령부(NORAD)는 소련이 대규모로 미국에 핵미사일을 퍼붓고 있다는 정보를 전략공군사령부를 비롯한 각급 사령부에 전달했다.

미국은 즉각 보복 태세로 들어가, ICBM 발사 태세 및 전폭기 출격 태세에 돌입했다. 유사시 공중에서 전쟁을 지휘할 '국가 비상 공중 사령부'는 출격시켰지만, 1963년에 설치된 소련과의 핫라인은 가동하지 않았다. 당시 카터 대통령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군사령관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6분 후에 북미방공사령부의 조기 경보 레이더에는 한발의 소련 미사일도 포착되지 않았고, 인공위성 역시 어떠한 미사일 발사도 탐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긴급 상황은 종료되었다. 미국 의회는 이 사건의 조사를 결의했고 조사 결과는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한 기술자가 대규모 핵전쟁에 대비해 만든 '연습용' 테이프를 실수로 '작전용' 컴퓨터에 삽입한 것이다.

컴퓨터 칩의 오작동(1980년 6월 3일) : 통제센터에 있는 컴퓨터 화면은 미국으로 향하는 미사일을 '0000 ICBM 탐지, 0000 SLBM 탐지'로 나타낸다. 숫자 0은 탐지된 미사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1980년 6월 3일, '0' 숫자 사이로 '2'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십 발에서 수백 발의 미사일이 미국을 향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미국은 보복 준비에 착수했고, 전폭기 조종사들은 출격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이 역시 컴퓨터 칩의 오작동으로 판명났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또 하나의 순간

이처럼 미국과 소련이 첨예한 핵군비 경쟁을 벌었던 냉전 시대에 기계의 오작동이나 인간의 오인으로 인한 우발적인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아찔한 순간들은 여러 차례 있었다.

미소 관계가 신냉전의 정점을 향해 치닫던 1983년 9월,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순간"으로 일컬어지는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최악의 핵전쟁 위험이 엄습했다. 당시 도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소련의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면서 핵 태세를 크게 강화했고, 소련은 이를 미국의 핵전쟁 준비 신호로 해석해 맞불을 놓고 있었다.

이 와중에 9월 1일 뉴욕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보잉 747 여객기가 사할린 부근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추락해 269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소련의 방공 부대가 한국 여객기를 미국의 정찰기로 오인한 것에서 비롯됐다. 경고 사격을 수차례 했지만, 회신이 없자 격추한 것이다.

격추 직후에도 소련 당국은 피격체가 민항기인지 미국의 정찰기인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미국에 대한 불신이 워낙 컸던 탓이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소련 정부는 미국의 군사 침략에 대한 정당방위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소련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갖고 있던 미국 정부를 더욱 자극하고 말았다. 소련이 고의로 민항기를 격추시켜 놓고선 미국에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해석이 팽배해졌다. 레이건은 격한 어조로 소련을 비난했다. 정작 중앙정보국(CIA)은 레이건에게 "소련의 실수로 보인다"라고 보고했지만, 레이건은 이를 무시하면서 대소 강경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레이건의 태도는 소련 지도부의 대미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거짓말을 하는 쪽은 미국이라고 반박했다. 심지어 소련 내 일각에선 미국이 대규모의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소련의 항공기 공격을 유도한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음모론도 나왔다.

그런데 이러한 음모론을 뒷받침해주는 듯한 사건이 벌어졌다. 9월 26일 소련의 조기 경보 위성이 미국이 5기의 지상 발사 미사일을 소련을 향해 발사한 것으로 탐지한 것이다. 위성 정보를 접한 소련 장교에게 정보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시간은 불과 몇 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진짜 미사일 공격이라고 상부에 보고하면 소련도 즉각적인 핵 보복 태세로 진입할 터였다.

그런데 이 장교는 미국이 소련에 미사일 공격을 가할 경우 5개보다는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5기의 핵미사일로는 소련의 보복 능력을 무력화시킬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에 근거해 그는 상부에 "잘못된 정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다.

이로써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최악의 핵전쟁 위험이 지나갔다. 그런데 나중에 조사 결과가 충격적이었다. 태양빛이 구름에 반사된 것을 소련의 위성이 미국의 미사일 발사로 착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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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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