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독서행위가 이루어졌던 지난 1980년대에 견주어서 요즈음 돌아가는 책 시장의 형편을 보면, 참으로 깊은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격랑의 80년대를 통과하면서 특히 젊은 계층이 실천한 왕성한 독서량이 곧 한국사회 민주화의 원동력이 되었음은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바다. 금서가 많았던 그 시절에 단지 독서 때문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독서열을 누를 수는 없었다. 금지할수록 오히려 짜릿한 호기심이 발동되었으니, 금서가 자주 베스트셀러가 되곤 했다. 그래서 지금의 불황을 타개하려면, 다시 독재정권이 나타나 아예 책을 못 읽게 금지시켜야 한다는 자조적인 우스개 소리도 나온다.
90년대 초부터 바뀌기 시작한 대중의 관심은 15년쯤 지난 지금, 그 절반쯤이 활자 매체에서 영상 매체와 인터넷으로 이동해 있는 것 같다. 몇 달 전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지난 5년 사이에 신간 서적 수가 약 50%로 줄었고, 민주화의 원동력이 되었던 인문사회과학 서적은 90% 격감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팔리는 책이라는 것도 아동물, 실용서나 대중소설 같은 가벼운 읽을거리들이 주종을 이룬다. 인문사회과학 교양에 대한 관심의 쇠퇴와 함께 그것들과 관계된 대학의 학과들도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책 대신에 영상이 지배하는 경박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인데, 별 의미 없이 그저 조폭적 혹은 엽기적이거나 스펙터클하기만 한 영상물이 백만, 이백만을 동원하는 기현상이 계속적으로 연출되고 있다. 조폭영화에 나오는 대사가 유행어가 되고, 그걸 모르면 왕따 당할 것 같은 불안감에 너도 나도 극장을 찾는다. 전에는 문학, 특히 소설이 영화 생산을 위한 상상력의 원천이었는데, 지금의 젊은 소설가들의 작품 중에는 도리어 영화에서 상상력을 빌려오는 것들이 적지 않다. 특히 엽기나 판타지 방식이 그렇다. 안방 극장인 TV 드라마는 더욱 인기가 좋아서, 귀가 이후 우리의 시간을 남김없이 빼앗아간다.
책 시장에 베스트셀러들이 있기는 한데, 만화가 그 중 많고 소설이라고 해도 만화같은 가벼운 것들이 대종을 이룬다. 세칭 일류대 합격생들의 소감을 보면, 상당수가 힘든 입시 공부에 휴식용으로 만화를 즐겨 봤다고 한다. 만화뿐만 아니라, 무협지를 포함한 만화같이 가벼운 대중소설들도 많이 읽혔는데, 국내용 번안물인 어느 〈삼국지〉를 단지 입시공부 휴식용으로 읽은 어느 일류대 수석 합격자는 출판사의 꾀임에 넘어가 그 소설이 수능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고 발설함으로써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주는 데에 일조를 했다가 여러 해 뒤에 그것이 거짓말이었음을 실토한 적도 있다.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대중의 관심이 책이나 영상물이나 이러한 경박한 베스트셀러에 국한되고 있어, 진지한 담론들이나 예술적 노력들이 고사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질 낮은 베스트셀러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품질이 별로 좋지 못한 똑같은 책, 똑같은 영상을 보고 있고, 따라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뜻할 것이다. 집단 사고의 획일화, 의식의 하향 평준화 현상이다. 이 경우에 사고를 결정하는 주체는 작가나 감독 등 소수의 개인들이고 대중은 단지 그 사고의 무분별한 반사체에 불과하다. 이렇게 조작 가능한 대상이 된 소비 대중은 정치적 선동이나 대기업이 유포하는 주술에도 쉽게 걸려들게 마련이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의 아동들은 그래도 책을 읽는 편이다. 시중에는 양질의 아동물이 풍부하고, 젊은 부모들은 자기 아이의 책 읽기에 관심이 크다. 활자를 익히게 되는 대여섯 살부터 엄마와 함께 책을 읽기 시작한 아이는 독서에 맛을 느끼면서 차츰 독서 습관을 키워 나간다. 생애 초기에 형성된 습관은 끝까지 가기 쉽거니와, 그래서 아동의 독서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부모와 교사의 보호 아래 이루어지는 이 독서 교육은 불행히도 초등학교 4, 5학년 쯤에서 좌절되어 버린다. 이 무렵 아이는 인터넷과 만나면서 부모로부터, 활자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다.
해로운 것들이 인터넷 속에 있다. 인터넷의 유해 사이트들이야말로 특히 우리 청소년의 의식을 흐리게 만드는 주범 중에 주범이다. 인터넷을 통해 엔터테인먼트의 이름으로 전달되는 것들이 코카콜라처럼 달콤하게 우리의 뇌를 적시면서 거기에 새겨져 있던 기존의 귀중한 가치들을 지워버린다. 게임중독, 채팅중독, 섹스중독, 호러(공포)중독과 같은 위험한 함정들이 거기에 놓여 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그러한 중독 현상에 빠져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컴퓨터가 도구가 아니라, 지배자로 역전되어 있음을 본다. 중독되려면 독서에 중독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유해 중독은 독서 중독(독서 습관)으로 대체해야지 다른 방법은 없다.
무엇보다 해로운 것이 입시 교육이다. 입시교육은 어린 나이에 생성되기 시작한 독서 습관의 싹을 여지없이 뭉개 버린다. 여러 해 입시 준비에 시달린 우리 대학생들은 입학과 더불어 '우선 놀고 보자'는 식의 대학생활을 보낸다. 그들은 이성보다는 감성, 욕망에 몸을 던진다. 인터넷, 영화, 대중 음악, 미팅에 심취한다. 책이 들려 있어야 할 그들의 손에 그 대신 핸드폰이 들려 있다. 혹 책을 읽고 있는 친구가 있으면, "웬 책?" "너 아직도 책 보니?" 하고 비아냥거린다. '빨리, 빨리'란 슬로건을 앞세우고 있는 사회에서 취직을 위한 책읽기가 아닌 다른 독서는 '느림'과 '낙오'의 상징처럼 보이는 것이다.
주체적 인간을 만들어 주는 것은 활자이지 영상이 아니다. 책을 읽는 자는 그 책을 장악할 수 있다. 장악이란 손에 쥐고 있다는 뜻인데, 따라서 책을 읽는 우리의 머리 속에선 감상과 비판행위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 책이 마음에 안 들면 던져 버릴 수 있고, 이해가 안 되거나 미심쩍은 부분은 되돌아가 다시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독서는 감성과 이성이 동시에 작용하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인데 반해서, 영상은 우리의 감성을 공략해서 우리를 포로로 만들기 쉽다.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영상의 속도에 영합하여 감성이 황홀한 춤을 추는 가운데 이성은 사족을 못 쓰고 잠들어 버린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주체적으로 만나므로 그것을 지배할 수 있지만, 영상은 그러기에는 너무 힘이 세다. 너무 압도적이다.
요즈음 많은 젊은이들이 영상과 인터넷에 압도된 만큼, 활자에서 이탈되어 있다. 심플한 단문에만 익숙한 그들은 책을 읽어도 복문의 긴 문장은 짜증날 뿐만 아니라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이 세상은 난마같이 뒤엉킨 복문의 세상인데, 어떻게 책을 읽지 않는 단세포의 두뇌로 이 세상을 읽어낼 것인가.
독서하는 자는 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즉,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있고, 그렇게 발견한 자기 자신의 지적, 정서적 성장을 꾀할 수 있다. 독서하는 자는 책 속에서 타인도 만날 수 있으니, 나만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공동체의 필수 덕목인 관대한 정신을 가꿀 수 있다. 독서하는 자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자만이 세계(자신의 미래)를 지배할 수 있다.
독서하지 않는 자는 아까 말했듯이, 국내는 물론 열강의 교활한 정치, 경제 세력이 행사하는 공작, 조작의 대상이 되기 쉽고, 사고의 편협성, 경직성 때문에 스스로 천박한 이분법의 희생물이 되어 우리끼리 소모적인 이전투구의 싸움박질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몰주체적 집단사고, 집단의식의 저능상태가 지금 여기에 우려할 만한 풍조로 나타나 있다. 위험사회의 조짐인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는 기반이 허약한 우중(愚衆)사회다. 경제적 상황이 좀 나아졌다고 자만해서는 안 되겠다. 내실 없는 벼락부자는 매우 위험하다. OECD 국가들 중에 한국은 연간 일인당 독서량이 큰 격차로 최하위에 떨어져 있다. 미국 7권, 일본과 프랑스 6권인데 비해 한국은 겨우 1권에 불과하다. 한국이 책을 읽지 않는 벼락부자의 나라로 세계인의 눈에 비친다면, 위신은커녕 깔보임을 당해 장사하기도 힘들 것이다.
책은 우리를 깨어있게 할 뿐만 아니라, 창조적 상상력을 북돋아준다. 21세기는 경제까지도 문화가 지배하는 문화의 세기라고 하는데,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인 독서를 등한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위험사회의 조짐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민간 차원에서 아직은 소규모이지만 활발한 독서운동들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 정부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독서운동은 소극적인 정책으로는 실효가 없고, 의식화 운동 차원의 범국민운동이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 영부인이 독서운동의 선두에 나서고 있는 미국의 경우를 생각하자.
책은 그것의 반성적, 비판적 기능을 통해 우리에게 사리분별의 주체적 자아를 형성해주거니와, 우리의 공동체가 그러한 개인들의 집합체일 때만이 이 지구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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