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명의 중국인이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밀입국하다가 적발된 사건이었다.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물론 대규모 밀입국 사건이기는 했지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먹고 살자고 필사적으로 밀입국한 사람들을 중하게 처벌할 일도 아닌데 왜 그런 사건을 드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분 말씀은 그 중 몇 명이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에 그 사건이 정말 중요해졌다는 것이었다. 없어진 사람 중에 혹시 간첩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정말 파장이 크지 않겠느냐는 것이 말씀의 요지였다.
밀입국하던 사람 중 단속을 피해 사라진 몇 명이 있다는 사실에서(작은 배의 정원을 훨씬 초과해서 타고 왔기 때문에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사라진 사람들이 반드시 육지에 도착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간첩을 떠올리는 그 '공안적 시각'에 쓴웃음을 감췄던 기억이 있다. 그분의 시각으로 이번 정부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 즉 앞으로 파장이 클 사건을 꼽는다면 나는 단연 민간인 사찰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특검과 검찰 재수사에 기대를 걸기 힘든 까닭
▲ 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폭로한 공직윤리지원관실 전 사무관 원충연의 수첩ⓒ프레시안 |
총리실 소속 공무원들이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민간인의 뒷조사를 한 것은 충격적인 일이고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러나 PD수첩 사건, 미네르바 사건 등 논란이 되었거나 비판을 받은 사건은 그 외에도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사건 중에서 민간인 사찰 사건의 파장이 가장 클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뒷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야당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공동으로 특검법을 발의했다. 여당의 공식적 당론은 반대였지만, 여당 일각에서도 검찰의 추가 수사 혹은 재수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이 사건에는 배후가 있다고 볼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당연히 철저한 조사가 있어야겠지만, 특검이나 검찰의 재수사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기대하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미 수사를 다 받고 1심에서 유죄판결까지 선고받은 실무자들의 입장에서 배후 세력을 밝힐 아무런 유인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배후 세력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는데 실형을 선고받은 국무총리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배후를 폭로한다고 해서 그들의 처지가 나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오히려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사찰의 전모가 밝혀질 경우 혐의만 무거워질 위험성도 있다. 정권의 도움이나 사면 같은 것은 당연히 전혀 기대할 수 없다. 합리적으로 생각할 때 그 입장에 있으면 울며 겨자 먹기로 현재의 처지를 감수하려고 할 것이다. 기껏해야 몇 개월의 활동기간이 정해져있는 특검의 설득에 넘어갈 가능성은 생각하기 힘들다.
청와대가 조사하면 일은 풀린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나는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청와대의 자체 조사라고 생각한다. 추가적인 예산이나 조직의 확충도 필요 없다. 시간이 걸릴 이유도 없다. 사찰에 관여했다고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한 참모들을 불러놓고, 대통령이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으면 바로 답이 나온다. 도대체 청와대에서 일하는데 왜 대포폰을 썼느냐, 나와 일하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웠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어떤 대답이든지 나올 수밖에 없다.
그 답변만 들어보면 정말 이 사건에 배후가 없었던 것인지, 혹은 어떤 형태로든 총리실 직원에게 민간인의 뒷조사를 하도록 사주한 세력이 있었는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청와대나 여당에서는 민간인 사찰 사건에서 사용된 핸드폰이 노숙자 등의 명의를 쓴 전형적인 대포폰이 아니라 이동통신사 대리점 주인의 가족 명의를 빌려서 개통한 것이라는 이유로 '차명폰'이라고 불러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한다. 정말 그 노력이 애처롭고 창피하다).
국가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법치주의의 기본이 되는 것은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정부기관이 어떤 일을 하면 반드시 그 흔적을 남겨야 한다. 그래야만 그로 인해서 권리 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의 제기를 할 수도 있고 법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면서 다른 사람 명의의 전화기를 사용해서 몰래 어떤 일을 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법치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다. 공정사회는커녕 공정하게 일을 했는지 여부를 평가할 수 있는 대상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당연히 대통령은 그 경위를 밝혀서 국민 앞에 보고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해서 청와대 대변인은 "검찰이 수사 중인 사안"이라며 "수사 후 연락이 오면 밝힐 것은 밝히고 징계할 것은 징계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오만방자하고 건방진가.
물론 아무리 공무원이라고 해도 개인 비리를 저질렀을 때는 형사절차에 따라 조사를 해야 한다. 진술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은 개인 비리가 아니다. 국무총리실 소속 공무원들이 공식적인 보고를 하고 다른 기관에 공문을 보내가면서 저지른 일이다. 당연히 자체적인 조사가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만일 해당 공무원이 형사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답변을 거부하면, 그러한 이유로 조사가 벽에 부딪혔고 할 수 없이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는 발표가 있어야 한다.
청와대 소속 행정관이 '차명폰'을 만들어서 형사 사건의 증거를 인멸하려는 총리실 소속 공무원에게 빌려 준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상황에서, 그것은 정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사찰 피해자를 '철저 조사'하라고?
비단 청와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은 민간인 사찰 사건의 피해자인 김종익씨에 대해서 '비자금 조성의 개연성'이 있다는 이유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철저한 검찰수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뉴스를 통해서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국회의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원리는 견제와 균형이고 그것은 삼권분립을 통해서 구현된다. 얼마 전 여당의 원내대표가 "국회가 해야 할 일은 정부의 부담을 더는 것"이라는 발언을 해서 귀를 의심하게 했지만, 우리가 국회를 둔 것은 무엇보다도 행정부를 견제하라는 것이다.
청와대 소속 공무원이 대포폰을 만드는 상황에서(법무부장관의 국회 답변에 의하면 다섯 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행정부가 그 경위를 밝히는 조사도 안 하고 있는데 기껏 국회의원이 하는 일이 사찰 피해자를 수사의뢰하는 것이어야 할까. 조전혁 의원은 만일 자신의 보좌관이 대포폰을 만들어서 문제가 되었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 보좌관에게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묻지 않을까. 누구의 머리에나 가장 먼저 떠오를 의문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엉뚱한 수사의뢰를 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정부가 스스로 묻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당연히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 정부에서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을 묻지 않으면 다음 정부가 물을 것이다.
그 정부도 묻지 않으면 궁극적으로는 국민들이 물을 것이다. 도대체 왜 공무원도 아닌 민간인의 뒷조사를 했는지, 왜 사찰 내용이 적힌 수첩에는 'BH(청와대) 지시사항'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는지, 왜 청와대 행정관이 차명폰을 만들었는지. 그때는 이 사건의 배후 세력은 그 대답을 막을 아무런 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정부의 부담을 더는" 역할이나 하고 있을 한가한 국회의원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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