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제약회사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히는 그런 책은 아니다. 사실은 상당히 읽기 불편한 책이다.
일반인들은 자신이 복용하는 약에 관한 부분을 잘 살펴 두면 앞으로 질병의 치료와 약 복용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단, 이 책은 행간에 통계학적, 의학적 의미가 많이 생략되어 녹아 있으므로 이 책만을 읽고 부작용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는 말았으면 좋겠고, 주치의를 너무 불신하지는 않게 되기를 바란다.
의사들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돈키호테의 헛소리 혹은 음모론으로 치부할 의사도 있을 것이고, 의학 지식을 익히고 환자 보기에도 시간이 빠듯한 젊은 의사들은 지금껏 배워온 것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한두 문장마다 저자가 그런 결론을 내린 근거가 무엇인지 참고문헌을 자꾸 들춰보게 되었고, 원문들을 찾아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읽으면서 표시해 둔 미주의 참고자료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무겁다. 실제로 처방되는 약들의 경우에는 저자가 지적하는 처방 이유 외에 저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약 처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장 오늘부터 진료를 할 때 머리가 복잡하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이 책에서 워낙 여러 가지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어서 저자가 주장하는, 의약품 평가의 과학적 기반이 무너져 있다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개별 의약품의 인허가나 임상시험 등 개별 사안을 중심으로 이를 이슈화하는 캠페인이나 책들은 많이 보아 왔지만 그런 문제가 개별적인 일탈 행위가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사실을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는 21장에서 수많은 문제들을 극복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 소제목만 적어보겠다.
● 영리추구가 아니라 필요 중심의 신약 개발
● 임상시험은 독립적인 공공사업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 의약품 규제 혁신
● 이익상충이 있는 의사는 의약품 선정심의위원회나 치료지침위원회에서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 제약회사의 불법 마케팅과 그 밖의 범죄 행위를 단죄해야 한다.
● 의사와 의사 단체는 범죄 행위에 가담하지 말아야 한다.
● 환자 단체는 제약회사를 멀리하고 환자 편에 서야 한다.
● 의학지는 의약품 광고와 이익상충에서 탈피해야 한다.
● 언론은 제약회사의 조직범죄에 주목해야 한다.
현대의학의 탄생
20세기 초에 미국의 의학은 의학 교육에 있어서 비과학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과학에 근거한 – 즉,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한 추론과 재현 가능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견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충돌이 없는 다수의 연구자들의 치열한 논의를 거쳐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을 통한 - 지식을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연이은 혁명적인 치료기법의 발견과 상승효과를 일으켜서 미국과 유럽의 의학은 그동안의 치료 패러다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인정받아 세계적으로 통용이 되는 '현대의학'이 되었다.
그런데 현대의학이 누리는 이런 지위의 근간이 되는 과학적 방법에 따른 진실 추구가 구조적으로, 그리고 고의적으로 방해받고 있는 오늘날 현대의학은 어렵게 쌓아 온 정당성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책을 읽고 전문의약품에 대한 불신이 커져서 자연요법이나 건강식품을 통해 건강을 관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부문이라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다. 의약품이라고 해서 모두 위험한 것은 아닌 것처럼. 그나마 관리 감독이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의약품의 관리가 이런데, 다른 부문은 어떻겠는지를 생각해보자.
국내에서 시행한 복제약의 생물학적 동등성 실험 결과는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유해하지 않다는 것만 증명하면 시판할 수 있는 생약이나 건강식품은 얼마나 건강에 도움이 될까? 우리가 매일 먹는 식품들은 안전한가? 농약, 살충제, 화학물질로 오염되어 가는 생태계는? 이 부문의 생산자나 관련 연구자들, 감독기관은 이해관계에 흔들리지 않고 과학적 합리성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는가? 우리 사회에도 눈앞의 작은 부정에 물들지 않기로 선택하는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는가?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 시류 속에서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시장에 맡겨버린 결과, 엄정해야 할 과학적 논의 과정마저 여러 이해집단에 의해 흔들리고 있고, 이는 당장 우리의 안전과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내가 선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는 밤이다. 이게 다 괴물 같은 괴체 때문이다.
각주
1) 영국에서 시작되어 130개국의 연구자, 의료인, 환자, 보호자 등의 참여로 운영되는 민간단체. 근거에 기반을 둔 의학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기업의 후원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한편, 기존의 연구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하여 그 결과를 Cochrane Library에 공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사이트를 참조할 것. (http://www.cochrane.org/contact/centres)
2) 구체적인 사례에 있어서는 '저자가 주장한 것 이외에 다른 현실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고혈압 치료에 있어서 이뇨제가 가장 싸고 효과가 좋은데도 처방을 잘 하지 않는다는 지적에 관해서는, 고령의 남자 환자의 경우 전립선비대증으로 인해 배뇨가 불편한 현실을 감안하고, 하루 두 번 복용해야 하는 약보다는 하루 한 번 복용하는 약이 편리하다는 점 때문에 의사들이 이뇨제를 덜 처방한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겠다. 허가된 용도 외의 사용 문제와 관련해서, 예를 들면 감기 환자에게 1세대 항히스타민제의 부작용인 졸음을 피하기 위해 부작용이 적은 2세대 항히스타민제를 처방하는 것은 허가용도 외의 처방이다. 이론적으로 2세대 항히스타민제는 항콜린 작용이 없어 감기에 효과가 없다고 하는데 현실에서는 효과가 있다.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감기에 걸리면 그냥 콧물 흘리게 두거나 1세대 항히스타민제를 먹고 자도록 둘 만큼 우리 사회가 서정적인가?
신약에 의한 부작용을 피하고 잠시 유행하는 근거가 의심스러운 치료를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전부터 개인적으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는데 다음과 같다. △ 기존에 안전하고 효과가 있는 치료제가 있는 경우에는 신약이 나오더라도 3년간은 신약을 쓰지 않는다(저자는 7년 동안 쓰지 말 것을 권하고 있다). △ 유행하는 치료가 아무리 수익성이 높아도 그것이 종합병원급에서 수련의들과 학생들에게 교육되지 않는 치료라면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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