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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도둑처럼 올 수 있다

[민미연 포럼] 1차 세계대전에서 배우는 교훈

'해방은 도둑처럼 왔다.' 민주화 투사이자 사상가인 함석헌 선생의 말이다. 1945년 8월 한반도는 유엔국제연합군에 의해 해방을 맞았다. 이는 너무 낯선 경험이었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해외에서 투쟁을 지속해왔지만, 이들의 힘은 분산되어 있었고 보도 통제 등으로 국내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 독립을 위해 학생 때부터 자신을 바쳐왔던 천재 이광수도 승승장구하는 일제를 보며 결국 변절했다. 어느 친일파 시인에게 누군가 질문했다. '왜 친일(親日)하셨습니까?'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일본이 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인간은 늘 익숙함을 선호한다. 익숙하지 않은 대상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에게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는 힘든 일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두뇌'라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정보에 대해서는 무시 전략을 사용하고, 익숙한 대상과 이미지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은 채 자동으로 연결해 결론을 내린다.

미국 남부 출신자들은 성적 개방이라는 측면에서 평균적으로 한국 청년들보다 과하지 않음에도, 한국인은 미국인은 성적으로 상당히 개방적일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 사는 미국인 유튜버가 만든 동영상에서 지적한 내용이다.

또 보통의 한국인들은 미국인이 잘 사는 줄 안다. 앞마당에는 잔디가 있고 뒷마당에는 정원이 있는 쾌적한 집이 평범한 미국인이 사는 집으로 생각한다. 외국에 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영화에서 보던 그런 집은 그곳에서도 잘 사는 사람만 사는 집이라는 사실이었다. 현재 미국의 노숙자, 즉 홈리스 인구는 200만 명이다. 이 중 6세 이하는 50만 명이다.

하지만 대다수 한국인은 이런 사실을 머리로는 알아도 함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주의를 좇던 많은 진보적 지식인도 마찬가지다. 독일이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분리될 때도 서독에서 동독으로 탈출하는 사람은 있어도 서독에서 동독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팩트는 알지만, 그 팩트가 총체적 맥락에서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는 생각하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했다.

만약 사회주의 국가의 여러 정보를 가지고 자신이 가진 사회주의 신념을 점검했다면, 그토록 수월하게 사회주의자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다시 반(反)사회주의자로 돌아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일은 정보의 함의를 애써 무시하는 사고의 패턴 때문에 일어난다.

현실을 보자. 현재 한반도는 전쟁 직전이다. 카터 전 대통령이 직접 북미대화를 위해 나서겠다고 제안한 것은 지금의 대치 국면이 전쟁 직전이었던 1994년 위기와 판박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후배가 최근 유럽 출장 중 만난 사람마다 '한반도 전쟁'을 이야기해 피곤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후배는 "뭐, 전쟁까지 일어나겠어?"라고 덧붙였다. 한국인들은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란 끔찍하기에 전쟁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군사 전문가'라는 이상한 사람들만 종편에 나와 신나게 떠들 뿐이다. 자신들은 안 죽을 것처럼.

군사 문제에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미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위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진보 동네의 한호석, 황규은 같은 정세 분석가들이다.

그런데 전쟁은 원하는 사람이 없어도 발생할 수 있고, 원하는 사람이 없어도 인명 살상이 일어날 수 있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1차 세계대전은 발생했다. 아래 논의는 김정섭 박사(영국 옥스퍼드대학 국제관계학 박사로 현재 국방부 고위공무원으로 재직 중)의 1차 세계대전의 외교전을 주목한 저서 <낙엽이 지기 전에>(엠아이디 펴냄)를 기본적으로 참조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다. 독일 역사학자인 프리츠 피셔 교수는 <세계 국가 지위의 장악>이라는 책을 통해 1차 대전은 독일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전쟁 결정은 1914년 7월이 아니라 1912년 12월 8일 군사 참모 회의에서 이미 전쟁 확대가 결정되었다고 말한다. 피셔 교수는 막대한 양의 문서와 정보를 취합한 후, 이런 결론을 내렸다.

다른 설명은 좌파에서 나오는 것이다. 레닌에 의해서 대표되는 설명은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금융을 포섭한 국가 독점 자본주의로 변하고, 이 국가 독점 자본주의는 작은 내수시장을 벗어나 국외시장을 찾아 나서게 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제국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선진 공업국들이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서면서 필연적으로 대결하게 된 것이 1차 세계대전이다.

두 이론 모두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지만, 설득력 측면에서는 부족하다. 피셔 교수가 말하듯 독일이 벼르고 벼른 전쟁 준비를 끝내고 시작한 전쟁이라고 하기에 엉성한 구석이 너무 많다. 오스트리아 세르비아에 대한 과도한 대응을 막으려 했고, 러시아 황제에게 자제를 호소하는 전문을 보냈다. 또 프랑스와의 전쟁을 막기 위해 독일군부를 대표하는 몰트케 장군과 대립했던 인물이 바로 빌헬름 황제였다.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 역시 허점이 있다. 독일은 애초에 영국과 경쟁의식을 가지고 해군력을 키워 다른 식민지 가능 지역으로 확장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나, 곧바로 영국과 건함 경쟁을 그만두었다. 1910년부터는 여타 지역으로 힘을 확장시키는 세계주의(제국주의)보다는 유럽 내부의 강대국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당시의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현상 유지를 선호했다. 오히려 '현상 유지가 누군가에 의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20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쟁은 도대체 누구의 잘못일까? 먼저 전쟁의 진행을 보자.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된 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가 개입했다는 명확한 증거 없이 무리한 최후통첩을 던지고 침공했다. 오스트리아는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부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허용하게 되면, 다른 여타 민족을 제어하기 힘들기 때문에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생각한 전쟁은 발칸지역에 한정된 국지전이었지, 전면전이 아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의 침공을 받은 나라다. 그런데 독일 입장에서는 전쟁이 발발하면 결국 프랑스와 러시아의 협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고, 프랑스를 우선 제압한 뒤 러시아로 진격한다는 '슐리펜 계획'을 세웠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전쟁 의지가 자신들의 입장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러시아는 총동원령을 먼저 내렸다. 현대처럼 미사일과 기동력이 발전한 시대가 아니었기에 동원령을 누가 먼저 내리는가가 전쟁의 승패에 핵심 요소로 인식될 때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총동원령은 사실 해프닝에 가까웠다. 독일을 자극하는 것을 극구 꺼려 '블러핑 게임(엄포 게임)'으로 부분동원령을 내렸으나, 러시아의 군 편제가 여러 지역을 통합한 군구로 형성되어 부분동원령은 실무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군부의 강력한 요청으로 부분동원령은 총동원령으로 변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총동원령은 전쟁 개시의 의도라기보다 독일의 침공에 대한 우려에서 나온 방어적 행동이었다.

영국의 개입은 전통적으로 대륙에 대한 균형자 정책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독일이 유럽을 석권하게 되면 유럽은 '독일 세상'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편을 들어 독일의 힘을 제어하는 것이 영국에게는 당연한 절차였다. '보불전쟁(1870~71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 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했던 프랑스도 이 때쯤에는 전쟁을 통해 알자스-로렌지역을 회복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거의 포기했다.

누구도 2000만 명이 죽어 나가는 대규모 전면전을 의도한 국가는 아무도 없었다. 서로 현상 유지를 원했다. 다만 상대를 극도로 불신하고 상대의 의도를 확대 해석했을 따름이다. 모두가 방어를 통한 현상 유지를 원했지만, 전쟁은 발발했고 수천만 명이 죽었다.

전쟁의 원인은 무엇일까? 김정섭 박사는 책에서 여러 가지 사소한 요인을 검토했다. 민족 국가가 형성되면서 증폭된 민족주의적 감정의 폭발 때문인가? 이에 대해 그는 민족주의는 전쟁이 개시된 후 각국의 시민들이 자신의 정부에 대한 지지를 보이는 행위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제국주의도 이집트 모로코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타협으로 독일이 배제됨으로써 독일은 이미 힘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1914년 독일은 세계주의(제국주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던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라는 거대 담론은 전쟁의 실제적 원인이 아니었다.

하나의 요인으로 전쟁 원인을 말하자면, 전쟁을 선호했던 군부와 그들이 신봉했던 '공격 우위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었다. 특히 단기전 신화와 선제공격 우위에 대한 믿음은 전쟁을 불러온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당시 유럽의 군부는 공격 우위 신화에 취해 있었다. 먼저 공격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유리하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지루한 참호전이 되었다.

'공격교리'가 위험한 것은 상대의 공격교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평화는 군사력이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은 부족한 믿음이다. 나 홀로 군사력을 키울 때는 맞는 말이지만, 상대의 믿음도 군사력 확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현대 상담심리학 분파인 인지치료는 중요한 행위 뒤에는 그 행위를 뒷받침하는 믿음이 자리한다고 본다. 상대의 행위 A는 나의 행위 C를 직접적으로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상대의 행위에 대한 나의 해석 B가 개입된다고 한다. 만약 믿음 B가 합리적이지 않다면, 결과는 재앙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는 것을 1차 세계대전이 보여주고 있다. 나의 대응 C가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믿음(해석) B가 우선 합리적이어야 한다. 불합리한 믿음, 공포심에 눌려 블러핑 게임(엄포 게임)에 나서면 둘의 충돌을 필연적이다.

선제공격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믿음은 군사·외교적 비용이 매우 낮을 것이라는 오판으로 이어진다. 독일은 벨기에의 강력한 반격에 놀랐고, 주춤했다. 중립국 벨기에를 공격하는 것이 영국의 개입으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먼저 공격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이상한 단순함이 군부를 휘어잡은 결과다.

문제는 이런 단순 무지한 군부의 영향력이 정치인들까지 압도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도 일선 장교들의 의도적 과잉 대응으로 수천만 명이 희생된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도쿄의 정치인들은 사후 승인했다. 당시 유럽의 군부는 황제에게조차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만용(蠻勇)에 위신(委身)을 걸었던 1차 세계대전 당시 사람들과 비슷한 이들이 한 명은 미국 대통령으로, 다른 한 명은 한반도 북쪽에 출현했다. 트럼프는 유엔 연설을 통해 북한의 '완전한 파멸'을 선언했다. 김정은은 트럼프를 향해 "반드시 불(군사력)로 다스릴 것"이라고 성명서를 냈다. 마주하는 두 대의 폭주 기관차는 조만간 충돌할 수 있다. 만약 충돌한다면, 적어도 천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낳을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는 끝이다.

이마누엘 칸트는 평화가 이루어지는 '세계공화국(Weltrepublik)'을 꿈꾸었다. 비현실적인 철학자의 몽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칸트 역시 세계공화국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칸트는 비정하리만큼 현실적이었다. 칸트는 세계공화국의 형성이 인간의 '반사회적 사회성', 즉 잔인한 전쟁을 통해 달성된다고 했다. 인간은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전쟁에 몰입한다. 그래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에 대한 반성으로 세계평화를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비정하리만치 현실적인 전망이다.

2000만 명이 희생된 1차 세계대전은 국제연맹을, 5000만 명이 희생된 2차 세계대전은 국제연합(UN)을 낳았다. 인간은 지독한 비참함과 희생을 목격하고 나선 뒤에야 대책을 궁리한다. 이제 북미 간 전쟁이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자를 보면서 사람들은 다시 반성할 것이고 새로운 평화 운동과 조직 건설에 나설 것이다. 결국 희생자의 비참함은 사람들의 반성을 촉발하는 본보기가 된다.

한민족의 파멸은 세계를 위해 가치 있는 희생일까? 수천만 명의 한국인이 희생되었음에도 오히려 달라진 힘의 역관계 속에서 여러 나라가 패권경쟁에 몰두하는 것으로 상황이 귀결된다면, 한반도에 사는 수천만 생명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켜야 할까? 우리는 다시금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전쟁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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