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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위기보다 생태 위기!

[민미연 포럼] 지도자 없는 혁명, 자발적 소박함에 관하여

현재 한국은 겉보기에 평온해보이나 북한의 핵 실험과 미사일 시험 발사 등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북한과 미국 지도자 간에 연일 주고 주고받는 말싸움으로만 보자면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다. 미국 측에서는 "지금껏 보지 못한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느니, "북한 완전파괴"라느니, "북한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느니 하는 등의 한반도 전쟁을 암시하는 위협적인 말들을 쏟아낸다. 이에 맞서 북한은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를 불로 다스릴 것"이라느니,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자신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느니, "누가 더 오래갈 것인가는 그 때 가보면 알 것"이라느니 하는 등의 강경한 언사를 내뱉는다.

언론도 예외 없이 연일 이런 북핵 위기 관련 소식을 전하면서 '한반도 전쟁 임박설'이나 '한반도 전쟁 불사론', '북한 선제타격', '예방 전쟁', '김정은 참수 작전' 등의 전쟁 가능성 관련 각종 가상 시나리오들을 쏟아내며 한반도 정세를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 한반도 정세가 위중함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이를 예방하거나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겠지만, 아마도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시스템에 의해 결판날 수도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할 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도무지 모를 일이다. 70여 년의 분단 상황에서 드물지 않게 겪던 일인지라 설마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나겠는가 하여 무심한 것 같기도 하다. 당사국 지도자들의 결정에 목을 매는 처지라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체념 상태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우발적인 충돌을 우려하며 내심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한반도 평화를 확신하며 더 이상 끔찍한 전쟁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북핵 관련 한반도 위기에 대한 뉴스가 쏟아져 나오고 모두가 우려하는 와중에 얼마 전 북핵 위기 관련해 특이한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핵무기 보다 위험한 건 생태환경 무시정책'이라는 제목의 기사다. 이 기사는 다름 아닌 한국에서 이방인으로 10년 넘게 살아온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Emanuel Pastreich, 한국 이름 이만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의 <한국인만 몰랐던 더 큰 대한민국>(레드우드 펴냄)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방인의 시각에서 우리 사회의 현재를 진단하고 들여다보며 방향을 제시하는 책으로 소개된다.

대부분의 관련 기사들을 살펴보자니, 이 책의 주요 내용으로 소개하는 것은 두 가지다. 먼저 이만열 교수는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오늘날 한국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는 북한도, 경기 침체도, 특정 정치인의 행태도 아니고, 문화적 데카당스(Decadence, 퇴락)의 확산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퇴락하는 문화 속에서 개개인은 공동체의 미래에 관심을 두지 않고, 단기적인 만족을 인생 목표로 삼으며 희생의 가치는 평가 절하한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 기업 독재, 페북 독재를 경계하라)

게다가 이 교수는 이런 지적에만 그치지 않고 북한의 핵무기보다 더 위험한 요소로 그동안 외면해 온 생태환경 정책을 꼽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미세먼지, 중국 사막화, 북한 사막화, 해수면 상승 등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지만 국가 정책은 자기 앞가림만 하려 들 뿐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며 국가 차원의 근원적 대책도 없이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안보를 기후변화까지 포괄한 개념으로 확장해 독창적인 '기후변화 림팩(RIMPAC, 환태평양 해군 합동 훈련)'을 제안하고, 재생 가능 에너지를 생산해 100% 에너지 자급자족을 이루는 장기적 비전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 사드배치=MD편입, 한반도는 이제 '전장'이 됐다)

혹자는 이러한 지적을 두고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 한가로이 생태환경 운운하느냐고 비아냥대거나 혀를 차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급박하고 요란스럽게 전개되는 핵 위기나 전쟁 위기가 아무리 위중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도자들이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저 위기로 그치거나 극복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급박하고 요란하고 위중한 만큼 지대한 관심을 갖고 우려하게 될 테고 그에 마땅한 대책이 마련되어 결국에는 그야말로 평화적이고 유쾌한 방식으로 해결되리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태 위기는 핵 위기처럼 떠들썩하거나 급박하게 다가오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서서히 다가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사실 어느 정도는 현재 다가와 있는 상태다. 그런데 생태 위기가 더욱더 심각하게 진행되는 경우는 더 이상 해결을 위해 손을 써볼 틈도 없을 것이다. 또한 생태 위기는 지도자들의 결단으로 일거에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그리고 또한 생태 위기는 그 피해 범위가 핵폭탄보다 더 넓게 전 지구적으로 광범위하다. 그렇다면 그 위험성은 오히려 핵 위기보다 훨씬 위중하다고 할 수 있으며 도저히 하찮게 여길 일이 아니다.

지구적 기후변화와 같은 생태 위기가 현재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과학자들 사이에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도 2007년 '4차 기후변화 평가보고서'에서 지구적 기후변화는 지구평균기온과 해수면 온도 상승, 광범위한 얼음의 융해, 해수면의 상승 등의 현상들이 관측 자료를 통해 명백히 나타난다고 분석한 바 있고, 이 밖에 지구적 기후변화는 홍수, 가뭄, 사막화, 생태계 변화를 유발할 것으로 얘기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는 다시 흉작과 기근을 유발하고 주민들의 주거안정, 건강 및 복지 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며 기후변화로 인한 이런 사회 경제적 모든 영향들이 결국에는 민족 간 국가 간의 갈등으로 번져나갈 것으로 전망되기도 한다.

실제로 지구온난화의 이런 영향은 최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을 휩쓴 초강력 허리케인 '하비(Harvey)'와 '어마(Irma)', 카리브해를 강타했던 허리케인 '마리아(Maria)' 등은 지구온난화 탓이라는 기후과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그리고 논란이 있기는 하나 장기적으로 볼 때 지구온난화는 더 강력한 허리케인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또한 올여름 인도와 네팔, 방글라데시 등 남아시아 3개국에서는 몬순(우기) 폭우로 1200명 넘는 사람이 숨지는 등 심각한 홍수 피해가 발생했다는 보고도 있다. 또 일전에는 베트남 최대 곡창지대인 남부 메콩 삼각주가 기후변화 여파로 100년 뒤에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게다가 남태평양의 투발루(Tuvalu)와 인도양 섬나라 몰디브(Maldives) 등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수몰 위기에 처해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기후변화 중 생활 깊숙이 파고든 대재앙의 징후는 폭염이라고 한다. 미국 마노아 하와이대(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연구팀은 이산화탄소 배출 추세가 지금처럼 계속되면 2100년에는 전 세계 4분의 3이 살인 폭염에 직면할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네이처 기후변화>지에서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서울은 2100년 살인 폭염 일수가 무려 67일로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난해 말 인도에서 먼지와 오존 등 대기오염 물질로 하루 평균 3283명이 숨지고 중국에서는 3233명이 숨지는 것으로 조사됐다는 보고다. 9.11테러 외에 어떤 전쟁에서도 하루에 이 정도의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는 그저 먼 나라 남의 얘기가 아니다. 지구적 기후변화는 말 그대로 국경이 없는 전 지구적 차원의 광범위한 재앙이다. 우리나라의 미세먼지 농도는 WHO 권고 수준의 3배로 OECD 국가 중 최악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비영리 민간 환경보건단체 '보건영향연구소(HEI)'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미세먼지 사망자 수는 1990년 연간 1만5100명에서 2000년과 그 이듬해에 1만3100명으로 줄었다가 다시 증가세로 돌아서 2015년엔 1만8200명에 달했다는 보도가 있다.

현재 사정이 이러하고 그 결과가 전쟁 못지않게 심각할 수 있음에도 생태 위기는 우리 사회에서 다른 문제보다 경시되거나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일반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생태환경 무시정책을 지적하는 이만열 교수 관련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듯 정부 또한 마찬가지인 듯하다.

생태환경 문제가 이렇게 경시되는 것은 이런 문제들이 광범위하고 복잡하며 그 영향 또한 장기적이고 간접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래는 우리가 장기적인 진정한 이익보다는 당장 눈앞의 단기적 이익에만 눈이 멀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통은 사람들이 당장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이고 시급한 일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보통 사람들은 실천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그저 우려하거나 한탄하는 수준에 머물거나 정부 당국자 혹은 환경운동가 등에게 미루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한 발짝 물러서서 조금만 더 고민한다면, 우리는 당장의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자신에게 진정한 이익이 되는 것을 택하는 것이 더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이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당장의 흡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흡연을 선택하기보다 장기적으로, 즉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이익이 되는 금연을 선택하리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환경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신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당장의 단기적인 만족을 위해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자연환경을 계속해서 남용하거나 착취하는 행위를 선택하기보다 장기적으로, 즉 우리 인류 전체의 삶을 놓고 볼 때 이익이 되는 행위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실제로는 당연하지 않은 것을 아무 고민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생활하기 일쑤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가 직면한 생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있어 왔다. 이들은 지나친 물질적 풍요나 편의보다는 더욱 지속가능하고 의미 있는 생활방식을 발전시키는 일에 참여한다. 말하자면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거나 매몰되지 않고 장기적인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숙고하며 최선의 삶의 방식을 마련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론 개인적으로 묵묵히 실천하는 이들도 있지만 공동체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아직 보편화되지는 않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문화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위기에 처한 세상을 위한 치료제"니, "불확실한 시대의 가장 확실한 생존전략"이니, "빈부격차와 생태계의 파괴라는 현대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운동"이니 하는 것으로 소개되는 '자발적 소박함(voluntary simplicity)의 삶'이라고 하는 것 혹은 '자발적 단순함의 삶', '자발적 가난'이라고 하는 것이 그중 하나다.

이 말은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말로 사람마다 달리 사용하고 있으며 삶의 방식의 여러 측면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도 이것이 의미하는 바의 정수를 뽑아 축약해보자면 대략 '자신의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인생에서 쓸데없고 복잡한 것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적인 성장 및 검소한 소비를 통해 생태계와 조화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말 그대로 '물질적 풍요와 소비가 개인적 성취능력의 표본으로 간주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절약하거나 절제하여 소박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여 소비를 줄이고 검약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말을 대중화시킨 두에인 엘진(Duanae Elgine)의하면, 이런 삶의 방식은 구체적으로는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런 삶은 개인의 전체적인 소비 수준을 낮추는 것뿐만 아니라, 내구성 있고, 공해가 없으며, 에너지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제품들을 선호하는 소비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삶의 방식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다른 이에게 주거나 판매함으로써 개인적인 삶에서 과도한 혼란과 복잡함을 줄이는 것이기도 하다. 교통수단은 대중교통, 자동차 함께 타기, 좀 더 작고 연비가 높은 자동차타기, 일터에 가까운 곳에 살기, 자전거 타기, 걷기 등의 수단으로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소박한 삶의 실천으로 인해 자유로워진 시간과 에너지를 사회활동이나 시민단체 활동에 할애하는 것이기도 한다. 또한 지구의 생태환경은 우리의 확장된 육체라는 것을 깨닫고 지구와 친밀한 관계를 느끼면서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이밖에 이런 삶은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갖는 것 등등 다양한 구체적인 생활방식을 일컫는 것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구체적인 삶의 방식은 개인적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또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간에도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당장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소비를 줄이라는 등 소박한 삶의 실천으로 얻은 자유 시간을 활용하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 의문일 수 있다. 이런 소리를 지껄이다가는 여기에서 다시 먹고살 것도 없고 핵폭탄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기 직전인데 무슨 한가한 소리냐는 비아냥거림을 면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소박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여지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최저임금 인상, 양질의 일자리, 적정 가격의 주택 등등 각종 새로운 복지 정책일 것이다.

어쨌든 엘진은 이런 자발적 소박함의 삶이 예전에는 배부른 소리라고 치부되었으나 오늘날과 같은 생태적 파멸의 위기 상황에서는 절박한 외침으로 들릴 정도로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삶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어 삶에 대한 더 간소하고 친환경적인 접근은 우리의 문화와 일상생활의 일부로 흡수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범위도 극적으로 확대되어 과거에는 자발적 소박함의 삶이 개인 차원의 문제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으나 이제는 인류 전체의 미래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생활방식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각종 언론은 물론 우리 사회도 우리 인간의 행복추구 방식이 소비주의에서 자발적 소박함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엘진은 이러한 운동은 지도자 없는 혁명의 일부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이런 추세라면 이제 지구를 생각하는 의미 있는 생활방식인 자발적 소박함의 삶은 개인적 실천의 차원을 넘어 시민혁명의 형태로 나타날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생태환경 문제는 핵 위기처럼 제한된 극소수 지도자에게 목매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면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그렇다고 지도자나 관계 당국자 중심의 국가적 노력을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국가대로 생태환경 무시 정책으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환경 문제의 위중함에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이고, 개인도 당장의 개인적 이익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이익 혹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삶, 즉 자발적 소박함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때가 아닌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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