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가 지난 겨울 길거리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새삼 깨달았다. 과거 한국은 혁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민이 피 흘려 독재체제를 민주공화정으로 바꿨다. 동북아에서 한국처럼 민주의 의의를 국가 정체성으로 확고히 새긴 나라는 없다.
하지만, 달리 보면 우리는 지난겨울 촛불을 들기 전까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했다. 생생하게 경험해 보지 못한 탓이다. 우리는 4.19민주혁명의 의의가 무엇인지, 전태일의 항거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반추해보지 않았다. 수십 년간 이어진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사를 밑줄 그어가며 공부해본 경험도 없다. 기성세대 대부분이 한국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해 볼 겨를이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몸으로 체득한 이전 세대의 반민주적 교양을 자식에게 대물림할 뿐이었다.
마석 모란공원 묘역이 특별한 이유다. 이곳은 방문한 이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의 의의를 되새기게끔 하는 곳이다.
모란공원 묘역은 민주주의 산 교육장
지난 19일 한국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인 모란공원을 찾았다. 모란공원 묘역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위치한 경춘선 마석역에서 도보로 약 20분가량 거리에 있다. 범 민주계열 정치인들이 중요한 시기마다 찾는 곳이다. 현재 약 13000기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약 160여 명의 민주열사가 묻혔다.
공원 입구에서 위로 쭉 뻗은 길을 중심으로 묘역은 크게 좌우로 나뉜다. 오른편이 주로 민주열사가 묻힌 곳이다. 오른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민주열사 묘역 안내 책자 비치대와 민주열사가 묻힌 곳을 표시한 묘역도가 들어서 있다. 이들은 2013년 세워졌다. 묘역도는 구글 지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모란공원 묘역은 사설 묘지이기에 희망하는 누구나 안장은 가능하다. 실제 대부분 묘소는 일반인의 묘역이다. 3년에 25만 원가량 정도의 관리비, 약 1500만 원가량의 묘역비, 15년의 묘역권 등 묘역 이용 기준도 민주열사와 일반인에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모란공원 묘역이 상징성을 띈 이유는 1970년 분신한 전태일 열사가 이곳에 묻혔기 때문이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이하 추모연대)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 등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권은 노동권 존중을 요구하며 분신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낳은 전태일 열사의 유해가 서울시내에 묻히길 원치 않았다. 이에 보안당국은 유가족에게 전태일 열사의 묘지를 서울과 먼 거리에 조성하길 종용했다. 이에 유가족이 고른 곳이 모란공원이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은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기란 쉽지 않았다. 대중교통도 하루 두세 대 뿐이었고, 눈이 오는 날엔 접근도 어려웠다"며 "당시 정권은 최대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전태일 열사를 떨어뜨려두려 했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만 해도 모란공원은 새 묘지라 다른 묘를 찾기도 어려웠다"던 이소선 전 유가협 회장의 말과 일치한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전 회장은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평생을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이 전 회장은 지난 2011년 타계 후 전태일 열사 묘소 왼편 두 칸 뒤에 안장되었다. 대부분 언론이 이소선 전 회장을 '이소선 여사'로 표현하는데, 남성에게는 대체로 전 직책을 붙여 호명하는 것과 비교하면 부당한 표기로 보인다.
전태일 열사가 묻힌 후, 점차 더 많은 민주열사가 모란공원 묘역에 안장되기 시작했다. 1971년 5월 노조 활동 중 구사대에게 피습 당해 살해된 김진수 열사(당시 한영섬유 노동자), 1973년 10월 이른바 '유럽거점대규모간첩단' 명단에 포함돼 안기부의 고문으로 숨진 최종길 열사(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 1979년 신민당사 점거 투쟁 중 경찰의 살인진압으로 사망한 김경숙 열사(당시 YH무역 노동자) 등이 모두 모란공원에 묻혔다. 이들 모두 문민정부가 들어서 시민권을 인정받기 전까지는 이른바 '빨갱이'로 모욕당한 민주화의 산증인들이다.
추모연대에 따르면 사실 전태일 열사 이전 이곳에 묻힌 민주열사가 있다. 권재혁 열사다.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던 열사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추진하려 했으나, 1968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소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주범으로 내몰려 1969년 사형 당했다. 권재혁 열사는 사망 다음 날인 1969년 11월 5일, 모란공원 묘역에 안장됐다.
모란공원이 본격적으로 세간에 알려진 계기는 박영진 열사 장례 투쟁이다. 박 열사는 1986년 신흥정밀에 입사해 임금 인상안을 놓고 사측과 맞서던 도중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했다.
노동계는 박 열사 유해를 모란공원에 안장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상당수 민주열사 묘역이 모란공원에 조성된 터라 부담감을 느낀 정권과 대립, 한 달 열흘간의 투쟁 끝에 유해를 안장했다. 이 사건이 회자되면서 모란공원은 중요한 민주화의 성지로서 존재감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1987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가 이곳에 안장된 사건은 20년 넘게 지속된 독재에 지친 시민이 대대적 항쟁에 나서는 도화선이 되었다.
자발적으로 조성된 민주화 성지
전두환 정권 붕괴로 형식적 민주화를 이룩한 다음에도 이곳의 상징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직장 투쟁으로 노동 현장의 민주화를 이루자는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이후 모란공원에는 많은 노동열사를 비롯해 사회 각계의 누적된 모순과 싸우던 이들이 안장되었다. 수은 중독으로 15세 당시 입사 2개월 만에 사망한 문송면 열사, 백골단의 학생운동 폭력 진압으로 사망한 김귀정 열사, 원진레이온에서 근무하다 얻은 직업병으로 사망한 김봉환 열사와 고정자 열사 등 숱한 이가 이곳에 묻혔다.
평생을 통일운동에 전념한 문익환 목사, 정부의 강경한 노점상 철거에 맞서 싸우다 위법적 공권력 행사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이덕인 열사, 항일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평생을 바친 계훈제 전 <사상계> 편집장, 효순이미선이 사건 당시 시민운동을 이끌다 귀가 도중 의문사한 제종철 열사, 레미콘 노동자 노동권 보장을 위해 사측과 협상 도중 사측이 고용한 대체차량에 치어 사망한 김태환 열사, 한미FTA 반대를 요구하며 분신한 허세욱 열사 등 숱한 이가 이곳에 묻혔다. 정권의 폭력적 철거에 맞서다 용산 남일당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숨진 이상림·양회성·한대성·이성수·윤용헌 열사는 나란히 이곳에 묻혔다. 민청련 사건으로 군부의 살인적 고문을 받았던 김근태 전 국회의원도 이곳에 묻혔다.
모란공원이 일방적으로 주입받은 화장한 한국의 얼굴이 아닌,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역사의 장인 셈이다. 이창훈 추모연대 집행위원장은 "모란공원은 자연스럽게 조성된 민주열사 묘역"이라며 "권력의 인위적 조성이 아니라, 시민의 열망이 만든 일종의 성지"라고 강조했다.
언제까지 시민 손으로 관리를...
그간 민주열사 묘역은 그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관리가 쉽지 않았다. 유가족을 중심으로 한 각 열사 추모단체가 개별적으로 개별 묘를 관리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어디에 묻혔는지 확인키도 어려웠다. 추모연대 등 여러 단체가 민주열사 묘역을 전반적으로 관리했지만, 인력과 자금의 부족으로 한계가 있었다.
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때는 2013년이다. 최재성 의원 등이 주도해 지역구 예산 2억 원을 관리에 투입했다. 묘역을 크게 가로지르는 이동로가 시멘트로 포장되고, 약자의 이동을 돕기 위한 손잡이가 이동로에 설치되고, 주요 묘소를 안내하는 나무 표지판이 설치된 게 이 때다.
이창훈 집행위원장은 "예전에는 길이 전부 흙이라,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노약자는 이동조차 어려웠다"며 "그나마 지금은 예전에 비해 민주열사를 찾기가 쉬워진 셈"이라고 말했다.
유가협 등 각 단체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이 매월 둘째 주 일요일마다 전반적인 묘역 관리에 나선 때도 2013년이다. 이에 따라 개별 열사 묘역이 따로 관리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민주열사로 확인된 이들의 묘역이 함께 관리되고 있다. 묘역 관리자를 위해 공원 입구에 컨테이너 박스가 세워진 것도 이 즈음이다. 자원봉사자들의 주요 업무는 묘역 잔디 관리, 이동로 관리, 표지판 관리 등이다.
하지만, 더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해 보였다. 안내 책자 비치대는 외력으로 추정되는 힘에 의해 찌그러져 있었고, 안내 책자는 모두 바닥났다. 일부 나무 표지판은 이미 썩어 조금만 손을 대도 흔들렸다. 한편으로 크게 기운 표지판도 눈에 띄었다.
개별 민주열사 묘역에는 그들의 행적을 간략히 소개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일부 표지판은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훼손한 듯 부러져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후 사망해 이곳에 묻혔음에도, 자원봉사단 관리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이가 여전히 많다는 데 있다. 통상 민주열사는 매년 6월 열리는 범국민추모제에서 확인하는 민족민주열사 안장 명단에 들어간 이로 구성된다. 이 명단에 든 이 중 모란공원 묘역에 묻힌 이의 묘지가 자원봉사자들의 관리 대상이다. 하지만 유가족 중 이 절차를 모르는 이는 서류신청이 필요하다는 절차조차 알기 힘든 게 현실이다.
이창훈 집행위원장은 "그나마 노동열사는 상급 단체 등이 추모사업회를 꾸려 관련 절차를 밟아주기에 괜찮지만, 개별적으로 우리 사회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가신 이의 유족은 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여기 묻힌 이 중에도 실제로는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음에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가 많다"고 말했다.
이제 기념관 건립을 논할 때
무엇보다 유가족 단체는 모란공원의 상징성을 후대에 더 적극적으로 알릴 방안을 우리 사회가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 아니냐고 묻는다.
모란공원은 사설묘지여서 민주열사와 일반 안장자의 무덤이 혼재되어 있다. 이미 묘역이 꽉 차, 더 많은 이를 받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일부 민주열사의 묘지는 이동로에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이 문제는 단순히 공권력의 힘으로 해결하기란 어렵다. 묘지란 기본적으로 함부로 손대선 안 되는 공간인 데다, 이런 혼재성이 역설적으로 모란공원이 시민의 자발적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임을 알리는 상징성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가족 단체는 모란공원의 상징성을 살리되, 무엇보다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 장소인 이곳의 의의를 시민에게 더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안을 범정부 차원에서 논의해주기를 원했다. 구체적 대안으로 이들이 요구하는 안이 기념관 건립이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은 "모란공원을 비롯해 전국에 산재한 민주열사 묘역은 그 어느 곳보다 한국 현대사를 생생하게 공부할 수 있는 장소"라며 "궁극적으로 모란공원 기념관을 설립해 시민 누구나 이곳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의의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제화된 묘역보다, 살아있는 역사인 이곳에서 청소년이 우리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며 "자라는 세대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가장 좋은 곳이 모란공원"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정부는 과거 기념관 설립을 검토한 바 있다. 모란공원 입구에 위치한 모란미술관을 정부가 매입한 후, 이곳을 추모시설로 바꾸는 방안이다. 당시 정부는 약 200여억 원의 사업비가 소요될 것으로 봤다. 하지만, 일반 묘역이 민주열사 묘역과 섞인 만큼 당시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와 관련해 최근 유가협, 추모연대 등 민주열사 관련 단체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모란공원 재정비 방안을 마련해 다시금 정부에 관련 논의를 이어줄 것으로 요청할 예정이다.
이창훈 집행위원장은 "엄밀히 말해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은 관리가 어렵다기 보다,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대통령을 비롯해 주요 민주계 정치인이 찾는 곳인데, 그에 걸맞은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올해로 시민의 힘으로 군부 독재를 끝내고 민주화 체제를 이룩한 지 30년이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기를 위해 시민이 흘린 피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선거권 획득이라는 중대한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민주화의 의의를 상징할 모란공원은 더 큰 관심을 원한다.
민주화의 상징 묘역들모란공원 외에도 전국 각지에 한국 현대사의 상흔을 보여주는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먼저 손꼽을 곳은 광주 망월동 구 묘역(3묘역)이다. 망월 구 묘역은 5.18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상징성을 얻었다. 1980년 신군부는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숱한 이를 학살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이 사건의 희생자 상당수가 망월 묘역에 묻혔다. 이후 이곳은 80년대 학생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광주에 빚을 진 숱한 민주화운동가들이 망월동을 찾았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망월동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민주화 운동이었다. 전두환 정권 당시는 유족마저 망월동을 방문하기 어려웠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망월 구 묘역에서 추모제를 열었다는 이유만으로 징역형을 살았다.이후에도 숱한 민주 열사가 망월 구 묘역에 묻혔다. 이한열 열사가 대표적이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한열 열사는 사후 망월 구 묘역에 묻혔다. 1991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다 숨진 강경대 열사도 망월 구 묘역에 안장됐다. 경찰의 물대포로 인해 숨진 백남기 열사도 망월 구 묘역에 안장됐다.망월 구 묘역은 최근까지도 접근이 쉽지 않은 공간이었다. 지난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곳을 찾을 당시 8000여 명의 전투경찰이 망월동 인근을 에워싸, 구 묘역을 참배한 후 신 묘역으로 이동하던 유족을 막았다. 현재 구 묘역에는 민주열사 묘지 40여기와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149명의 가묘가 조성돼 있다. 본래 망월 구 묘역에 있던 5.18 희생자들의 묘소는 1997년 신 묘역이 완성된 후 그곳으로 이장됐다. 신 묘역은 2002년 국립 묘지로 승격됐다.경남 양산 솥발산 공원묘역은 한국의 대표적인 노동열사 묘역이다. 경남 일대는 중공업 단지가 밀집된 탓에, 일찍부터 노동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 상당수가 솥발산 공원묘역에 묻혔다. 이곳이 ‘노동운동의 성지’가 된 까닭이다.2003년 사측의 탄압에 항의하다 살인적 손배소에 짓눌린 끝에 분신한 배달호 열사가 이곳에 묻혔다. 배달호 열사의 죽음은 형식적 민주화가 완성됐다 여겨진 당시 사회에 직장 민주화가 여전히 요원함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이후 노동운동가와 싸우던 주요 회사는 가장 손 쉬우면서도 잔인한 무기로 손배소를 꺼내들어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현재 이곳에는 노동열사 30여 명이 묻혀 있다.'보수의 성지'로 알려진 대구에도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 대구 현대공원 묘역이다.현대공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 악명 높았던 인민혁명당 사건 희생자들의 유해가 남은 곳이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의 유신에 반대하리라 점찍은 인물들을 증거 없이 연행해 대법원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유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 속칭 인혁당 사건으로 불리는 인민혁명당 사건이다.이 사건으로 도예종 삼화토건 회장, 여정남 전 경북대 학생회장, 서도원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김용원 경기여고 교사 등 8명이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현대공원에는 인혁당 희생자 8명을 비롯해 민주열사 17명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이들의 죽음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음을 발표한 후, 2007년 정부가 희생자 유가족에게 245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뒤늦게 바로 잡혔다. 인혁당 사건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희생자 유가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 재조명되기도 했다.이처럼 전국 각지에 자리한 민주열사 묘역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의 성지로 자리 잡게 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마석 모란공원과 대구 현대공원, 양산 솥발산 묘역은 지금도 사설 묘지다. 망월 구 묘역은 현재 광주광역시가 관리하는 시립묘다.민주열사를 모시는 유일한 국립 묘역은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있다. 지난 2001년 민주공원 묘역 사업이 결정된 후 수년 간 적절한 후보지를 물색하던 정부는 2007년 12월 이천시 모가면 공원로를 최종 부지로 확정했다. 이후 2016년 6월, 총예산 497억 원을 들여 시공한 국립 묘역을 개원했다.이곳에는 90년대 초반 학원 민주화와 노태우 정권 타도, 노동 해방 등을 요구하며 민주화 이후에도 학생운동이 이어지게끔 산화한 강경대 열사를 비롯해 민주열사 56명이 안장되어 있다. 전체 안치 규모는 136기다. 일정한 조건에 부합하는 국가 인정 사망자만 안장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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