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2007년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박근혜 전 대표가 장준하 선생 유가족에게 사과를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박 전 대표가 누구에게 어떤 사과를 했나?"
"어머니에게 했다. 사실 그 전부터 박근혜 씨 주변 사람들이 여러 차례 저에게 접촉을 해 왔다. '박근혜와 차 한잔 마시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나는 어떻게 보면 박근혜도 나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박근혜가 무슨 죄가 있느냐. 독재자의 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을 뿐이지, 장호권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 사회에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느냐. 단지 장준하라는 딱지가 하나 붙어있기 때문이지' 이런 생각이었다. 박근혜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부모가 있다. 아무리 그(박정희)가 국가의 반역자, 역사의 죄인이라고 해도 인간적으로는 애비와 딸인데, 불쌍하다."
▲ 故 장준하 선생의 장자, 장호권 씨. 장 선생 생전에 비서를 지내기도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박근혜 전 대표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박근혜가 조용하게 국민에게 헌신하고 봉사하고 멋있게 정치를 한다면 감싸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박 전 대표를 직접 만나지 않았나?"
제게 평소에 고맙게 해준 정치인 중에 박근혜 씨 손을 들어준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박근혜를 만나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다. 나는 '(만날 용의는 있지만) 이 시점에 만나는 것은 결국 표 때문 아니겠냐. 삼척동자도 다 알텐데 진정성이 없지 않나. 이용하려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계속 부탁하길래 '나는 안 만난다. 어머니를 만나 어머니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그날 누가 누구와 만난 것인가?"
"박근혜와 저의 어머니, 그리고 중간에 다리를 놓은 사람과 이혜훈 의원이 왔다. 저는 그 시간에 여의도에서 <MBC>와 기자회견을 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뭐라고 사과했나?"
"과거 자기 아버지 때 일어난 일, 장 선생님이 고생한 것을 사과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정치적인 요식행위가 아니라 진정성을 갖고 정치를 해라.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다오.' 이렇게 당부 말씀을 하셨다."
"잘 만났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과거에 얽매어 살면 끝이 없다. 저 자신부터 컨트롤하려고 한다. 그 힘들고 어렵고, 정말 한이 많은 과거를 용서는 해 주자. 그러나 잊지는 말아야 한다."
"박근혜 전 대표를 만나고 나서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셨나?"
"(심경이) 복잡하셨는데, 어떻게 느꼈냐고 여쭤봤더니 '얘가 닳고 닳은 정치인은 아닌 것 같더라', '속내는 모르겠지만 요새 정치인들 같지는 않더라'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도 천주교 신자고 박근혜도 천주교 신자다. 그런 믿음을 통해 보셨던 모양이더라. 더구나 같은 여자고 인간적으로 (박근혜도) 험한 생을 살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얘가 (박근혜가) 처신을 잘 해야 할 텐데. 잘 했으면 좋겠다'고도 말씀하셨다."
"박근혜 전 대표가 잘 하는 것 같나?"
"글쎄... 잘 해야 되겠죠. 여담이지만 박근혜 씨 옆에 있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본다. 하나는 속물들, MB도 마찬가지지만 (MB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놓고, 자기의 아성을 만들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하나는 과거 박정희 시대 때 기득권을 갖고 세상을 호령했던 사람들, 다시 한 번 권력을 갖고 해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 둘 다 불건강하다. 건강한 사람은 박근혜 옆에 별로 없는 것 같다. 정말 한 두 사람, 박정희를 떠나 인간 박근혜를 보고, 인간 박근혜는 미래에 뭘 좀 할 수 있겠다고 보고 있는 사람들은 정말 한 두 사람 정도인 것 같다. 그러니까 박근혜 씨가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되도, 이 나라를 옳게 끌고 가기는 힘들지 않겠나?"
"박근혜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될 것 같나?"
"이 상태로 나가면 가능성이 높다. 우리 야당들, 시시콜콜 할 얘기가 많은데, 한 마디만 하겠다. 정말 획기적으로 정신 차리지 않는다면 정권 교체는 힘들 것 이다."
"장 선생님 돌아가신 소식 전한 사람 멱살을 잡고…"
▲ "그 때 감이 딱 왔다. 돌아가셨구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 사람 멱살을 잡고 '당신 누구야'라고 했다. 그 사람이 '등산 갔다가 보고 온 사람이다. 내가 안내를 하겠다'고 하더라." ⓒ프레시안(최형락) |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얘기를 하는 동안 장호권 씨는 힘들어했다. 아버지 대의 악연과 비극을 넘어 용서와 화해를 한다는 것이 그 어려운 세월을 온 몸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어찌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이미 35년이나 지난 일이건만 1975년 8월 17일을 장호권 씨는 어제 일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장준하 선생이 1975년 8월 17일 돌아가셨을 때 몇 살이었나?"
"스물일곱 살이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어땠나?"
"처음에는 사고를 당하셨다고 들었다. 장 선생님이 산행을 다니실 때는 제가 꼭 모시고 다녔었는데, 전날인 토요일날 장 선생님이 '내일 산에 안 가겠다'고 하셨다. 아주 더웠는데, 산행을 안 가고 집에 있겠다고 하셔서 나는 애들을 데리고 물놀이를 갔다. 물놀이 중에 연락이 왔다. 산에 가셔서 다쳤다고. 급히 짐을 싸서 집으로 왔는데 이미 정보기관원들이 집에 와 있더라. 아는 얼굴들도 보이고. 아무래도 이상했다. 어머니는 이미 사고 현장으로 떠나셨더라. 직감적으로 '아, 뭔가 크게 잘못됐구나' 느꼈다. 그 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이름도 안 밝히고 만나자고 해서 동대문 근처 호텔에 가서 만났다. 등산복을 입고 있더라. 나를 금방 알아보고서 담배 한 대를 주더라. 내가 '왜 저한테 담배를 주십니까' 했더니 '놀라지 마십시오' 하더라. 그 때 감이 딱 왔다. 돌아가셨구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 사람 멱살을 잡고 '당신 누구야'라고 했다. 그 사람이 '등산 갔다가 보고 온 사람이다. 내가 안내를 하겠다'고 하더라."
"'돌아가셨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났나?"
"'올 게 왔구나', '차라리 감옥소에서 돌아가시지. 기왕 이렇게 된 것' 하는 생각이 퍼뜩 났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 집에 돌멩이가 날아오고 그랬다. 유리창이 깨지고. 왜 그랬는지 안다. 한 달 전쯤인 7월 말에 YS, DJ, 함석헌, 유진오 선생과 함께 5자 회담을 해서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장 선생이 총대를 메라'는 얘기들이 있었다. 그래서 광복절을 맞이해 본 모임을 하기로 했는데 무산이 됐다. (장준하가 모종의 모임을 기획한다는) 그런 말이 새 나간 것이다. 그 직후 청와대 있었던, 장 선생님을 따르던 작은아버지 친구 분이 '몸조심하시라'는 얘기를 전해왔다."
"돌아가시기 전에 주변 정리를 하셨다고 하던데, 운명을 예감 하셨던 걸까?"
"예감을 하셨겠죠. '아 내가 잘못될 수 있겠다'는 것을 느끼시고 주변정리를 하셨던 것 같다. 임시정부 시절의 국기도 이화여대에 기증하고 또 어머니를 위해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옮기셔서 혼배성사를 해 드렸다. 박정희와 극단의 싸움을 준비하면서 그런 정리를 한 것 아니겠나."
장준하와 박정희, 지독한 악연…"박정희가 보낸 대령 귀싸대기를…"
장호권 씨와의 인터뷰는 2시간 넘게 이루어졌다. 그는 어떤 질문을 하든 '얘기하자면 길다. 2박 3일은 해야 한다'면서 한숨부터 쉬었다. 그만큼 한이 깊었다. 그가 이만큼이라도 이야기를 하는데에는 3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굉장한 악연이었던 것 같다."
"장 선생님과 박정희는 전혀 모르는 사이다. 광복군 할 때도 전혀 몰랐다. 다만 장 선생님이 일본군에서 탈출할 때 '일본군 장교로 나라를 배신하고 광복군을 때려잡는 그런 장교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알고 계셨다."
▲ 박정희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는데, 박정희가 사람을 보냈다. <사상계> 사무실이 종로 5가에 있었다. 계급장을 달고 왔는데 대령 정도 된 것 같았다. 뭘 하나 건넸는데 장 선생님이 (대령이) 보는 앞에서 쫙쫙 찢고 귀싸대기를 때렸다. 모자가 휙 돌아갔으니까. ⓒ프레시안(최형락) |
"당연하다. 일본 정규 육사로 가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육사라는 곳은 조선인 신분을 포기해서 일본인이 돼야 가는 곳이었다. 박정희는 진충보국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고, 나를 죽여 나라를 받들겠다)이라고 혈서를 썼다. 학교 교장이 '이 사람은 조선인이 아니고 일본인'이라고 추천을 해서 들어갔다. 그러나 박정희가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장 선생님은) 나중에 알았다. 장 선생님이 박정희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남로당 사건 때였다. 오제도 검사가 장 선생님에게 이런 의논을 했다. '박정희는 국가를 배신했고, 민족을 배신했고, 자기 동료까지 배신했다. 이런 자는 안 된다.' 육군 특무대에서 사형을 시키려고 했는데 배신해서 박정희가 살아남았다. (장 선생님이) 그 때 박정희라는 이름을 알았다. 그러나 별로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자가 있구나'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쿠데타 전이니까. 그런데 쿠데타가 일어나고 나서 그 주모자가 박정희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아, 그 사람이 일으켰구나.' 했다. 쿠데타 직후 '군사 쿠데타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한국일보>에서 대담을 했는데 '(민정으로) 돌아갈 것이다. 돌아가야만 한다'고 했다."
"쿠데타 직후에는 장 선생님도 긍정적인 평가를 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그랬다. 당시 사회가 그런 꼴이었다. 그래서 질서를 바로 잡을 필요는 있는데 질서 잡고 나서는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박정희가 안 돌아가고 정권을 잡으니까 '봐라. 이것이 본색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 때부터 박정희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으로 했다. 당시 재미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박정희가 사람을 보냈다. <사상계> 사무실이 종로 5가에 있었다. 계급장을 달고 왔는데 대령 정도 된 것 같았다. 뭘 하나 건넸는데 장 선생님이 (대령이) 보는 앞에서 쫙쫙 찢고 귀싸대기를 때렸다. 모자가 휙 돌아갔으니까. 박정희와는 그렇게 끝났다. 박정희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제스처를 취했지만 전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장 선생님은 광복군 활동을 할 때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전략 정보국, CIA의 전신) 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친미주의자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좋아하지만 미국의 정부라거나 정치인들이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사고는 아주 싫어한다. 장 선생님도 그러셨다. 장 선생님이 광복군에 있을 때 OSS훈련을 받았다고 친미라고 하는 건 넌센스다."
"이념적으로 좌파는 아니었나."
"절대 아니었다. 장 선생님이 통일 문제라는 주제를 놓고 그 시각으로 민족을 다루기 시작하면서부터 '좌파'로 몰아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장 선생님은 '통일에는 좌우가 없다. 민족통일에 왜 좌우가 필요하느냐. 이것은 지상 명령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삼아 정치 권력을 나눠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지 통일에는 좌우가 없다'고 했다. 박정희가 한 번은 장 선생님을 공산주의로 몰려고 간첩을 하나 연결시키려다 망신을 당했다."
"그게 언제쯤인가?"
"장 선생님 돌아가시기 3년 전 쯤이었다. 그런 음모를 꾸미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포기했다. 장 선생님은 박정희 시대 때 '밀수의 왕초'라는 발언을 해서 대통령 모욕죄 보안사에 끌려간 적도 있다."
"어떤 주장을 했나?"
"삼성 소유 한국비료주식회사의 사카린 밀수 사건은 이병철이 하수인이고 박정희가 몸통이다. 그래서 장 선생님이 박정희는 '밀수의 왕초'라고 했다. 국가원수모독죄로 보안사에 끌려갔는데, 3일 만에 모시고 가라고 해서 갔더니 별자리(장군)들이 장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더라. 그 안에서 무식한 아이들이 장 선생님을 때리려고 하자 장 선생님이 '내가 독립군 대위 출신인데, 일본의 충견이었던 박정희의 졸개한테 맞을 수 있느냐'며 아이들을 되려 때리려 했다고 하더라. 그 얘기를 위에서 듣고, 한 고위 관계자가 '그 말이 맞다'고 하면서 장 선생님을 내보내줬다는 것이다. 모독죄로 들어갔다가 고문도 안 받고 나왔다. 나중에 검찰에 송치돼 구속은 됐지만."
▲ "검시를 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김준엽 선생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해 하지 못했고, '의문사,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 했다. 정황은 분명한데..." ⓒ프레시안(최형락) |
"몇 번 구속됐었나?"
"4번 구속됐고 수형 기간은 합치면 한 1년쯤 될 거다. 장 선생님이 협심증이 있었다. 그래서 구속상태로 백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장 선생님 죽음과 관련해 조사를 하지 않았나?"
"했다. 조사관에 현직 검사들, 젊은 검사들이 배치됐다. 내가 만나봤는데 검사들이 '조사권밖에 없어서 규명이 어렵다'고 하더라. 박정희 식으로 몇 대 때리면 다 나오겠는데, 세상이 바뀌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검시를 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김준엽 선생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해 하지 못했고, '의문사,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 했다. 정황은 분명한데."
"75년에는 사고사가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고, 20년 지나서는 의문사로 성격이 바뀐 것인가?"
"그렇다."
한반도의 미래 걱정한 장준하…"통일은 지상명령이다"
장호권씨는 아버지 장준하 선생의 죽음과 의문사 조사 부분을 얘기할 떄는 의외로 담담했다.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인물, 역사가 되어버린 사건이라 '거리 두기'가 가능해진 것인지….
"장준하 선생의 사상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딱 한가지다. 민족주의다. 저도 그 분의 사상을 나름대로 공부해 봤지만, 결국은 한반도가 미래에 어떻게 존재할 것이냐. 그것이 제일 중요한 관심이었다. 미래 한반도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통일은 지상명령이다. 어떤 형태든 통일이 돼야 한다."
"김구 선생과 장준하 선생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됐나?"
"장 선생님이 일본군을 탈출해 중경 임시정부로 갔다. 임시정부에서 만찬을 하는데 장 선생님이 대표 연설을 했다. 젊은 사람들이 어렵게 임시정부로 왔는데, 각료들이 당을 하나씩 갖고 있더라. 도망 온 학생들을 서로 끌어들이기에 혈안이 돼 있고, 나라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서 합쳐서 싸울 생각을 안했다. 그래서 25살 도망병 (장 선생)이 어른들 앞에서 '이런 꼴 보려고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가 왔다면 차라리 돌아가 일본군에 가서 비행기 조종을 배워 임시정부를 폭파시켜버리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김구 선생님이 눈물을 흘렸다. 김구 선생님이 장 선생을 비서로 뒀는데 신학대학을 나온 장 선생을 꼭 목사라고 불렀다."
▲ 25살 도망병 (장 선생)이 '이런 꼴 보려고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가 왔다면 차라리 돌아가 일본군에 가서 비행기 조종을 배워 임시정부를 폭파시켜버리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김구 선생님이 눈물을 흘렸다. ⓒ프레시안(최형락) |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어떤 사업을 하나?"
"장 선생님의 젊은 시절의 민족관, 20대 때 가졌던 국가관을 기리고 있다. 대학생들을 한 번에 100명 씩 매년 1회 뽑아서 10박 11일간 일본군에서 탈출했던 경로를 탐사한다."
"정치인들도 같이 갔던 것 같은데?"
"국회의원도 많이 왔다.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도 왔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가서 감탄만 하고 만다. 당시 일본군 진영이 청도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탈출을 해 중경 임시정부까지 가는데 거리가 6000리다. 밤에는 걷고 낮에는 숨고. 6000리 길을 걸었다. 탈출 할 때 5명이 탈출했는데, 가면서 계속 모아서 도착한 게 56명이다."
"이번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장 선생님 저서인 '돌배게'를 샀다. 아직 서점에서 책이 팔리더라. 40년 전에 쓴 책인데, 도서관이 아니라 시중에서 팔리더라. 놀랐다."
"그 책을 읽으면 끝까지 보게 된다. 재미 있다. 장 선생님이 쓴 것은 그것 딱 하나밖에 없다. 해방되고 들어와서 이 나라에 소위 광복 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변질돼 가는 것. 친일파들이 파티를 열어주면 기생들과 술 먹고 춤추면서 정체성을 잃어버려 가는 것 등을 한탄하며 썼다."
"돌베개가 무슨 뜻인가?"
"성서에 나오는 말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찾기 위해 광야로 떠나 돌베개를 배고 잔다. 장 선생님이 결혼한 지 1주일 만에 일본군에 끌려갈 때 모친에게 '내가 끌려가면 일본군에서 탈출할 것이다. 탈출하기 전에 내가 편지를 보낼 텐데, 그 안에 성경 구절이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암호를 주고 갔다. 그리고 탈출하기 전에 편지를 모친에게 쓰면서 '내가 광야에서 돌베개를 찾는다'는 구절을 넣었다. 그걸 보고 저희 모친이 '아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 때 쓴 돌배게라는 구절을 책에다 썼다."
"돌배게가 많이 나가나?"
"그렇지 않다. 찾는 사람은 찾는데, 책방에 두 세 권뿐이다. 저는 그 이후, 그러니까 5.16 나고 장 선생님 돌아가실 때까지 책을 쓰고 있다. 그 부분은 제가 잘 아니까."
"언제쯤 출간하나?"
"연말쯤으로 계획하고 있다."
"김종필 씨, 죽기 전에 꼭 한번 얼굴을 보고싶다"
"그 동안 어디서 살았나?"
"장 선생님 돌아가시자 집안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가장이 없어졌다. 방향을 잃었다. 생활하는데 십 원 한 장 없고, 쌀 한톨 없었다. 제가 왜 박정희에 대해 더욱 한을 가지고 있느냐. 막말로 (장 선생이) 정적이다. 정적이 없어졌으면 끝내야 되는데, 왜 그 나머지 가족들까지... 장자인 내가 그렇게 심하게 정치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집안을 (기관원들로) 뺑 둘러쳐서 출입을 못하게 했다. 김옥길 여사(전 이화여대 총장)가 보다 못해 지게꾼에 쌀가마 지게 하고 와서 밤중에 담장으로 던졌다. 쿵 하고 쌀 한가마니가 집안으로 들어왔는데 그것으로 한 달 먹고 살았다. 김옥길 총장은 그것 때문에 김종필에게 불려갔다는 것 아니냐. 김종필이 '당신 유신에 반대한다며' 그래서 김옥길 여사가(전 이화여대 총장) '쌀 한가마니 던져주는 게 유신에 반대하는 것이냐'고 했다고 하더라."
▲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 저는 동남아로 도망 나갔다. 뿔뿔이 헤어진 지 36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모두 모인 적이 없다. 언젠가는 한 번 다 모여야 하지 않겠나…." ⓒ프레시안(최형락) |
"김종필 씨를 따로 본 적이 있나?"
"없다. 김종필 씨 죽기 전에 꼭 한 번 얼굴을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다."
"한국에서 생활하기 어려워서 나가 있었나?"
"가족이 풍비박산이 난 뒤에 제 밑에 남동생이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 쫓겨났다. 여동생 둘이 이화여대를 다녔고, 그 중 한 아이가 총학생회장이었는데 입을 줄이려고 졸업하자마자 얘들을 다 시집보냈다. 밑에 남동생은 백수 생활을 하고 있었고, 막내는 신학교에 보내 목사가 됐다. 막내는 지금도 미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 저는 동남아로 도망 나갔다. 뿔뿔이 헤어진 지 36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모두 모인 적이 없다. 언젠가는 한 번 다 모여야 하지 않겠나…."
"기구하다."
"제가 좀 안정이 되면 장준하 선생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 짐을 좀 덜고 싶다. 누구는 나보고 숙명 아니냐고 하는데, 그래도 그렇지, 이제는 장 선생님의 짐을 내려놓고 내 삶을 좀 살고 싶다. 제가 이 나라에서 야반도주 할 때가 30대다. 50대가 돼 돌아왔다. 나에게는 젊은 시절이 없다."
"한국을 왜 떠났나."
"장 선생님 돌아가시고 나서 테러를 당했다. 제가 유엔하고 미국에다 매일 성명서를 보내고 하니까. 4월 19일이었다. 기자들과 술을 먹고 들어가다 보안사 애들을 만나 테러를 당했다. 경희대 의료원에서 6개월을 보냈다. 하비브 전 미국대사가 나를 보러 오겠다고 하니까 경희의료원이 기관원들에게 뺑 둘러 쳐졌다. 그것을 보고 내가 '장 선생님도 죽였는데 나 같은 것이야'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그 날 밤에 도망을 쳤다. 20년 동안 외국에 있었다. 처음 도망갔을 때는 힘들게 나갔다. 엉터리로 서류를 만들어서 도망갔는데, 도움 받은 몇 분이 있다. 도와준 분들이 나중에 곤욕을 치렀다고 하더라. 말레이시아에 가서 3년 있다가 박정희가 죽었다고 해서 '됐다'하고 들어왔는데 전두환이 들어서서 재야 운동한 학생, 지도자 잡으라고 해서 또 도망갔다. 5년 전에야 들어왔다."
"<사상계> 맥 잇고 있다…언론은 내 삶의 일부분"
"장호권 선생도 언론인인가?"
"그렇다. 언론은 내 삶의 일부분이다. 몸에 뱄다. 조그마하지만 <사상계>를 해 나가고 있다."
"지금도 <사상계>를 하나?"
"인터넷으로 나온다. 인터넷은 잡지라기보다는 뉴스 위주로 간다. 오프라인 종이지가 나온다. 판매는 안하고 정기구독을 한다. 지금 정기구독자가 1200명 정도 된다. 광고도 안하고 (서점에서) 팔지도 않으니까, 입소문으로 인터넷 보고 신청을 하면 보내주는 것이다."
"당시 <사상계>가 몇 부나 나갔나?"
"한창 나갈 때는 일간지가 8만 부 나갈 때 11만 부가 나갔다. 그래서 낙양의 지가를 올린다고 했다. 그것을 박정희가 세무 사찰을 연속 세 번을 해서 뺏어갔다. 장 선생님이 저희 가족을 위해 지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집이 연세대 앞 창천동에 있었다. 7년에 걸쳐 집을 지었는데, 1개월 살고 이 집도 뺏겼다. 그 이후로 저희는 정확히 39번을 이사 다녔다. 아직까지 집이 없다. 무능하다는 소리는 하기 싫고 '(장 선생님) 유지를 받아서 집을 장만하지 않았다'라고 한다.(웃음)"
"본인이 아들임에도 아버지를 '장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어릴 때부터다."
"문성근 씨가 아버지 문익환 목사님을 문 목사님이라고 하는 것을 봤다. 왜 그렇게 부르나?"
"장 선생님이 솔직히 '수신제가(修身齊家)'는 안 하셨다. 그렇다 보니 (나도 어릴 적) 만나 뵐 기회도 별로 없었다. 장 선생님이 6.3세대(64년 한일회담 반대를 위한 6.3시위에 참여했던 세대)들과 모여 토론을 하는데, 그 학생들에게도 꼭 김 선생, 이 선생 그랬다. 학생들을 굉장히 존중해줬다. 내가 그 분(장준하 선생)에게 배운 것은 누구든 미성년을 벗어나면 존중해야 한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조건 하대하면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동료들도 또 저와 친구가 아닌 6.3동지들, 이부영 씨(전 열린우리당 의장) 같은 3~4년 선배들도 저에게 선생님, 선생님 그랬다. 그래서 저도 아버지라고 불러본 경험이 별로 없다. 맞대놓고는 호칭도 못 해봤으니까."
"문성근 씨는 알고 지냈나?"
"잘 안다."
"장준하 선생과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이 친구였다. 친구들의 자제들이니까 어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인가?"
"어릴 때부터 안다. 교류는 별로 없었다. 장 선생님이 두 가지 모임을 했는데, 하나는 한길회였고, 또 하나는 복음동지회였다. 복음동지회는 기독교 관계 사람들이고, 한길회는 장 선생이 훗날 수권을 위해 만든 모임인데, 유창순 씨, 오제도 검사, 이런 사람들이 40~50명 포진해 있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하고 난 뒤에 거기에서 다 뽑아갔다. 문익환 목사님은 복음동지회 멤버였다. 복음동지회는 현실정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순수한 기독교 모임이었고, 친분관계 위주였다."
"세 분이 실제로 친했나?"
"이북에서 같은 학교도 다니고 친했다. 문 목사님하고는 교류를 많이 했다. 당시만 해도 문 목사님은 아주 순박한 시인이고 목사님이었다. 그런 목사님이 장 선생님 돌아가시자 그렇게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를 했다."
▲ 고성국 박사와 장호권 씨 ⓒ프레시안(최형락) |
이 인터뷰는 지난 10월 14일 오후 여의도 카페에서 진행됐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녹취록의 절반쯤을 들어냈다. 더러는 너무 오래된 얘기라서 들어냈고 몇몇 부분은 너무 개인적인 얘기라서 뺐다. 한 두 대목에서는 장호권 씨가 실명으로 얘기하길 망설여서 넘어가기도 했다. 필자의 정리, 편집으로 장준하 선생의 발자취와 그 가족들과 장호권 씨가 견뎌온 인생역정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한다. 장호권 씨와 어머님 김희숙 여사의 건강을 기원드린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