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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에는 '근원적 동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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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혁신에는 '근원적 동기'가 필요하다

[민미연 포럼] '혁신'을 이끄는 견인차, '안정'

사랑하는 아내가 즐기는 최고의 사치품은 커피다. 난 커피 맛을 모르는 저렴한 입맛을 가졌지만, 아내는 다르다. 좋은 커피로 위로를 받고 삶에 연료를 넣는다. 넉넉지 않은 살림을 무릅쓰고 일정 수준 이상의 커피를 원활히 보급하기 위해, 아내는 스위스에 본사를 둔 모 업체의 중저가 캡슐형 커피머신을 구입했다(이 회사에서 두 번째로 싼 거란다). 가격, 편의성, 맛 등을 면밀히 심사숙고해 이놈을 골랐는데, 우리 부부 입장에선 큰 맘 먹고 사치품을 들인 것이었다. 그래도 유명한 'ㅅ' 커피보다는 매우 싼 가격에 제법 괜찮은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아내는 흡족해한다).

혁신을 좁게 보았을 때, 저 스위스 기업은 소비력이 부족한 한국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할 만큼 혁신을 이룬 셈이다. 혹자들은 이를 슘페터형 혁신의 바람직한 사례요, 공급주의 경제의 미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수요와 소비를 창출하고 경쟁력과 고용을 제고한다는 측면에서 혁신은 중요하다. 이와 동시에 아무리 혁신이 꽃 피워도 소비자에게 소득이 불충분하다면, 수요와 소비가 충분히 만개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 고른 소득분포는 혁신 자체의 원동력일뿐더러, 혁신이 기도하는 고용증대 및 경제성장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종종 분배와 혁신을 대척점에 놓고 사고를 전개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낡은 이분법은 그들의 일부 바른말조차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다만, 분배의 질과 양에 따라 혁신을 추동하는 분배의 성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짚어둔다.

혁신을 향한 인간 본연의 원천 – 안정과 근원적 동기

서론은 이만 접고, 혁신의 주요한 견인차임에도 한국에 특히 부족한 요인인 '안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캐나다 윈저대학의 경제학과 서상철 교수는 혁신의 원천에 '근원적 동기'가 있음을 일깨워 준다. (이하의 내용은 서 교수의 책 <무한경쟁이 대한민국을 잠식한다>(지호 펴냄)를 상당 부분 인용한 것이다).

행동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을 끌어내는 동기는 세 가지로 나뉜다. 제1 동기는 식욕이나 성욕 등의 본능적 동기다. 제2 동기는 상이나 벌의 보상 동기다. 성적이 나쁘면 좋은 대학도 못 가고 저임금밖에 못 받으니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동기 부여다. 한국은 보상 동기가 지나치게 팽배하다는 문제가 있다.

복지선진국은 격차가 작아 보상 동기가 떨어진다. 평균 언저리 벌이만 하면, 세금과 복지를 통해 여유와 안정이 확보되기에 상과 벌이 촉진하는 보상 동기가 저하될 수밖에 없다. 저임금자의 급여 수준도 비교적 높은 데다 복지를 더하면 확연히 살 만하다. 실제로 더 많은 급여를 주는 고위직, 상위 관리직으로의 승진을 일부러 마다하는 풍토마저 있다. 그 같은 승진과 고소득은 노동 시간과 업무 강도를 가중시키므로, 그럴 바엔 현재의 고만고만한 수입과 다양한 복지 혜택에 만족하며 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네들도 열심히 밤을 지새우며 공부하는 학생과 과로를 자처하는 사회인이 있고, 창의적인 기술과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내놓는 기업(인)이 있다. 그렇게 안 해도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최소한의 생활 수준이 준수하고,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소득이 굳이 필요 없음에도 왜 그에 안주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하는 걸까? 게다가 수입이 소박한 이들이라고 해서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한국보다 월등한 합리적인 일 처리는 익히 알려진 바이다.

이것은 제3 동기인 '근원적 동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면, 그 행위 자체에서 작고 큰 기쁨을 얻을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다 알다시피 한국의 사회생활이란 참…. '자발적인 능률?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눈치 잘 보고, 정치 잘 하는 게 능률이지. 때려치우고 싶지만, 처자식 먹여 살리고 굶어 죽지 않으려면 그냥 굽실굽실 붙어 있어야지. 그렇게 송장 같은 사회생활의 와중에, 누가 돈을 더 주겠다는 확약이 없는데도 이건 이렇게 하면 좀 더 나은데…' 하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작은 사안일지라도 개선할 때가 있다. 그래서 효과가 있으면 사소한 거라도 그냥 기분 좋다. 심리학자 해리 하로우는 이를 두고 '행위 자체의 보상'이라고 명명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 같은 근원적 동기가 있고, 근원적 동기는 보상 동기보다 더 높은 능률과 효율을 가져온다. 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 실험을 보자.

ⓒ연합뉴스

원숭이

사람에 앞서 원숭이부터 살펴본다. 포도를 보상으로 주는 경우와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경우, 원숭이들은 동일한 행동을 함에도 포도를 줄 때 포도를 주지 않는 경우보다,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잘하지 못하면 포도라는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스트레스로 인해 원숭이의 능력이 저하된 것이다.

해고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마저 비일비재한 한국에서, 한국인이 받는 과중한 보상 동기 압박은 국가 전체의 역량 저하를 초래한다. 물론 높은 급여나 승진 탈락과 같은 신상필벌의 보상 동기는 능률 향상을 가져올 뿐 아니라, 의욕과 열정을 달궈준다. 우리는 또 보상 동기를 과도하게 억누른 체제의 몰락을 이미 목도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처럼 그것이 극심하면 불안과 걱정의 고압력으로 인해 사람은 사람대로 불행하고 효율은 효율대로 떨어진다.

어린이

다음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다. 아이들을 세 집단으로 나누고, 집단 A에는 그림을 그리면 상을 줄 테니 그렇게 할 건지 물어본 뒤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리기 작업이 끝나면 약속대로 상을 준다. 집단 B에는 아무 말 없이 그림을 그리게 하고, 예기치 못한 상을 준다. 집단 C에는 그냥 그림만 그리게 한다.

2주 후 아이들에게 그림 도구를 주고 자유롭게 놀도록 하자, 집단 A에 속했던 아이들은 집단 B와 C의 아이들보다 그림 그리기에 현저히 낮은 흥미를 보이며 가장 적은 시간을 할애했다. 보상 동기에 근거해 그림을 그렸던 아이들은 그것이 사라졌음을 인지하자 동기부여가 뚝 떨어지고 만 것이다.

보상 동기는 행위 자체에서 흥미를 얻고 보상을 받는, 인간 고유의 근원적인 동기 부여를 약화시킨다. 한국의 흔한 회사로 치면, 저건 뭐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나라도 하면 다들 좋긴 할 텐데, 그래 봤자 돈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닌데 누가 뭐라고 지적할 때까지는 아무도 안 하게 되는 현상이다.

하버드 경영대학 애머빌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직원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일에 대한 진전을 느낄 때인 것으로 나타났다. 애머빌 교수는 보상 등의 외적 동기부여는 창의성을 촉진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반면, 일 자체의 재미 등 내적 동기 부여는 창의성을 촉진시킨다고 지적한다.

대학생

대학생도 마찬가지의 행동 양태를 보여준다. 3일 동안 두 집단으로 나누어 조각 맞추기를 시키고, 집단 A는 보상을 주었다가 빼앗지만, 집단 B는 3일 내내 아무런 보상을 주지 않았다. 집단 B는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시간을 조각 맞추기에 할애하지만, 집단 A는 보상이 사라지자 흥미를 잃어버렸다. 이는 행위 자체에서 보상을 받아 능률을 올리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

올로프 팔메는 스웨덴 사민당의 정치인으로 1969년 43세가 되었을 때 선거 승리를 이끌며 총리에 취임한 인물이다. 그는 이른바 '고세금-고복'라고 불리는 조세-복지 형태를 어느 국가보다 앞서 제일 먼저 현실로 만들었고, 보편적 복지체제를 선도적으로 확립하는 한편 주당 40시간의 주5일제와 연간 5주에 달하는 유급휴가를 법제화했다.

팔메는 심리학자 매슬로의 욕구 피라미드를 참고하며, 매슬로가 구분한 인간의 욕구 중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하는 사회제도에 각별히 공을 들였다. 그는 사회가 자아실현의 욕구를 촉진하도록 (즉, 근원적 동기를 자극하도록) 설계돼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 정치인이었고, 이를 위해 풍부한 보편적 복지와 보편적으로 풍성하게 걷히는 세금 그리고 충분한 휴식과 안정 등을 중요시했다.

소소하거나 대단한 '혁신의 달인'을 무수히 배출하려면

SBS의 장수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에는 눈을 휘둥그렇게 하는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이 그렇게 대단한 능률을 올리면 돈을 더 주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달인 수준의 기발한 기술을 익힌 것은 아닐 것이다. 상식적으로 그런 혁신적인 방법의 발견과 숙달은 단지 돈을 더 받기 위한 목적을 추구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무언가를 개선했을 때 그 행위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기에 가능한 일이다.

작고 큰 혁신을 촉진하는 근원적 동기가 방송에서나 볼 수 있는 별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 충만하려면, 상과 벌의 보상 동기가 과도해지는 것을 막고 사회 전 구성원에 제도적인 안정을 보장해야 한다. 앞서 여러 실험에서 보았듯, 한국처럼 신상필벌 보상 동기에 편향된 사회는 인간 본연의 근원적 동기를 약화시키고, 이는 각종 비효율을 초래하며 다양한 혁신을 저해한다.

한국은 또한 미국 같은 나라의 극대화된 보상 동기를 따라잡기에는 체급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숱한 나라 중 하나다. 이것은 앞으로 한국이 '보상 동기형 혁신'을 소홀히 해서는 당연히 안 되겠지만, '근원적 동기형 혁신'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함을 말해준다. 더욱이 미국은 첨단 혁신 기업이 끝없이 쏟아진다는 자자한 칭송에도 불구하고 격차가 극심하고 여성 고용률이 OECD 중위권에 그치고 있어, 격차를 줄이고 특히 여성 일자리를 늘려야 할 한국의 입장에서 반면교사로 주의해야 할 국가이다. (한국의 남성 고용률은 최상위 국가들과 별 차이 없는 상위권에 있어 남성 일자리는 더 늘어날 여지가 그리 크지 않지만, 여성 고용률은 상위권 국가들과 큰 차이를 보이며 하위권에 있어 여성의 경제활동을 고양해야 할 필요가 매우 크다.)

세금과 복지의 혁신

지금까지 보편적인 안정 보장이 어떻게 사회 곳곳에서 소소하거나 대단한 혁신을 견인하는지 살펴보았다. 혁신의 견인차가 이것만은 아니겠지만, 한국에 긴요한 혁신의 요인으로서 사회적으로 전 구성원에 보장된 안정은 유독 취약한 대목이다.

안정을 제도적 차원에서 보편화하지 못하면, 자연히 자구적으로 그것을 획득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진다. 이 같은 세태에서는 상대적으로 안정을 확보한 이들조차, 그것을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잠식되고 불안감을 홀가분하게 떨쳐낼 수 없다. 이때 효율과 혁신을 고취시키는 근원적 동기가 억압되고, 효율과 혁신을 위축시키는 보상 동기가 확대 재생산된다. 이 같은 확대재생산의 편린 중 하나가 씁쓸한 공무원 열풍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안정의 보편화를 달성하려면 세금과 복지의 혁신이 필수다. 세금과 복지 부문이 획기적으로 발전해야, 심대한 격차와 불안을 해소하며 근원적 동기가 계발되고 다채로운 혁신의 기운이 가득 찬다. 우리가 가야 할 미래는 분명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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