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김장겸 문화방송(MBC) 사장 체포영장 발부를 계기로 시작한 정기국회 보이콧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여야정협의체 제안에 대해서도 공식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김장겸 사장은 이미 고용노동부에 자진 출석했고, 한국당이 보이콧 명분으로 들고 있는 문재인 정부 인사 문제나 북핵 관련 대응 문제에 대해서도 청와대와 내각에서 전향적 검토를 하겠다는 사인이 나온 상황이다. 한국당은 이날 청와대를 항의방문하는 등 강경 투쟁을 이어간다는 계획이지만, 홍준표 대표가 "대통령 해외순방 중 장외 투쟁을 하지 않겠다"고 밝히는 등 수위·완급 조절을 고민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정우택 한국당 원내대표는 5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어제 청와대가 여야정 상설 국정협의체의 시급한 구성 방침을 밝혔다"며 "문 대통령이 그동안 인사참사와 안보 무능, 공영방송 장악 시도와 협치 정신 파괴 등에 대한 아무런 진정성 있는 반성도 없는 상황에서 작금의 안보와 정국 난맥상에 대한 책임을 야당에도 전가하고 흐려 보려는 정략적 의도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거부 의사를 밝혔다.
정 원내대표는 "야당 목소리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교섭단체 중심으로 운영되는 국회 관례를 깨고 여야정협의체에 비교섭단체 정당(정의당)까지 넣어야 한다고 우기더니 이제 안보 무능력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지탄이 높아지자 '여야정이 함께 대처하자'고 느닷없이 나선 것"이라며 "협치·소통의 기초적 환경이 무너지고, 안보 무능과 인사 참사, 그리고 공영방송 장악에 대한 대통령의 반성과 사과도 없는 상황에서 한국당이 들러리 격으로 여야정협의체에 참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정기국회 보이콧 및 여야정협의체 거부에 대해 한국당이 들고 있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정 원내대표는 김 사장에 대한 영장 발부와 관련해 "공영방송 장악 시도가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 원내대표는 또 "문 대통령은 정권 출범 이후 이낙연 총리 인준부터 제1야당이 반대한 사안에 대해서 아무런 설득과 소통 없이 밀어붙였고, 야당이 '절대 부적격'으로 규정한 부적격 후보자들을 대부분 임명 강행했다"며 "오만하고 독선적인 국정 운영"이라고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
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의 핵위협이 현실화되는 위기 상황 속에서 한국당이 줄기차게 주장하고 촉구해온 사드 배치 완수, 전술핵 재배치, 원자력 추진 잠수함 보유, 한미동맹 강화 등 가장 현실적이고 시급한 대안 제시에 대해서도 일절 응답조차 없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핵 위협이 엄중한 현실로 다가오고 사드 문제가 한미 간에 불신을 가져와도, 오로지 낭만적이고 굴욕적이기까지 한 남북대화 구걸만 해왔다"는 주장도 했다.
정 원내대표는 "문 대통령이 진정으로 안보와 경제 등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초당적 협력이 필요하다면 다음과 같은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며 "첫째, 현재의 공영방송 장악 시도를 포기한다는 합리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조치의 약속과 이행이 선행되어야 하며, 둘째, 그동안의 인사 난맥상과 '5대 비리' 공약 파기, 독선적 국정 운영으로 인한 협치정신 파괴에 대한 사과, 셋째, 사드 배치 완수를 비롯한 한미동맹 강화와 전술핵 재배치, 원자력 추진 잠수함 보유 등 북핵 위협에 대응한 실효적 조치 검토 방침 등을 먼저 밝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 당이 지금 정기국회마저 보이콧하면서 전면적인 대여 투쟁을 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문재인 정부의 독선과 독주, 오만과 무능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는 "저는 원래 오늘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하기로 돼있지만, 우리 당의 입장을 국민께 생중계로 알릴 수 있는 기회까지 포기했다"며 "오전에 고용노동부 장관을 면담해 공영방송 탄압 차원의 개입 부당성을 따지고, 오후에는 청와대를 방문해 이같은 우리의 입장을 명확히 전달하고 대통령과 청와대의 근본적 인식전환을 촉구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당의 국회·국정협의체 거부 '이유' 살펴보니…
그러나 정 원내대표와 한국당의 주장은 최근의 상황 변화 흐름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먼저 보이콧의 직접 계기가 됐던 김장겸 사장은 이날 부당노동행위 혐의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서부고용노동지청에 자진 출석했다. 김 사장에 대한 영장 발부, 강제 조사가 '언론 탄압'이라던 한국당은 머쓱한 처지가 됐다. '탄압'을 받은 당사자가 자진출두를 해 버린 꼴이 된 것.
또다른 명분으로 든 '인사' 문제에 대해서는 전날인 4일 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급한 인사를 어느 정도 마쳤으니, 지금까지의 인사를 되돌아보면서 인사 시스템을 보완하고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지시했다. (☞관련 기사 : 文대통령 "여유 생겼으니, 인사시스템 보완하라")
한국당이 요구한 '사과'까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지금까지의 인사에 문제가 있음을 지시하고 개선 의지를 보인 것이다. 문 대통령의 지시가 성과를 낼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최소한 현재 시점이 야당에서 인사 문제로 공세를 펴기에 적합한 상황은 아니다.
안보 상황과 관련해서는, 사드는 전날 환경부가 환경영향평가 결과에서 '조건부 동의' 결론을 내림에 따라 이미 배치 완료 단계에 접어들었다. (☞관련 기사 : 불에는 불? "북핵 방어" 사드 배치 급물살)
또 한국당이 당론으로 주장하고 있는 전술핵 재배치 문제에 대해서도, 비록 정부·여당 내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질러 버린"(이철희 의원) 것일지언정 전날 국회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송영무 국방장관이 "전술핵 재배치라는 대안도 깊이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 국방장관 "北 핵폭탄, ICBM 들어갈 수 있다)
핵추진 잠수함 도입에 대해서는 이미 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직접 언급할 정도로 정부가 의지를 보이고 있고(☞관련 기사 : 文대통령, 트럼프 통화에서 '핵추진 잠수함' 언급), 오히려 야당에서 '핵추진 잠수함 도입이 문재인 정부의 탈핵 기조와 맞지 않는 것 아니냐'고 공세 소재로 삼았던 일까지 있었다.
때문에 같은 보수 야당이라도 바른정당 같은 경우에는 "대통령이 '안보 영수회담 열라'는 야당 제의에 '가능하다'는 응답을 했으니, 속히 모임이 만들어지길 원하고 그 자리에서라도 속 시원히 정부의 복안을 밝히기 바란다"(주호영 원내대표)라고 여야정 회동에 긍정적 태도를 보이거나 더 나아가서는 "문 대통령이 그동안 흔들렸던 대북 노선을 바로잡고 '극한적 압박'을 주장하며 한미 공조, 국제 공조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하태경 최고위원)라는 비교적 호평에 가까운 평가를 내놓기도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홍준표 한국당 대표가 "대통령 해외 순방 기간에는 장외투쟁을 하지 않겠다"며 "대통령이 국익을 위해 해외에 나가는 만큼 여야를 떠나 국내에서 장외투쟁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홍 대표는 "대통령 해외 순방 중에는 장외투쟁을 중단하는 게 정치 도의에 맞다는 생각"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단 홍 대표는 "일각에서 원내투쟁이 옳지 않느냐고 하는데, 들러리가 된다"며 장외 투쟁이라는 방향 자체에 대해서는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이날 정우택 한국당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이 유일한 안건이었던 국회 본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본회의 개의 예정 시각이었던 10시께 의장석에 올라가 "개의를 못 하는 상황"이라며 "오늘 회의는 못 한다. 국민들께 죄송하고 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께 양해 바란다. 의원들은 다른 일정을 하시고, 국무위원들은 그냥 돌아가시라"고 공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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