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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대표의 '극중주의'는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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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대표의 '극중주의'는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민미연 포럼]

국민의당 당대표로 안철수 전 의원이 당선되었다. 대선에 패배하고 나서 조용하던 그가 이번 당선으로 정치 일선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는 이 복귀 과정에서 특이한 개념 하나를 들고 나왔는데, '극중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안 대표의 극중주의는 한국 정치에서 존재해 본적이 없는 생소한 개념이다.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는 다소 밋밋한 슬로건으로 자신의 정치노선을 표현하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노선으로 '극중주의'를 강렬하게 제시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극중주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보통 '극좌'나 '극우'에 대해 말씀들을 많이 하신다. 그렇지만 반면에는 '극중'이 있습니다. 정말로 치열하게, 좌우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실제로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에 매진하는 것, '중도'를 극도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에 옮기는 것, 그것이 바로 '극중주의'입니다."

안철수 개인의 내면에 잠자던 극중주의가 외부에 드러나자,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반응들이 나왔다. 누군가는 극중주의는 결국 보수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다른 누구는 자기 정체성이 없는 모호한 노선이라고 힐난한다. 안 대표가 상찬한 마크롱의 지지율이 이미 상당한 폭으로 떨어지고 있는 사실을 들먹이며 안 대표의 새로운 노선 역시 마찬가지 운명일 거라 예단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 안 대표의 극중주의를 둘러싼 논란은 극중주의가 내포하는 함의에 대한 논란이다. 극중주의라는 명칭으로, 극중주의를 표방하는 정책으로 점점 쇠락해가는 한국을 살릴 수 있을까? 극중주의는 세계화의 흐름을 절묘하게 타서 성장하게 된 한국경제에 바람직한 처방전일까? 모두들 극중주의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있다.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사실이 있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는 극중주의의 내용보다 '극중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의 존재감'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극중주의에 포함되는 개별 정책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에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우에 포섭되지 않는 정치세력의 존재는 좌우를 긴장시키기도 하고 소통시키기도 할 수 있는 존재다. 이 지점에서 극중주의 정치세력은 극중주의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극중주의를 표방하는 세력의 존재감 때문에 정치에서 소중해지는, 특이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안철수 신임 국민의당 대표가 8.27 전당대회 승리 직후 꽃다발을 들고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안 대표의 극중주의 설명을 언론을 통해 접하는 순간, 문득 미국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정치이론가 샤츠슈나이더가 생각이 났다. 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현재호·박수형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첫 장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샤프 슈나이더의 명저는 이런 일화로 시작된다.

"1943년 8월 무더운 오후, 뉴욕시 할렘가에 있는 한 호텔 로비에서 흑인 병사와 백인 경찰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이 소식은 그 지역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몇 분 만에 성난 군중이 호텔과 경찰서, 그리고 부상당한 경찰이 입원해 있는 병원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질서가 회복될 때까지 약 4백 명의 부상자와 수백만 달러 상당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이 소란은 인종 폭동이 아니었다. 흑인 군중들에게 피해를 입은 가게에는 흑인이 운영하는 가게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샤츠슈나이더는 이 일화를 통해 얼마나 사람들이 쉽게 분노하게 되는지 그리고 미미했던 분노가 폭동이나 봉기의 형태로 얼마나 쉽사리 전환되는 지를 말하고 있다. 인간이 쌓아 올린 문명은 작은 갈등이 촉발시키는 방아쇠에도 금방 타오를 수 있는 것이다. 샤츠슈나이더는 "그 어떤 것도 싸움만큼 그렇게 빨리 군중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 싸움만큼 전염성이 강한 것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갈등 해결이 어렵다면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공동체는 언제나 나와 너의 무한경쟁과 투쟁의 장으로 변하고 만다. 샤츠슈나이더는 이 갈등의 원활한 해결을 위해서는 싸움과 그 싸움의 장에 참여하고 있지만, 적대적 투쟁의 주체는 아닌 구경꾼에 눈을 돌린다. 구경꾼의 존재야말로 갈등 해결의 열쇠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문장을 이어간다.

"어떤 갈등이든 그것을 이해하려면 싸움꾼과 구경꾼의 관계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싸움의 결과를 결정하는 일은 대개 구경꾼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는 구경꾼만이 갈등을 해결하는 주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구경꾼이 갈등의 현장에 존재함으로써 갈등의 양상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구경꾼의 존재감은 갈등의 성격을 바꾼다. 그는 단호하게 "새로운 참여자가 들어오면 힘의 균형이 달라지기 때문에" 갈등 해결의 단초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만이 갈등을 해결하는 주체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갈등의 현장에 참가함으로써 갈등의 성격이 변하고 해결의 실마리가 마련된다는 점이다.

한국에 사는 우리 모두는 복지국가를 바란다. 그러나 시민들의 복지에 대한 지식은 복지국가 스웨덴이 주는 긍정적 이미지 정도일 따름이다. 복지국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지식인 중에서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은 자본가의 힘을 제한하고 노동자의 소득을 더 끌어올리는데 집중하면 복지국가가 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답을 내놓지 못한다. 복지국가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민주주의를 외쳤던 그 많은 사람들이 소망했던 나라는 절차적 선거제도가 형식적으로 완비된 나라는 아니었다. 국민을 위한 정치, 국민을 위한 복지가 성숙한 국가 그런 나라를 꿈꾸며 그 많은 사람들은 투쟁했었다. 전 세계 어느 국민보다 더 치열하게 투쟁했건만 한국은 산업선진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의 복지만 꾸려지는 나라가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던 것일까?

한국의 대표적 복지정책전문가인 양재진 연세대 교수의 논문 '복지국가의 저발전에 관한 실증 연구'는 민주주의가 되면, 산업화가 되면, 복지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란 우리의 고정관념이 그릇된 것임을 말해준다. 양 교수는 논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민주주의의 발달 정도에 따라 복지국가의 발전수준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을 위시한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 있어 민주주의의 성숙도는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나라마다 사회지출의 수준과 프로그램 발달 정도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나라만 부자만 되면, GDP 성장만 되면 좋은 복지국가가 된다는 것은 허구임을 논문은 말하고 있다.

복지선진국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최태욱 한림대 교수는 논문 '경쟁력을 위한 사회합의주의 발전의 정치제도'에서 이 문제를 파고들고 있다. 최 교수는 '다수대표제-양당제-단일정당정부'의 제도 패키지로 운영되는 소위 '다수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회 합의주의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 제도는 양당이 대결해 한 정당이 다수를 점하고 단독정부를 세우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그는 이 시스템으로 인해 복지국가에 도달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나라로 미국과 한국을 들고 있다. 그는 복지선진국은 다수제 민주주의가 아니라 합의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합의제 민주주의는 사회 합의주의로 발전해간다.

사회 합의주의는 복지선진국 대부분이 추구해 온 노선이다. 사회 합의주의는 어느 특정한 정치세력 하나가 어느 특정한 이익집단 하나가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각자가 자신들의 이익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양보와 타협으로 운영해가는 시스템이다. 사회 합의주의가 잘 운영되고 있는 8개국(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핀란드, 벨기에)의 가장 큰 특징은 다수제 민주주의가 아닌 '합의제 민주주의'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합의제 민주주의, 사회 합의주의는 복지선진국으로 가는 문을 연다.

다수제 민주주의에 기반한 양당제 국가의 정부는 일단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면, 한 정당이 집권한다. 여당이 된 집권 정당과 힘을 상실한 야당이 남게 되면 힘과 힘의 충돌, 갈등과 갈등의 증폭이 일상화된다. 이런 상황을 유시민 작가는 '우리 정책을 통과시키지는 못해도 상대의 정책을 방해할 수는 있는 균형'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각자가 자신을 정의로 상대편을 부정의로 규정하고 투쟁하는 시스템이 자리를 잡고 나서는 집권 이후 좋은 정책을 펼쳐나가기가 어렵게 제도화되어 있는 것이다. 야당이 된 정당에 집권여당은 물리쳐야 할 투쟁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회 합의주의가 안정적으로 발전해 온 국가들은 모두 보수와 진보 그리고 중도계층에 기반을 둔 유력정당 셋 이상이 어느 한 정당도 단독 다수당이 되기 어려운 다당제를 형성하고 따라서 통상적인 정부 형태가 연립정부인 합의제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합의제 민주주의에 기반한 연립정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일까? 최 교수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유력한 중도정당들의 존재'라고 말한다. 이 중도정당의 존재 때문에 좌우 어느 한쪽의 정당이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하거나 운영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 그래서 타협이 상황에 의해서 강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구성된 연립정부는 갈등을 최소화시키면서 복지정책을 성공시킬 수가 있다고 한다.

샤츠슈나이더는 갈등이 증폭되어 해결되기 힘든 상황에 구경꾼이라는 새로운 참가자가 등장함으로써 갈등의 장은 해결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고 말한다. 최태욱 교수에 따르면, 복지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나라는 사회 합의주의의 연대의 정치에 익숙하다고 한다. 그는 "연대의 정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유력한 중도정당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중도정당은 정당의 능력, 또는 정당이 표방하는 특정 정책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도정당의 중요성은 좌우를 소통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 그 소통을 통해 정치 현장의 갈등이 증폭되지 않고 관리될 수 있는 실마리를 주기에 중도정당은 중요하다.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 대표 당선을 축하하며, 그의 극중주의가 복지국가의 문을 여는 시작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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