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이후 한반도가 지니는 지정학적 의미는 강대국들 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에서 특정 국가에 의한 한반도의 독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련의 몰락으로 사실상 냉전이 끝났음에도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두고 이제는 소련에서 중국으로 상대 선수가 바뀐 상태에서 미국이 펼치는 힘겨루기가 예사롭지 않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4일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와 강제적인 기술이전 요구 등 부당한 무역관행을 조사토록 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사실상 무역 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중국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중국 상무부는 15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 "다자간 무역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좌시하지 않겠다"며 세계무역기구(WTO)에 미국을 제소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그러자 극우 성향의 스티브 배넌 당시 백악관 수석전략가까지 진보 성향 잡지 <아메리칸 프로스펙트>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중국과의 경제 전쟁은 모든 것이고, 우리는 모두 그에 미친 듯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에서 그들이 (북핵 문제 등으로) 우리를 툭툭 치고 있지만 그건 단지 곁가지(sideshow)에 불과하다"고 했다.
미국에게 '곁가지'에 불과한 북핵
북한과 미국이 주고받은 '말 폭탄'이 결국 '쇼'였던 것이다. '북핵 군사해법은 없다,' '주한미군 철수협상을 고려할 수 있다'고 한 발언으로 트럼프 정권의 설계사이자 대선 1등 공신이었던 배넌이 정권 출범 7개월 만에 축출되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악동'의 돌출 발언은 한반도가 미국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기에 빠져나오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을 수 있겠다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한국을 버리고 도망쳐 나온다는 인상은 덜 주고 대신에, 미국의 위신은 유지하려는 '질서 있는 동맹의 파기'였다. 60여 년 전 '장문의 전보(The Long Telegram)'로 유명한 소련 봉쇄론자 조지 케넌이 그랬다.
당시 케넌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한반도 전체를 중립화시키자는 제안을 소련이 수용하는 대가로 일본 본토에 미군을 주둔하거나 군사기지를 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려 했다. 한반도와 일본 문제를 묶어 일괄타결한다는 구상이었다.
케넌의 아이디어는 중국 공산화 가능성과 일본이 소련과 연합할 경우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고립될 가능성을 우려한 미국 군부의 반발로 결국 없던 일이 됐다. 배넌 역시 백악관 비서실장, 국가안보실장 등 군 인사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트럼프, 불타고 있는 '아메리칸 엠파이어'에 산소를 공급
트럼프의 등장으로 미국이 중시해 온 다원성과 개방성, 투명성, 예측성은 점차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트럼프의 출현 자체가 미국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는 보도도 있었다. 워싱턴 소재 보수 성향 싱크탱크 전문가들조차 트럼프 행정부를 비난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트럼프 측의 합류 제안에도 후일의 평판을 의식해서 이를 거절하는 전문가들의 숫자도 적지 않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도덕적 권위마저 스스로 갉아먹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메리칸 엠파이어'(American Empire)의 쇠퇴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트럼프는 불타고 있는 아메리칸 엠파이어에 산소를 공급하고 있다. 그렇다고 중국 중심으로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될 가능성 역시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이 지역에서 미국이 반세기 이상 주도해 온 '패권 질서'를 중국이 이를 대체하기에는 군사적으로 미국에 열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중 간 협력적 대결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양국 모두 상호 경제적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남은 과제는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간 북한이 어떤 조건으로 미국과 협상에 임할 것이며, 미국은 북한의 요구조건들을 어느 선까지 수용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북미 평화협정 체결이 그 종착점이 될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게다가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 조건의 하나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할 게 확실시된다.
물론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체결 등은 단기간 안에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타격론, 핵무장론, 압박론, (제재와 대화) 병행론, 그리고 대화론 등 모두 쉽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협정이든, 철수 문제든 북한 비핵화의 최종 단계에 가서야 이행이 가능하다. 문재인 정부의 딜레마다.
문재인 정부의 딜레마
지금까지 다섯 차례 핵실험을 한 북한은 상대방이 예상하지 못한 곳만을 골라 공을 날려 보내는 탁구선수처럼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럴 때마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은 우왕좌왕했다. 그 결과 북한 ICBM의 대기권 진입 성공에 대한 평가는 유보적이기는 해도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는 확보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미국이 핵무기를 탑재한 북한 미사일 위협을 임박하지는 않았지만 잠재적 행위로 보는 이유이다.
미국의 대북 강경론자들로부터 대북 '예방타격'(preventive strike)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래서 나온다. 이는 북한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확실한 근거에 기초하여 공격하는 '선제공격'(preemptive strike)보다 한발 더 앞서 나간 호전적 개념이다. 따라서 선제공격을 국제법상 불법으로 간주하는 것이 통설이다. 설상가상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00일 맞는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완성하고 거기에 핵탄두를 탑재해서 무기화하게 되는 것을 레드라인(금지선)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의도하지 않은 말 실수였다.
'레드라인'을 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도 임기 내 북핵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해결할 묘안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임기 5년 단임제의 대통령이 세습으로까지 이어지는 왕조체제를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길 방법은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거듭 말하지만, 북핵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역대 어느 지도자도 자신에게 주어진 북핵 숙제를 풀지 못했다. 그 사이 북핵 문제는 점차 난이도만 높아갔다. 초고난도 별 다섯 개(우연의 일치로 핵실험도 다섯 차례 실시)의 퍼즐이 됐다. 난공불락인 북한의 핵무기 위협 속에 살아남으려면 자수자강(自守自强)하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라는 물음에는 핵무기가 없는 한국의 숙명적인 딜레마가 숨겨져 있다. 풀기가 아주 어려운 고난도 방정식과도 같다.
주술(呪術)적 붕괴론 대신에 국가전략을 짤 때
과욕은 금물이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비핵화 벽돌을 한 장만 쌓는 일이다. 김정은 정권이 10~20년 이내 붕괴될 것이라는 기대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희망적 사고가 정책이, 국가전략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현명한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경로를 택하는 일이다. 현실적 국가안보정책은 도덕적 최고의 선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스펙트럼 상에서 덜 나쁜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혹시 국가안보전략이 북한 김정은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면 이는 오만하거나 무지한 생각이다. 북한 정권의 위협수준을 완화시키고 나아가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국가안보정책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공격적 무기 보다는 방어적 무기체계로의 전환, 방어위주 동맹으로의 전환은 불가피하다.
다만 우려되는 점은 사드 배치 과정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듯이, 한미동맹 강화 과정에서 중국의 크고 작은 반발에 문재인 정부가 얼마나 명민하게 대응할 수 있느냐이다. 이를테면 동북아 지역에서라도 미국에서 중국으로 급격하게 세력 전이가 이루어질 경우 우리의 내부적 균열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고민도 함께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유럽의 동아시아 전문가였던 필니(Karl Pilny)가 19세기 말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헤이(John Hay)의 "지중해는 과거의 바다이고, 대서양은 현재의 바다이며, 태평양은 미래의 바다"를 인용하면서 21세기는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 역할을 맡는 다극화된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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