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내외에서 쏟아지는 다양한 조언과 요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시선을 끄는 주장이 있다.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을 지낸 제임스 클래퍼의 고언이 바로 그것이다.
공군 장교 재직 시 태평양 사령부와 주한미군 사령부를 두루 거친 클래퍼는 1차 한반도 핵위기 당시에는 국방정보국(DIA) 국장(1991~1995년)을 지냈다. 그리고 북핵이 고도화로 치달은 2010년부터 2017년 1월까지 DNI 국장을 역임했다. 그는 93년 미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북한은 팀 스피릿 훈련에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북한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었다.
그랬던 그가 최근에는 눈과 귀를 의심할 만한 발언을 내놓고 있다.
클래퍼는 26일 <중앙일보>와 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공동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포럼에서 대북정책과 관련해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평양과 워싱턴에 이익 대표부를 설치하자는 제안에서부터 북핵 제한의 상응 조치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까지 거론한 것이다.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불합리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한미 양국에게 평화협정에 대한 능동적인 태도를 촉구했다.
국내 유력 인사가 이런 제안을 내놓았다면, 아마도 그는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 특보를 맡고 있는 문정인 연세대학교 명예특임교수는 북핵 동결을 조건으로 "한미 군사훈련 축소 논의가 가능하다"는 발언을 했다가 보수 진영으로부터 맹공을 당했다. 그런데 클래퍼의 발언은 이보다 훨씬 급진적인 것이다.
하지만 클래퍼의 조언은 충분히 검토해볼 가치가 있다. 한미관계의 현실과 기울어진 국내의 언론 환경을 고려하면 생각하는 것조차 불온시 될 수 있는 제안이지만, 오늘날 한미 양국의 대북정책은 이러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발상(Thank the unthinkable)', 즉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방한에 앞서 호주 일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2014년 11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 관리들이 피해 의식과 피포위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그들은 비핵화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핵무기는 그들에게 유일한 생존 수단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서울에 온 그의 발언 강도는 더 높아졌다. "체험으로 단언컨대, 북한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절대 비핵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은 핵능력을 생존의 티켓으로 간주한다"고 지적했다.
기실 클래퍼의 이런 진단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상당수 전문가들, 심지어 한미 양국 정부 관리들도 북한의 핵포기 가능성에 극히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군사력을 써서라도 북핵을 폐기시켜야 한다고 하고, 혹자는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비약적으로 강화시켜 북한의 굴복 내지 붕괴를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클래퍼는 전쟁은 '최악'이고 대북 제재 강화와 북핵 고도화 사이의 악순환은 '차악'이라고 본다. 동시에 비핵화가 최선이지만 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클래퍼는 '차선'으로 북미관계 개선과 북핵 동결, 그리고 평화협정이 어우러지는 해법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는 DNI 국장을 맡고 있었던 작년 10월 25일 미국 외교협회(CFR)에서도 이와 유사한 주문을 내놓은 바 있다.
클래퍼는 CFR 간담회에서 씁쓸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2014년 11월에 북한을 짧게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외교관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깨달았다." 그는 매튜 토드 밀러와 케네스 배 등 억류된 미국인 2명에 대한 석방 교섭을 위해 방북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발언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일까? 클래퍼는 방북 기간에 북한의 정찰국장과 국가안정보위부장 등 고위급 관리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리곤 "북한이 절대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 굳혔다. 이에 따라 비핵화는 "실패한 개념(lost cause)"이고, "가능한 최선"으로 북핵 동결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평화협정 논의가 필요하다고 봤다.
클래퍼는 이에 대해 박근혜 정부의 입장을 타진하고자 2016년 5월 초에 비공개로 한국을 방문했다. "미국이 북한과 평화협정과 관련한 논의를 할 경우 한국이 어느 정도까지 양보할 수 있느냐"는 취지의 문의를 해봤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문의를 일축했다.
"외교관이 안 된 것이 다행"이라는 발언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외교협상가가 되어 핵 협상에 나섰다면, 북한은 물론이고 남한도, 미국의 주류도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봤던 것이다.
그렇다. 북핵 대처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이 바로 협상이다. 전쟁을 통해 북핵을 제거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인명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제재는 겉으로는 강하고 단호해 보이지만, 기실 가장 게으른 자의 선택이고 그 역효과는 충분히 입증된 터이다.
반면 협상은 유화정책처럼 비춰지지만, 기실 가장 단호하고도 강력한 의지를 요한다. 까다로운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핵을 세계 전략의 하위 변수쯤으로 취급하는 미국의 주류를 설득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부의 반발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럼 이렇게 힘들고 어려우며 그 결과도 낙관할 수만은 없는 협상은 누구의 몫일까? 비핵화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으면서도 북핵 동결과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 대전환을 만들어야 하는 역사적 책무는 누구에게 있을까?
어떻게 해서든 북핵을 해결하겠다는 결의와 북한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이 교차하고, 정전협정 체결 65년을 한해 앞둔 시기에 던져보는 질문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