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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았다

[작은책] 박정희 정권과 사회가 만든 '한국판 아우슈비츠'

내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라는 사실을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3~4년 전이다. 그전까지는 이 사실을 숨겼다.

"이향직 선생님은 가해자들로부터 사과받고 명예를 회복해야 할 피해 당사자이십니다. 숨기지 말고 당당히 소리치고 역사에 묻혀 버린 그 사건을 세상에 알려 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나를 깨우쳐 준 두 분이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여준민 사무국장님, 인권 연극인 임인자 감독님. 두 분이 내겐 은인과 같다.

ⓒ이향직

내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구타는 상상을 초월했다. 구둣발로 짓밟는 것은 뭐 별일도 아니었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도 일상이었으며, 한겨울에 홀딱 벗겨서 팬티만 입혀 놓고, 전깃줄로 손발을 공처럼 둥글게 꽁꽁 묶어서, 골목길에서 구둣발로 차면서 시멘트 바닥을 굴린 적도 있었다.

난 열 살부터 가출하기 시작했다. 아버지한테 잡혀 들어가고, 안 죽을 만큼 맞고 또 가출하고, 때로는 맞다가 도망가서 또 가출하고 그렇게 살다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한테 잡혀서 부산 부전시장 부전역전(기차역)파출소로 끌려갔다. 아버진 빵과 우유를 주고선 나가 버렸고, 밤에 형제복지원 차가 와서 나를 싣고 갔다.

형제원에서의 삶은 지옥 그 자체였다. 매일 반복되는 몽둥이 구타. 명절과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곤 몽둥이를 안 맞는 날이 없었다. 툭하면 밥 먹고 "선착순 10명"(선착순 10명에 들지 못하면, 몽둥이를 맞아야 한다)이라는 말이 떨어지면, 밥은 거의 굶다시피 하고 식판을 반납하자마자 소대로 뛰어들어가야 했다. "히로시마 타"라고 조장이 말하면, 물구나무를 선 채로 발끝을 이층침대에 올린다. 그때의 고통은 참 해 보지 않고는 설명이 힘들다. 아이들은 배가 고파서 지네도 잡아서 씹어 먹었고, 새끼 뱀은 잡으면 며칠을 가지고 놀다가 뜯어 먹곤 했다. 큰 뱀은 명찰을 갈아서 만든 칼로 머리를 자르고 먹었다. '쫀드기'라 불리던 시커먼 흙덩어리를 납작하게 썰어서 말려서 먹기도 했다.

집으로 편지를 100번은 보낸 것 같다. 집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게 안쓰러워서 형제원 안에 있는 교회 전도사님이 가정방문이라고 직접 집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게 욕만 엄청나게 해 댔고, 다시 형제원으로 돌려보냈다. 그 전도사님은 브니엘고등학교 성경 선생님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전도사님이 큰아버지를 설득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있는데 왜 자기한테 그러느냐!'고 했단다.(당시 큰아버지는 부산 연산동에 있는 브니엘고등학교 선생님이었고, 큰어머니는 브니엘 중학교 선생님이었다.) 결국 나는 그 지옥 속에서의 기약 없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고, 14살부터 17살까지(1984년~1987년 4월 23일까지) 형제원이 폐쇄될 때까지 그곳에 있어야 했다.

▲ 1987년 2월 3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형제복지원 사진. 당시 <동아일보> 지면 갈무리.

1987년에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거의 2개월 동안 매일 신문과 뉴스 등에서 대서특필되었다. 그때까진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몰라서 안 데려갔다 치더라도 뉴스에서 그렇게 떠드는데도 자식이 죽었나 살았나 확인도 안 했다는 사실을 출소하기 며칠 전에 형제복지원 사무실에서 상담하면서 내 서류를 보고 알았다. 내 부모는 자식의 생사 확인조차 하지 않았는데, 연산중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 정인자 선생님이 세 번이나 찾아왔었다. 우리는 1987년 4월 23일 부산소년의집으로 전원 조치돼서 그 지옥을 나올 수 있었고, 집에 가긴 싫었으나 갈 곳이 없어서 집에 갔다. 난 집에 가서도 얼마 살지 않았다.

형제복지원, 그 지옥에서 매일 죽을 고생 해서 일해서 들어 놓은 적금을 찾으러 갔다. 3년 동안 개처럼 일한 돈이 15만 몇천 원이었다. 내가 억울한 것은 3년 동안 일한 게 고작 15만 원인 것도 물론 억울하지만, 그 돈을 아버지가 가져갔다. 그러면서 "니 학교 다시 보낼 때 이거 보탤끼다"라고 했다. 낮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검정고시 공부하는 야간학교를 다녔다. 고입 검정고시 날짜 한 달여 남았을 때 아버지한테 물었다.

"대학까지 갈라 하면 고등학교를 인문계로 가야 되고, 아니면 상고 가면 되는데 어쩔까에?"

"니 맘대로 해라. 근데 내한테 돈 달라 하진 마라. 나는 경애(여동생) 태권도 보내고 학원 보내는 것도 힘들다. 내가 니까지 머 우짜라꼬
. 니 살길 니가 알아서 해라."

결국 나는 고등학교 진학조차도 포기해야 했고, 말없이 다시 집을 나갔다. 홀로서기로 마음먹고 고입·대입 검정고시를 모두 합격했지만, 대학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생각해 보면 미칠 것같이 억울하다. 형제복지원에서 일해서 번 내 뼈와 살이 섞인 돈과, 퇴소 후 봉제공장에서 일해서 받은 월급봉투들은 왜 가지고 갔을까. 학비에 보탠다고 해 놓고.

19년 전에 집사람을 만나서 혼인신고를 하려는데, 또 한 번 경악했다. 내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실종신고를 했고, 기간이 지나도 행불 상태라서 절차에 의해서 동사무소에서 말소했다고 한다. 말소된 걸 알아보기 위해서 아버지한테 연락했다. 기초수급자가 되려고, 법적으로 부양의무자인 나를 실종신고하고 말소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유소년기의 추억과 희망과 꿈, 그 모든 것을 아버지와 형제복지원이 빼앗아 갔다. 내 삶을 독하지 않으면 버텨 내지 못했을 만큼 힘겹게 만든 아버지. 나는 이제 아버지에 대한 나의 한을 잊으려 애쓰지 않는다. 화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과받기 위한 마음의 준비는 언제나 하고 있을 것이다. 또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한을 잊으려고 형제복지원의 악몽을 지우려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하나둘 모이는 형제복지원의 친구들과 우리들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으려 한다.

나는 지금 경기도 일대의 아파트에서 열리는 야시장 행사장에서 회오리감자를 파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가폭력에 의하여 희생당한 분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하고,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노란리본 나눔을 하고 있다. 주말마다 또는 쉬는 날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노란리본을 만든다. 페이스북에서도 3~4년 동안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온라인 서명전을 진행하면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박인근 원장 개인이 저지른 사건이 결코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든 내무부훈령 410호로 인해 1975년 형제복지원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지원금을 받아 내기 위해 부산시 공무원, 경찰관, 심지어 동네 통·반장들까지 한통속이 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가두고, 때리고, 고문하고, 폭행하고, 강간하고, 때려죽이고, 강제로 노동을 시키고 온갖 인권유린이 다 일어난 '남한판 요덕수용소', '한국판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였다. 밝혀진 사망자 수만 551명. 사건이 알려진 지 30년이 지난 지금 사망한 증거자료가 있는 고인분들의 숫자만 551명이다. 다시 말하면 증거를 못 찾았을 뿐 실제 사망자 수는 수천 명이다.

ⓒ이향직

우리 부부와 딸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 마지막 주까지 4개월간 주말마다 서울 광화문역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전을 진행하여 806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우리 가족은 일생을 걸고서 지치지 않고 오래오래 싸우겠다는 각오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알려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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