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의 재벌 친화적 정책을 비롯한 각종 특혜와 지원으로 이룩한 압축성장은 절대빈곤을 해결했으나 주관적 관점에서의 행복감의 증가로 연결되지 않았다. 경제성장이 모든 가치에 우선했던 의식체계는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의 태생적 한계를 메우기 위한 안보 이데올로기와 조응하면서 민주주의를 질식시켰다.
과도한 경쟁은 일상화됐고 양극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성장지상주의와 냉전사고에 매몰된 반공주의는 한국 보수주의의 뿌리를 형성했고, '보수'로 위장된 기득수구 세력의 이념적 토대였다. 이러한 현상은 민주화 이후라고 변하지 않았다.
민주화 이전의 국가는 경제와 안보의 두 축으로 시민사회를 억압했다. 이러한 권위주의 시대의 강한 국가(strong state)와 약한 시민사회(weak society)의 시대에도 민주주의의 달성이라는 지상의 목표와 시대적 지향이 있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본격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득의 격차는 사회경제적 갈등 축으로 기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특히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 10년을 거치면서 시민사회 내의 경제적 간극과 균열은 극대화되었고, 계층 간의 경제적 갈등은 사회적 원심력으로 작용하면서 사회적 통합은 국가적 의제로 등장하였다.
지난 10년의 보수 정권에서 이러한 양상은 빠르고 공고하게 진행되었다. 경제적 양극화의 급속한 진행은 사회문화적 격차를 구조화했고, 민주주의는 위기에 직면했다.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평등과 인권, 분배와 경제민주화는 성장 동력을 저해하는 하향평준화로 치부되었고, 격차의 감소를 위한 사회경제적 정책은 폐기되었다.
사회 각 분야에서 기득권 세력의 수구적 이기주의는 사회를 되돌릴 수 없는 간극과 균열로 치닫게 했다. 용산 참사와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서 국가폭력은 정당화되었고,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 현장에서 '폭식투쟁'이라는 야만이 버젓하게 자행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권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방해 받았고, 시대착오적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은 유신 시대의 데자뷔로 다가왔다. 급기야 국민이 위임한 권력이 사적소유로 전락하고, 헌정과 국기가 철저히 유린되는 국정농단을 경험했다.
강고한 기득권 동맹과 사회경제적 양극화로 상징되는 민주주의의 위기의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사회 각 분야에서의 격차를 완화하는 작업이 전제되지 않는 통합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한국사회에 켜켜이 쌓인 적폐를 청산하자는 구호는 지난 대선과정에서 금기어가 되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만큼 한국사회의 기득권은 중도와 보수라는 방어막 뒤에 숨어 그들의 진지를 공고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퇴행과 구태가 체화된 한국사회의 모순들을 걷어내는 작업은 기득세력의 조직적 반발에 직면할 것이다. 개혁과 통합을 내건 문재인 정부의 성패는 기득권의 반발을 제어하면서 적폐를 여하히 청산하느냐에 달려 있다. 민주화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구조화된 사회 부조리와 부정의를 혁파하는 작업은 정의와 공정의 회복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여소야대의 구조에서 협치와 연대는 필수다. 그러나 수단인 정치공학적 협치가 목적으로 둔갑하는 수단과 목적의 도치는 개혁의 좌절을 결과할 것이다. 협치는 국민의 자발적 동의와 지지에 입각해야 한다. 사회적 지향점을 정확히 설정하고 정책 역량과 시민적 에너지를 결집함으로써 적폐의 청산과 개혁의 추동이 동전의 양면으로 기능하도록 하는 기획이 요구된다. 정교한 프로그램에 입각한 거시적 전략을 수립하고, 국면에 따른 수위조절과 유연성을 발휘할 때 목표에 다가갈 수 있다.
역발상의 혁명적 발상이 오히려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법치주의와 제도적 테두리 내에서도 혁명적 개혁은 지속가능하다. 이낙연 총리의 인준은 결국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야당의 협조로 통과됐다. 이는 역시 국민의 과반을 넘는 여론이 문재인 정부의 초대 총리 인준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국 관건은 민심의 소재와 추이에 정확히 반응하고 국민의 역동적 에너지를 모아가는 리더십과 집권세력의 역량이다.
지난 촛불혁명이 무엇을 절규했던가에 대한 성찰이 정권의 철학으로 부단하게 작동된다면 주권자는 집권세력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 퇴행적 수구에 집착하는 야당인들 주권자의 의지를 꺾을 수 있겠는가. 여소야대는 극복의 대상이고 정치적 타협의 대상일지언정, 개혁과 적폐청산의 걸림돌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엔 도덕적 권위의 하부구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고위공직자의 후보들의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병역면탈, 세금탈루 등의 불편한 진실들은 새 정부에도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다. 어느 정권도 예외가 없다. 해방 이후 적산 불하 과정, 자유당 정권과 이후의 고도성장 과정에서의 불법과 편법이 기득권을 형성한 한국의 구조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정의로워선 고위직에 오를 수 없다는 자조가 국민 일반 의식을 형성하는 한 개혁은 추동될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장관들은 지난 10년의 정권과는 뭔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정의를 세우는 동력은 도덕적 권위에서 나온다. 적폐청산을 정치보복으로 프레임화하려는 시도를 그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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