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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관심의 서글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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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관심의 서글픔

[민미연 포럼] 관심과 간섭의 경계는?

20개월 남짓한 아기를 데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늘 긴장을 한다. 나에게는 지나치게 느껴지는 관심 때문이다. 아기를 귀여워하며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친근한 관심은 때로는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기의 손을 잡아보는 등 아기의 신체를 만지며 귀여움을 표현하는 것까지는 그다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기의 상태나 행동의 책임을 엄마인 나에게 물으며 아기의 신변에 너무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불편하게 느껴진다. '애가 침을 흘리는 데 닦아줘라', '더운데 왜 옷을 그렇게 많이 입혔느냐', '요즘 엄마들은 이런 사탕 같은 건 안 주던데 이런 거 먹어도 우리 애들은 아무 문제없이 잘만 컸다' 등 아기의 신상과 관련된 각종 질문과 주문, 훈계를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듣고 있으면 내가 뭔가 문제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좌불안석이 된다.

아기의 순수한 웃음과 행동을 통해 잠시 그 순수성을 공유하면서 친근한 감정을 나누며 대화하는 것과 이처럼 아기의 신변과 관련된 모든 내용에 관심을 보이고 또 그 관심을 아기 엄마의 부주의로 책임지우는 것은 분명 다른 종류의 관심이다. 이런 종류의 관심을 탓하고 싶지만은 않다. 분명 지적 받아 마땅한 보호자의 부주의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처럼 익명의 아기 엄마와 아기를 향한 지나친 관심과 의무의 부여는 공동체성의 흔적이 갈 곳을 잃고 부적절하거나 불필요한 방식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단절된 연대성을 비춰주기에 서글프다.

ⓒ연합뉴스

자연스러운 관심과 지나친 관심, 즉 호혜적 연대성에서 우러나오는 관심과 불편하게 느껴지는 간섭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호혜적 연대를 바탕으로 한 관심은 신뢰와 배려를 기초로 드러나며 그렇기에 그 관심은 실질적으로 관심 받는 대상에게 정서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도움이 된다. 반면, 상대의 특수성과 자율성을 고려하지 않는 관심은 그저 자기 의견이나 상태를 상대에게 투영하여 확장하려는 지배적 간섭에 불과하며 이러한 간섭은 상대에게 도움은커녕 불쾌감 혹은 억압만을 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상대에 대한 정(情)이나 관심을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적절히 표출하며 표현과 자제의 경계를 습득할 수 있는 연습의 장이 부족해 보인다. 철저한 무관심 혹은 지나친 관심의 극단적인 양상으로 서로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숨기거나 분출할 뿐이다. 서로를 돕는 호혜적 관심의 개념은 오히려 생소하게 들린다.

서구에서는 흔히 현대 사회 인간성의 문제로 '인간소외' 혹은 '개인주의'를 든다. 우리의 정치학이나 사회학에서도 현대 한국 사회의 문제의 원인으로 이와 같은 상호간 무관심과 타자성을 짚는 경우가 많다. 원자화되고 고립된 개인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문제 중 하나는 맞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원자화된 개인은 그 양상이 서구의 정치공동체에서의 개인과는 다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만큼이나 분열된 자아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사회문화적으로는 연장자우선, 가부장주의, 조직우선과 같은 관계에 예속된 복종적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사회적 연대의 혜택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각자도생의 지나친 비 간섭주의에 익숙해진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개인'이란 자율성이라는 사적 가치와 판단을 존중하기 위해 상정된 인간성의 단위가 아니다. 자율성은 오직 생존의 영역에서만 인정되고, 아울러 '자유'라는 개념도 오직 경제적 방임의 원칙을 지지하는 용례로만 쓰인다. 나머지의 영역에서는 개인의 자율적 의사란 그저 수사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자율적 의사와 가치관을 형성하는 방법과 장을 잊은 채 살아왔다. 동시에 타인을 그 삶의 맥락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연습도 부족하다. 그러나 다른 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여 그 관심을 부적절한 간섭으로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방임적 자유를 적절히 경계하며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제약 조건을 탐구해온 유가사상의 본의는 한국적 지배 관계 내에서 집단적 획일화로 고착되었으며, 개인의 자율적 판단 존중과 자발적 사회 공동체 구성을 통한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보장하려 했던 서구 자유주의의 본의는 독점과 불공정을 공공연히 보장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로만 남았다. 그 결과, 한국 사회의 개인들은 사회의 조직적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는 다해야 하면서도 그 의무에 맞는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권리 없는 의무만 강요받고 있다. 이와 같은 권리 없는 간섭의 체제 속에서 개인들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의무에 부응해야 하는 피로를 느낀다. 이 피로한 의무는 자발적으로 부여한 것이 아니기에 더욱 부조리하고 억압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이처럼 단절된 사회적 연대의식 속에 관습적으로 지속되는 공동체적 관심은 그 끊어진 의무와 책임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마주한 익명의 상대를 더욱 대상화하고 소외시키는 간섭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보이지 않는 지배관계의 망은 개인들의 미시적 생활 관계를 억압적으로 간섭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간섭이 그 개인들의 삶을 책임지는 것도 아니다. 실질적으로 관심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 개인의 의무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이러한 사회적 연대성의 왜곡은 호혜적 관심에서 완전히 비껴나가 있는 경제적 취약계층의 생존 여건을 직접적으로 박탈한다. 국밥 값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독거노인,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한 송파 세 모녀의 안타까운 사연, 몸을 바로 누이지도 못하는 좁은 방에서 더 나아질 기대도 없이 삶을 연명하는 수많은 청년들 및 노인들의 현실은 경제적 사각 지대에 고립된 개인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우리의 일상을 구속하는 지나친 간섭과 부조리한 지배의 존재는 명백한데, 그 왜곡된 간섭의 주체는 국가라는 보다 크고 추상적인 공동체 뒤에 얼굴을 숨기고 있다. 그러니 막상 개인들에게 책임을 질 주체는 없다. 마을과 같은 자율적 공동체의 가시적 형태가 급속히 해체되고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어떤 연대적 매개도 형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부재된 공동체의 자리를 대중문화, 독재를 통한 국가주의, 국가주도의 성장위주의 경제관 등으로 채워온 한국 사회에는 연대성의 전제인 독립적 개인도 없고, 서로를 향한 호혜적이고 구체적인 신뢰와 관심도 없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국가의 공공부조나 각종 정책들은 그 의도에 비해 효과가 미약할 수밖에 없다.

간섭의 추상성과 무책임은 국가의 사회 서비스 공급 체계에서도 드러난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과 같은 보육시설은 물론이고 사립대학, 의료시스템, 주거, 중소기업 지원체계 등 각종 사회부조의 영역들이 비효율적이고 왜곡된 공공부조의 간섭과 자율이라는 명목 하에 비 간섭을 주장하나, 실질은 기득권에 불과한 민간집단 간의 고착된 균형 속에 너무 오래 방치되어 왔다. 공공의 간섭은 '국가'라는 추상적인 단위를 매개로하기 때문에 수요자의 실질적인 필요와 상관없는 포퓰리즘적인 공적 부조로 드러나며 이러한 공적 부조는 사회서비스의 질을 책임지지 않으면서 말만 '자율적인' 몇몇 민간 영역에서 흡수해버리고 만다. 정부에서 민간 어린이집에 바우처 형식으로 상당히 많은 지원을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보육서비스의 수혜자들인 부모들과 아이들은 만족할만한 보육서비스를 받지는 못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진실한 관심은 현재 각 개인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파악하고 이러한 실증적인 필요를 토대로 각기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상위 10%의 중산층 도그마에 수많은 사람들의 실상이 가려져 있고, 지역이나 세대 별로 고착된 정치적 이념 및 신념이 변화된 현실과 실질적인 문제를 반영하지 못한 채 반복적으로 되풀이 되고 있다. 김낙년 동국대 교수가 한국의 개인소득 분포 실상을 발표했을 때 중위소득이 1074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모두 충격을 받았던 것은 통계청 및 기타 조사기관들의 숱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제 해결을 위한 실증적 자료 접근에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민생'과 관련된 자료와 수요는 중앙정부보다는 지방정부 혹은 각 직능단체나 조합 등에서 구체적으로 잘 파악할 수 있음에도 우리의 정치 문화에는 이와 같은 국가라는 추상적 공동체와 개인을 적절히 매개하고 연대할 수 있는 공동체의 여건이 미약하다.

정작 육아에는 실질적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얼굴 없는 요란한 관심 속에 더욱 피로한 공공장소에서의 경험처럼 실제로 내 생활이 딱히 개선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공적자원은 여기저기에 천문학적으로 지원된다고 하는 요란이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시민들은 외롭다. 국가와 사회에 정신적·물리적으로 다해야 할 임무는 무겁고 그 임무를 다하지 않을 때 누구든 나를 질책하지만 그 누구도 내 어려움에 귀 기울이지도 않고 이 짐을 함께 지려는 자들은 없다. 국가는 시민에게, 시민들은 서로에게 그렇다.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관심을 갖고, 이를 표현할 수 있는 필요 적절한 '간섭'의 정도를 감지해나가는 데서 연대성과 호혜성을 기반으로 한 민주공화국의 시작이 가능해질 것이다. 얼굴 없는 간섭은 서글프고 피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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