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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의 양심에 관한 대법원장의 주장을 반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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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법관의 양심에 관한 대법원장의 주장을 반박함

[법치의 표리(表裏)] 40세 이상 법조인 중에 판사 임용하자

대한민국에서 법정을 한 두 번이라도 드나들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법정에서가 아니고, 법원 갈 일이 없어진 뒤 몇 달쯤 지나 집안 결혼식 피로연 자리에서 말이다.

몇 자리 건너 갈비탕을 먹고 있는 청년 하나가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어딘지 낯이 익은 얼굴. 반듯하게 양복을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겼지만, 어딘지 청바지와 티셔츠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새파란 얼굴이다. 누굴까? 신랑 친구? 신부 사촌? 혹시 혼기가 꽉 찬 딸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흘낏흘낏 청년의 모습을 훔쳐보다가 괜히 혼자 흐뭇한 상상에 빠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서 봤더라...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그 얼굴. 법대(法臺) 위에서 원고와 피고의 가시 돋친 공방을 처량한 듯 내려다보던 얼굴들 가운데 왼쪽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그 얼굴. 얼마 전 법정에서 보았던 젊은 판사의 얼굴이 지금 맞은편에서 갈비탕을 먹고 있는 그 청년의 얼굴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생각에 부딪히면 대개 사람들은 두 단계로 반응하는 것 같다. 먼저 그들은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될 수 있으면 그 청년, 아니 그 판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짐짓 모른체하며 주위 사람들을 통해 그 판사, 아니 그 청년이 도대체 누군지 알아보려고 한다.

이 은밀한 탐문이 성과를 거두어 그 판사가 누군지 조금씩 알게 될수록, 그 정도에 비례하여 그들에게는 정체모를 낯선 감정이 밀려든다. 차라리 아예 누군지 모르는 것이 좋았을 뻔 했다는 때늦은 후회 같은 것도 고개를 든다. 그러다가 급기야 누군가의 소개로 그 청년과 악수라도 하게 되면,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돌아설 때쯤, 근본적인 물음 몇 개가 '툭'하고 불거져 나오는 것이다.

"나는 왜 저 청년에게 재판을 받아야만 했는가?"
"나로 하여금 저 청년에게 재판을 받게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보수언론이 제기하고 대법원장이 정리한 '대안'

지난 두 달 동안 법원에 대한 검찰과 보수 언론의 집중 공격이 있었다. 일련의 시국사건들에 대한 법원의 잇단 무죄판결이 검찰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자, 이에 편승하여 판사들의 자발적 연구모임인 W연구회를 이념 그룹으로 규정하는 보수 언론의 여론 몰이가 시작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보수 언론이 이 사태를 법관의 양심 문제로 비화시켰다는 점이다. 보수 언론의 기본 논조는 법관의 양심은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에 앞설 수 없으며, 이번에 문제된 사건들은 그 반대의 예증이라는 것이었다.

보수 언론의 이러한 집중 공격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했는지에 관해서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사법부의 수장인 이용훈 대법원장이 지난 2월 22일 신임법관 임명식에서 "법관의 양심은 사회와 동떨어진 것이 돼선 곤란하다"며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받아들일 수 없는 기준을 법관의 양심이라고 포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에 덧붙여 대법원장은 "법관의 양심은 다른 법관과 공유할 수 있는 공정성과 합리성이 담보되어야" 한다면서 "다른 법관들이 납득할 수 없는 유별난 법관 개인의 독단을 양심이라고 할 수 없다"고도 언급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이번 법관 정기인사에서 서울중앙지법의 형사단독판사를 모두 임관 9년차 이상의 법관들로 구성했다고 한다.

헌법정치학자로서 나는 이번 사태를 통해 보수 언론이 '법관의 양심'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심오한 주제를 대한민국의 공론마당에 이끌어내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에 부응하여 대법원장이 내놓은 대안에는 몇 가지 논리적인 비약과 결함이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간략하게나마 이 점을 논의하고자 한다.

'양심'과 '상식'은 동일하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양심'과 '상식'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양심은 일반적으로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이 되는 전인격적 도덕의식을 일컫는다. 이에 비하여 상식이란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을 말한다. 삶의 현장에서 이 두 가지는 관련되거나 중첩되는 경우도 많지만, 갈등하거나 충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양자의 결정적인 차이는 전자가 개인적-보편적 성격을 가지는 것에 비하여 후자는 사회적-역사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 있다. 양심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깊은 내면에 존재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인류 전체와 연결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진다(소위 條理). 하지만 상식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산물이며 특정한 역사적 조건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이론적인 구분보다는 실제적인 예를 들어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는 남녀차별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자 시인이었던 나혜석의 '양심'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는가? 1960년 중반 미국의 남부에서는 시내버스에서 흑인과 백인이 갈라져 앉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백인의 자리에 앉아 일어서기를 거부했던 로자 파크스의 '양심'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는가?

방금 제기한 두 물음에서 양심의 주체는 결코 나혜석이나 로자 파크스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양심과 상식 사이에서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는 법관 또한 양심의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 양심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상식이 아니라 각자의 깊은 내면에서 출발하여 보편적 인류의 차원으로 연결되는 양심을 가지고 그 차별의 문제들을 판단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장은 "다른 법관이 납득하는 '양심'이어야 된다"고 한다

바람직하기로는 물론 '양심'과 '상식'이 동일하게 되는 것이 최상일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례들에서 우리는 양자의 불일치에 부딪힌다. 그렇다면 그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법원장은 '다른 법관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공정성과 합리성', '다른 법관들이 납득할 수 있는 양심'을 이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했다. 다시 말해, 판사의 양심은 법관 전체가 공유하는 상식에 의하여 제약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헌법 제103조의 해석에 있어서 흔히 '직업적 양심이론'으로 일컬어지는 이 논리에 대해서는 '과연 양심이 개인의 깊은 내면을 떠나 직업적 차원에 존재할 수 있느냐?'라는 본질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일단 대법원장의 주장을 가설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 현실적 타당성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대법원장의 주장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타당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법관의 상식, 즉 직업적 양심이 한국 사회 구성원 전체의 상식과 대체로 같아야 한다. 둘째, 법관의 직업적 양심, 즉 상식이 실제로 판결을 내리는 법관 개인의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 자신의 양심의 명령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대한민국의 법원은 이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는가?

먼저 후자의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부끄러운 증거를 가지고 있다. 법원장으로서 소속 판사들의 재판에 개입한 문제로 작년 이맘께 홍역을 치른 신영철 대법관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그로부터 압력을 받았던 판사들 중 일부는 법복을 벗고 평범한 시민이 되었다. 이 사태는 대법원장이 말하는 '다른 법관들이 납득할 수 있는 양심'이 관료사법의 내부 규율과 연결될 경우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요컨대, 한국 사회에는 법관의 상식이 법관 개인의 양심의 명령을 억압하게 될 위험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일반 시민들에게 더욱 민감한 것은 전자의 문제다. 법관의 상식, 곧 직업적 양심이 한국 사회 구성원 전체의 상식과 무척 다르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 엄존하는 지독한 사법 불신에서 증명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석궁을 맞은 판사보다 석궁을 쏜 수학교수가 여론의 두둔을 받았던 몇 해 전의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대법원장의 직업적 양심이론은 이 문제를 교묘히 우회하고 있다. 그 전략은 대법원장의 발언내용이 아니라 그 발언이 행해진 맥락을 살필 때 진면목이 드러난다.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받아들일 수 없는 기준을 법관의 양심이라고 포장해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장의 발언은 어디서 누구에게 행해진 것인가?

관료사법의 아비투스 체득하면 해결될 문젠가?

이 글의 초두를 나는 집안 결혼식 피로연에서 청년 판사의 얼굴을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그 청년 판사보다 적어도 서너 살은 더 어린, 새파랗다 못해 청춘의 열기마저 채 식지 않은, 아리따운 젊은이들 앞에서 대법원장은 법관의 직업적 양심이론을 설파했던 것이다. 이 광경은 그 자체로서 대법원장이 염두에 두고 있는 법관의 상식이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이 아리따운 젊은이들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살아가야 할 관료사법의 뿌리 깊은 내부 문화, 등산할 때도 서열 순으로 한다는 우스개로 잘 알려진 사법 관료의 아비투스가 그가 말하는 법관의 상식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면 독점적 인사권자로서 대법원장이 신임 법관들에게 연설하고 있는 진정한 내용이 무엇인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신임 법관들은 임관 첫 날부터 관료사법의 내부 문화, 사법 관료의 아비투스를 우습게보지 말라는 대법원장의 훈계를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리따운 젊은이들을 데려다가 관료사법의 아비투스를 체득하게 하는 방식으로는 한국 사회의 지독한 사법 불신을 해결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배양된 법관의 상식은 한국 사회 구성원 전체의 상식과 끝없이 멀어지게 될 뿐이다.

기존의 법관임용제도 포기하는 수 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도는 하루라도 빨리 기존의 법관임용제도를 포기하고 새로운 제도를 시작하는 것이다. 법관의 상식을 한국 사회 구성원 전체의 상식에 억지로 맞추려 하지 말고, 정반대로 한국 사회 구성원 전체의 상식을 잘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양심의 명령을 따를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법관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사회적-역사적 차원의 상식을 존중하면서도 결정적일 때 개인적-보편적 차원의 양심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을 판사로 세우는 새로운 법관임용제도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서 나는 현재 대법원장이나 대법관 임용에 요구되고 있는 것처럼 평판사의 임용에도 40세 이상의 연령요건을 추가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그와 더불어 평판사임용과정에도 후보자의 인격적 충실성을 검증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나아가 40세가 넘어 한 번 판사가 되면 원칙적으로 은퇴할 때까지 판사로 봉직하는 것을 아예 법률로 제도화하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전관예우와 같은 폐습을 아예 뿌리 뽑고, 한국 사회 구성원 전체의 상식과 법관의 양심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법관임용제도를 만들지 않으면, 한국 사회의 지독한 사법 불신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경력을 갖춘 변호사와 법학교수들 가운데서 판사를 임용하는 이 제도는 흔히 '법조일원화'라는 이름으로 소위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제도가 거론될 때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로스쿨제도의 시행이 2년차에 이른 지금의 시점에서 새로운 법관임용제도를 논의하는 것은 결코 성급한 것이 아니다.

법조일원화가 주장될 때마다 관료사법체제에서 잔뼈가 굵은 한국 법조의 어르신들은 항상 한국 사회 전체의 상식이 불건전한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거론하시곤 했다. 부패에 물든 경력 변호사와 법학교수들이 판사가 되면 법원마저 부패하게 될 수 있다는 식의 논리 말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금은 그와 같은 추상적인 우려를 제기할 때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구체적으로 어떤 경력 변호사와 법학교수가 부패에 물들어 있으며 그리하여 판사가 되면 안 되는 경력 변호사와 법학교수들이 누구인지를 인사권자인 대법원장에게 진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그 부패한 경력 변호사와 법학교수들의 명단이 너무 길어 법조일원화를 제대로 추진하기가 어렵다면, 이 나라의 사법에는 이미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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