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2주가량 앞두고 바른정당 의원들이 자기 당 대선 후보인 유승민 후보를 사실상 '식물 후보'로 전락시켰다.
김무성계를 비롯한 일부 의원들이 끝내 유승민 후보의 완주 의사를 꺾으며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에 단일화를 제안하기로 했다. 바른정당은 24일 장장 5시간에 가까운 심야 의원 총회를 열어 이같이 결정했다. 유승민 후보는 향후의 과정을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결론도 내렸다.
저녁 7시 30분에 시작해 자정을 넘길 때까지 진행된 이 날 의총에서 "지지도가 낮아 죄송하다"는 유 후보의 읍소에도, 바른정당 의원들은 자유한국당·국민의당과의 3자 단일화를 제안하기로 했다는 예상 밖의 결론을 내렸다.
의총을 마친 후 주호영 원내대표는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발언이 나왔다면서도 "다만 좌파 패권 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3자 단일화를 포함한 모든 대책을 적극 강구하기로 했다. 후보는 그 과정을 지켜보기로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에 단일화 협상을 적극 제안하고, 성사될 경우 유 후보는 무조건적으로 이를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주 원내대표는 '자유한국당 또는 국민의당과만 하는 양자 단일화도 추진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논의는 없었으나 양자 단일화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공유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문재인 집권 저지 자체가 목적인 '반(反)문재인 연대'라는 명분 없는 정치공학 단일화의 유령을 되살린 격이다.
이날 의총에선 김무성 고문과 주호영 원내대표가 앞장서 '단일화 제안'을 주장했다. 당의 선대위원장과 핵심 지도부인 원내대표가 '후보 흔들기'에 총대를 멘 셈이다.
김 선대위원장은 '바른정당의 창당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문재인 후보가 북한은 주적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만큼 보수 연대의 명분이 생겼다며 단일화 제안을 주장했다고 한다.
주 원내대표는 두 당에 단일화를 제안함으로써 '반문' 연대의 명분은 살리고 후보는 후보대로 완주하자는 희한한 주장을 펼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외에도 김무성계로 분류되는 김성태, 권성동, 황영철, 이진복 의원 등이 '문재인 저지가 민심'이라는 논리로 단일화 주장을 강경하게 제기했다고 한다. 특히 이진복 의원은 유 후보가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혼자라도 탈당하겠다"고 했으며, 권성동 의원은 후보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것은 "유 후보가 희생과 헌신을 하지 않아서"라고 비난한 것으로 전해졌다. (☞ 관련 기사 : 김무성계, '유승민 흔들기' 심야 쿠데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나락에 빠진 보수를 재건하겠다며 지난 1월 24일 창당대회를 연 지 불과 석 달 만에 자기들 손으로 뽑은 대선후보를 무력화시키고 자유한국당과 대선을 함께 치르겠다는 발상이다. 당선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공식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는 자당 후보 등에 화살을 쏜 셈이다.
반면 김세연 유의동 강길부 이군현 박인숙 김현아 김용태 의원 등도 유 후보가 완주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특히 박인숙 의원은 '돼지 흥분제' 강간 모의 논란이 일고 있는 홍 후보와 단일화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 후보가 바른정당의 자유한국당의 정체성 차이를 지적하며 "제가 읍소하고 싶다. 지지도가 낮아 죄송하지만 어지간하면 저를 믿고 따라달라"고 호소하기도 했으나 결국 바른정당 의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유승민 "3자 후보 단일화 반대"
이에 앞서 바른정당 일부 인사들은 이미 유승민 후보와 상의 없이 자유한국당 및 국민의당에 단일화 협상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보인다. 유 후보는 의총에서 당의 핵심 인사들이 자신의 의사와 별개로 자유한국당·국민의당과 '물밑 협상'을 벌인 것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밝혔다.
유 후보는 자신이 바른정당의 대선 후보로 경선을 거쳐 선출될 때 "지지율 얼마 이상 안 오르면 사퇴하겠다는 조건이 없었다"면서 "후보도 모르게 홍준표 후보 측과 단일화 협상까지 진행했다는 것은 너무 섭섭하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주 원내대표는 "물밑 협상이랄 것은 없었다"며 "물밑 협상이라면 후보와도 상의를 하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국당, 국민의당 양쪽으로부터 "그저 의견을 들은 정도"라고 접촉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주 원내대표는 유 후보의 완주 의사와 상관없이 3자 단일화 협상이 성사되면 진행하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그렇게까지 확인된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단일화 제안 과정을 후보가 "지켜보겠다는 뜻에는 제안 자체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취재진의 쏟아지는 질문에도 침묵을 지키고 회의장을 떠난 유승민 의원은 잠시 후 3자 단일화 반대 뜻을 출입기자들에게 공지 문자를 통해 밝혔다. 유승민 후보의 지상욱 대변인은 "오늘 의원총회에서 유 후보는 3자 후보 단일화에 대해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고 밝혔다.
몇 시간 전까지 "사퇴하라"던 후보와 단일화?
유 후보는 대선 TV토론에서 색깔론을 제기하는 등 일부 실망스러운 면모도 보였으나, 민생과 경제 분야에서 과거 보수의 금기를 깨고 증세와 복지 확충을 주장하는 등 과감한 정책적 전환으로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유 후보는 지난 23일 대선후보 TV 토론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소위 '돼지 흥분제' 논란과 관련해 "강간미수의 공범인데 이것은 인권의 문제이고, 대한민국의 품격의 문제다. 홍 후보는 즉각 사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럼에도 바른정당이 홍 후보 측에 단일화를 먼저 공개 제안함에 따라, 유 후보는 국민들이 생방송으로 지켜보는 앞에서 사퇴를 촉구했던 홍준표 후보와 단일화 협상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어이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이에 앞서 바른정당 소속 전현직 여성의원들도 21일 홍 후보의 사퇴를 촉구하며 "성평등을 지향하는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을 역행하는 자질이 부족한 후보"라고 직격한 바 있다.
24일에도 이상곤 수석부대변인 명의의 공식 논평을 통해 "'돼지흥분제' 문제는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며 "대선 출마 전부터 '마초 의식'을 여지없이 뽐내던 홍 후보 막말 퍼레이드가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이라며 홍 후보의 사퇴 주장을 이어갔다.
결국 바른정당은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사퇴를 촉구하던 홍 후보에게 단일화 협상을 제안하는 자기 부정을 버젓이 저지른 셈이다.
하지만 바른정당이 유 후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보 단일화를 제안하더라도 국민의당과 자유한국당이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단일화 협상 자체를 부정해왔고,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역시 유리한 조건의 단일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쉽사리 움직이지 않을 분위기다.
안철수, 홍준표 후보 측이 단일화를 거부할 경우, 바른당은 게도 잃고 구럭도 잃는 최악의 상황에 내몰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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