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사로 일한 지 15년이 넘었다. 나의 그간 활동들로, 혹은 내가 일했던 복지단체의 활동들로 정말 한 명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 때로는 정말로 나의 어떠한 노력들로 누군가의 삶이 바뀐 것 같아 도취되기도 하고, 때로는 나 스스로의 삶도 못 바꾸는데 다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으랴 좌절하기도 하였다.
사회를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만나는 한 사람의 삶부터?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이 두 가지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만나는 한 명의 삶이 바뀌려면 사회가 바뀌어야 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사단복지법인 '함께 걷는 아이들'에는 학습 부진 아동을 1:1로 집중 지도하는 사업이 있다. 학습 부진에 놓인 아이들은 1:1 개인 선생님이 집중적으로 지도하면, 1년 반 안에 기초 학습 부진을 탈피하고 학습 태도도 눈에 띄게 좋아진다. 그렇게 매년 170여 명의 아동을 만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공교육이 나아지지 않는 한 학습 부진 아동은 없어지지 않는다. 사교육이 넘쳐나고 공교육에서 아이들의 개별적 차이에 의한 지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가 매년 170명의 아동을 만나도 계속 학습 부진 아동이 생겨날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위기 청소년이다. 어린 시절 가정에서의 학대, 학교에서의 학습 부진과 따돌림, 가정의 해체가 가출, 범죄, 비행 청소년의 원인이 된다. 또한 거리로 나온 청소년들은 오늘의 먹을거리, 잘 곳을 찾아 성매매를 하기도 비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위험한 노동에 내몰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한 명의 청소년이 가진 문제는 우리 사회의 종합적인 문제였다. 그 한 명의 노력으로 변화되기 어려웠고 어느 한 단체의 노력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국회에서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국회 토론회를 개최해보고 참석해보기도 하였지만, 국회에서의 논의들이 현장에서 체감되는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하는 듯 했다.
그럴 때 만난 것이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 활동이다. 아동 학대나 아픈 아동에 대한 지원 등을 '함께 걷는 아이들'에서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활동이라고 생각해왔다. 아픈 아동에 대한 지원이 너무도 당연하게 모금 활동을 통해 충당되고, 여러 아동 단체들이 아픈 아동의 사진을 대대적으로 노출하여 모금하는 것이 복지단체에서 일하는 나조차도 불편하게 느껴지던 차였다.
아이가 아픈데 부모가 병원비 걱정으로 TV 노출까지 해야 한다니. 무슨 이런 경우가 있나. 생각하고 있을 때 "어린이 병원비는 국가가 보장하라"라며 사회복지사들이 모여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이하 어린이병원비연대)"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접했다. 활동을 계속 지켜보다가 용기를 내어 연대단체에 가입했다.
모두가 주인이면서 아무도 주인이 아닌 연대 활동
그간의 경험으로 보면 여러 단체가 모인 연대 활동은 흐지부지 되기 쉬웠고 모두가 주인이면 아무도 주인이 아니었던 경험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연대 활동이 어려운 이유 몇 가지를 생각해보면 첫 번째는 개별 단체의 여력이 없는 문제이다.
비정부기구(NGO)나 복지단체들은 대부분 부족한 인력과 빠듯한 예산으로 많은 이슈와 업무를 맡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일을 하기도 바빠 필요한 일인 줄은 알지만 연대활동은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좀 규모가 큰 단체들에서 역할을 많이 해주면 좋겠지만 큰 단체들은 연대하지 않아도 자체적인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연대 활동의 필요성을 많이 못 느끼는 것 같다.
두 번째로는 실적주의이다. 이 활동이 우리 단체의 실적이 되는지 여부이다. 복지단체나 공익단체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제를 해결하거나 공익을 위해 활동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새인가 실적을 증명하여 평가받아야 (정부 혹은 기업) 지원금이 나오는 구조에 길들여졌고, 이 활동이 우리의 미션보다 우리 단체 자체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연대 활동이라는 것이 여러 단체 의견을 조율해야 하다 보니 에너지는 많이 들지만 성과가 바로 나오기는 힘든데, 더욱이 그 성과 역시 개별 단체에 어떤 실적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연대 활동이 힘을 갖고 지속되기만 한다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단체가 활동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갖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연대 활동의 경험이 미미하고 성공 경험은 더욱이 없는 내가 어설프게 시작한 '어린이 병원비 연대' 활동의 경험을 나눠보고자 한다.
# 낯설음과 어색함 견디기
유사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모르는 사람들과의 회의. 어색함이 짙게 깔린 회의에서 어떻게 어느 정도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는 회의의 연속. 회의에 대한 공지나 참석의 친절함이 별로 없는(간사가 없으니 당연하다) 모임에 스스로 알아서 열심히 참석하기를 4-5회.
# 얼떨결에 집회 발언
국민건강보험 예산 관련된 급박한 이슈가 있다고 시간이 되는 사람은 모이라고 하여 카톡방에서 손을 들었다. 저요! 생전 처음 참여해본 집회 스타일의 기자회견(?)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누군가 듣는지 안 듣는지 모르는(영상에 담았으니 누군가 보겠지), 청중이 없는 상태의 발언(강의도 토론도 아닌 발언)이 참으로 낯설었다.
# 적응의 시간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의 이슈를 알면 알수록 어떤 절실함과 필요성이 느껴졌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발동했다. 우리 단체만 하는 일이었으면 당장 무얼 해보자, 이거는 어떻게? 저거는 어떻게? 직원들과 논의했겠지만, 연대 활동이라는 것이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서 일면은 답답했다. 왜 이거는 안 하지? 이거는 어떻게 된 거지? 이런 건 어떨까? 묻는 것도, 하자고 하는 것도, 아이디어를 내는 것도 모두 다른 상황과 다른 생각 속에 있는 사람들과 맞추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 같이 하는 경험
지난 4월 12일에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을 위한 음악회'를 진행했다. 내가 일하는 '함께 걷는 아이들'은 취약계층 아동 청소년의 오케스트라를 지원하고 있다. 우리 단체의 오케스트라 아동들과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합창단 친구들이 함께하는 음악회를 준비했다. 공연 사이에 연대 활동을 보고하고 사례를 공유하고 정책을 제안하여 대선 후보들에게 이에 대한 답변을 받는 행사였다.
어린이재단과 '함께 걷는 아이들'이 서로 사이좋게 일을 나누었다. 각 정당별 대선 주자를 연대단체들이 한 명씩 나누어 섭외했다. 내가 우리 단체에서 일할 때는 내가 바로 결정했던 일들도 나와 생각이 다른 여러 단체들이 있으니 한번 더 묻고 좀 더 기다렸다. 연대 활동비는 항상 부족하니 우리 단체 행사보다 아끼고 또 아꼈다. 속도는 느려도 그래서 한번 더 여러명이 검토하며 같이 결정했다.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을 어린이들이 노래하고, 연주하고 환아 부모가 얘기하고 법을 발의한 국회의원이 얘기하고 대선 후보들이 답변한 행사가 잘 진행되었다. 행사도 훌륭했지만 우리가 "같이" 진행했다는 것에 감동이 있었다.
# 그리하여 나는,
낯설고 어설퍼도 "함께"한다는 것은 더 큰 힘과 영향력이 있다고 믿는다. 진행이 다소 더뎌도 영향력은 더 길거라 믿는다. 우리는 "함께"하기에 쉽게 식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은 정치인들이, 정권의 성향에, 소수의 권력에 좌우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함께"했기 때문이다.
우리 재단의 슬로건은 '천천히 걸어도, 함께 걷는 아이들'이다.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도 복지국가를 향해 '천천히 걸어도 함께 걷는 활동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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