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자회견에서 말하는 천사는 어린이 병원비를 위한 모금 천사다. 종종 방송에 나온 아픈 사연들을 본다. 눈시울을 적시며 ARS 모금 전화를 누르는 시민들의 마음이 아름답다. 그럼에도 모금 천사를 거부한 이유는 이런 방식으론 아픈 어린이의 병원비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금으론 모든 아이를 도울 수 없다!
기자회견에 참여한 어린이 관련 단체 분이 말한다.
"우리는 어린이를 지원하는 단체이다. 지금도 아픈 어린이의 병원비를 해결하기 위해 모금에 나선다. 동시에 이 방법으로 모든 아이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제 제발 국가가 나서야 한다."
국가가 이 책임을 수행할 수 없을까? 몇 가지 제기되는 질문을 보자. 돈이 있는가? 2014년 0-15세 어린이들이 입원 진료를 받았을 때 든 총 병원비가 약 1조7억 원이다. 이 중 약 1조 2000억 원을 국민건강보험이 지원하고 나머지 5152억 원을 환자 가족이 직접 부담했다. 이 5152억 원에는 급여 진료의 법정 본인 부담금과 환자가 전액 부담하는 비급여 진료비가 모두 포함돼 있다. 이는 국민건강보험이 추가로 5152억 원을 지원하면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이 구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 국민건강보험 누적 흑자액이 20조 원이다. 5152억 원은 이 흑자액의 불과 2.5%이다. 과중한 병원비에 대비하고자 내는 게 국민건강보험료이다. 지금 어린이들과 가족들이 병원비에 힘겨워하고 모금 천사에 호소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제 국민건강보험의 흑자액을 어린이 병원비 지원에 사용할 때다.
병원비가 무분별하게 늘어나지 않을까?
또 다른 질문도 제기된다. 어린이 무상 의료가 구현되는 셈인데, 그러면 의료 이용이 무분별하게 늘어나지 않을까?
어린이 병원비 운동이 제안하는 대상은 어린이 입원 진료비에 한한다. 모든 병원비를 해결하면 좋겠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 상황을 감안한 제안이다.
아이가 입원하면 그 가족의 일상생활은 큰 변화를 겪는다. 우선 아이가 고생이다. 밖에서 힘차게 뛰어 놀아야 할 나이에 입원실에 누워 있어야 하니 딱하기 그지없다. 부모의 입장에선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고 싶은 심정일 거다. 게다가 아이가 입원하면 부모 중 한 사람은 내내 병실을 지켜야 한다. 맞벌이 부부라면 한 사람은 어떤 방식이든 사무실을 비워야 하고, 좁은 입원실 침대 밑에서 역시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과연 무상 의료가 되었다고 아이를 일부러 입원시킬 부모가 있을까?
혹은 입원 일수에는 변화가 없으나 의사가 이런 검사, 저런 처방 등 불필요한 진료까지 덧붙여 병원비를 부풀리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생길 수 있다. 사실 현행 민간 의료 보험 체제에서 그러한 일이 생기고 있다. 한국의료패널 자료를 보면 2012년 기준 10세 미만 어린이 중 민간 의료 보험에 가입한 비율이 무려 85%에 이른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이 충분치 않는 탓에 아이들을 위한 민간 보험이 활성화되고, 이러한 민간 의료 보험 체제에선 과잉 진료의 유혹이 생긴다.
국가가 보장해도 그럴까? 현행 보단 과잉 진료를 상당히 줄일 수 있다. 과잉 진료의 대부분이 비급여에서 발생한다. 민간 의료 보험에선 비급여 진료가 행해지면 그 비용을 병원에 그냥 지급할 수밖에 없지만, 국민건강보험 체제에선 급여 적절성을 심사할 수 있다. 앞으로 의료 성격을 지닌 비급여 진료를 모두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급여 진료로 전환하고 이에 대한 공적 심사를 강화한다면 전체 급여 체계의 개혁도 추진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의 재출발
이런 질문도 나온다. 왜 어린이만 보장하느냐고? 맞는 이야기이다. 모든 국민의 병원비를 해결해야 한다. 단지 이 의제를 전체 국민에게 공론화하는 단계적 로드맵에 따라 어린이를 우선 설정했을 뿐이다. 돈이 있느냐? 의료 낭비가 있지 않겠느냐? 등 의료 개혁에 저항하는 공세를 넘어서는 사례를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에서 만들어내자는 취지이다.
이를 통해 어린이 병원비를 국가가 해결하는 사례가 생긴다면 모든 병원비로 대상을 확장하는 건 자연스런 수순이다. 혹 재정이 부족하면 국민건강보험료를 더 내자고 제안할 수 있고 시민들이 이에 호응하리라 기대한다. 이미 민간 의료 보험에 훨씬 많은 보험료를 내고 있다. 그중 일부를 국민건강보험료로 전환하고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사실 이는 2010년 선보였던 '국민건강보험 하나로'의 목표이기도 하다. 당시 이 운동은 많은 주목을 받으며 출발했지만 여러 부족함으로 인해 힘을 잃었는데,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은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의 재출발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복지 주체 있는 어린이 병원비 운동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 운동에서 주목해 볼 또 하나의 관심사는 '복지 주체 형성'이다. 엊그제 천사데이에 발족한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 국민 서명 운동 본부'에 속한 단체가 65개에 이른다. 여기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함께 걷는 아이들, 지역 아동 센터, 한국 어린이집 총연합회 등 어린이 단체, 아이쿱생협, 공동육아와 공동체 교육 등 풀뿌리 단체, 서울시 사회복지사협회, 광주 사회복지사협회 등 사회복지사 단체,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등 복지 시민 단체들이 참여한다.
복지 국가 만들기는 단지 복지의 양적 확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복지에 대한 권리와 책임 의식을 지닌 시민들이 세력으로 커가야 한다. 대한민국 복지 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무상 급식이 바로 아래로부터 풀뿌리 세력을 만든 대표적 사례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물러나게 하고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억압에 꿋꿋하게 맞설 수 있는 '주체가 있는 운동'이다.
정치권 중심으로 복지제도 개혁이 진행된 무상 보육, 기초연금이 과연 복지 당사자들의 세력 형성에 얼마나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무상 급식처럼 아래로부터 뿌리를 가진 복지 운동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 운동이 다시 그러한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다. 5152억 원에 조응하는 51만5200명의 국민 서명을 내년 봄까지 조직하겠다는 포부로 어린이 단체, 뿔뿌리 시민단체, 복지 현장의 사회복지사들이 깃발을 올렸다.
이 서명 운동의 성과를 토대로 내년 어린이날에 모든 대선 후보들이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을 선언하기 바란다.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도 이 정책은 추진되는 것이기에, 보건복지부가 미리 준비 작업에 착수한다면 어린이 병원비를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하는 새로운 복지 역사가 2018년에 열릴 것이다. 성공 경험을 갖는 아래로부터 복지 운동,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에서 이뤄보자.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어린이병원비 국가보장 국민 서명 운동 공동 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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