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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이 청년 결혼시키는 게 제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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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이 청년 결혼시키는 게 제 목표입니다"

[전홍기혜 기자의 '세 가지'] ⑦ 심상정을 만든 사건과 사람 '3'

앞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참가한 문재인, 안희정, 이재명 후보에 이어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 측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1) 000의 사건 세 가지, 2) 000을 만든 세 사람, 3) 000이 바꿀 미래 세 가지.

후보들이 보내온 답변에 맞춰 한 후보당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심상정 후보의 '세 가지'입니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는 2017년 대선에 출마한 유일한 원내 진보정당 후보입니다. 문재인(더불어민주당)-안철수(국민의당) 양강 구도로 진행되는 이번 대선에서 심 후보는 지지율 3% 안팎으로 4~5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 후보는 "촛불 민심을 받들 수 있는 후보"를 자처하면서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이번 선거의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심 후보의 과제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완주'와 '의미 있는 득표율'입니다. 백기완(14대 대선), 권영길(15~17대 대선)에 이은 세 번째 진보진영 대선 주자인 그는 2012년 사퇴한 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그는 진보정의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지만, 후보 등록 직전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지지하면서 물러났습니다. 이번에도 문-안 두 후보가 막판까지 박빙의 승부를 벌일 경우, 사퇴 압박이 있지 않겠냐는 관측이 있습니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가 안철수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하지 않겠냐는 관측과 거울상입니다.

완주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사퇴 압력을 뒷받침하는 '사표론'을 잠재울 만큼의 득표율입니다. 정의당은 그 숫자를 '5%'로 보고 있습니다. 역대 진보 후보 중 최다 득표율은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얻은 3.9%(95만7148표)였습니다. 100만 표를 훌쩍 넘기겠다는 목표입니다.

심 후보는 지난 13일 있었던 첫 대선후보 TV토론에서 분명한 색깔과 존재감을 보여줬습니다. 이제 채 한 달이 남지 않은 대선 기간 그가 진보정당을 수십 년간 괴롭혔던 '사표론'을 잠재우고 '2016년 촛불 혁명'의 민심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때입니다.

심상정 후보가 꼽은 세 가지 사건은 다른 후보와 차별되는 그의 삶의 궤적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사건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입니다. 서울대 출신인 그는 1980년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하면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 '2초 김고은'이란 별명을 얻게 한 대학 시절 심상정. ⓒ심상정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일간지 1면에 처음 보도된 노동사건이었다. 내가 언론과 맺은 첫 인연도 구로동맹파업이었다. 그해 6월 KBS <9시뉴스>에 '구로동맹파업 배후 주모자 검거에 현상금 500만 원, 일계급 특진'을 걸었다는 내용과 내 증명사진이 보도됐다."

이 사건의 배후 주모자로 지목된 심 후보는 이후 9년 동안 지명수배자로 지냈습니다. 또 1300명의 해고 및 강제사직, 44명의 구속, 부상자 130명이라는 큰 파장을 낳은 이 사건으로 심 후보는 노동운동가로서 삶을 살게 됐습니다.

▲ 금속노조 사무처장을 지낸 심 후보는 당시 '철의 여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단 있는 노동운동가였다. ⓒ심상정

'전설적인 여성 노동운동가'인 그가 정치인이 된 것은 2004년 총선을 통해서입니다. 이때 처음 도입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덕분에 민주노동당은 10석을 얻으면서 원내에 진출하게 됩니다. 심 후보는 당시 비례 순번 1번으로 의원이 됐습니다. 심 후보는 2004년 국회 진출을 인생 두 번째 사건으로 꼽으면서 "노동자에게도 정당과 국회의원이 있고, 노동자도 정치를 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충격이었다"며 "'저 당이 우리 당이다', '노동자도 정치의 주인일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난 헌신과 열정을 불러일으켰다"고 회고했습니다. 이때 같이 의회에 입성한 노회찬 의원과 함께 심 후보는 진보 정당의 '스타 정치인'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됐습니다.

세 번째 사건은 '2017 대선 출마'입니다. 심 후보는 완주 의지를 거듭 밝힙니다. 그는 "그간 대선에 출마한 진보정당 후보는 진보적 시민들의 '비판적 지지'의 대상이었지만 이번 대선은 다르다"며 "정권 교체는 이미 국민들이 해놓았다. 개혁 경쟁으로 승부할 수 있는 선거"라고 이번 대선의 차별점에 대해 말합니다.

"내게는 이번 대선을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그 꿈은 대통령보다, 정권교체보다 더 큰 꿈이다. 바로 60년 대한민국의 노선을 대전환하는 것이다. 승자독식, 성장 제일주의의 대한민국 사회를 확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이 당당한 나라, 우리 청년들이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다."

"내 삶을 바꾸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노동'을 정치의 키워드로 삼고 있는 심 후보가 선택한 '세 사람'도 타 후보와 차이를 보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전태일 열사입니다.

1970년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에 대해 심 후보는 "내 인생의 들불이자 나침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스물두 살 때 미싱사 자격증을 따게 된 이유가 전태일 열사 때문이었다. 낮은 곳을 향한 끝없는 연민과 인간 해방을 향한 불굴의 의지로 대변되는 전태일 정신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와 진보의 길을 배웠다."

두 번째 사람은 남편 이승배 씨입니다. 이 씨는 2004년 심 후보가 국회의원이 된 이후 14년간 가사일을 도맡아 해왔고, 이번 선거 과정에서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심 후보는 많은 여성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남편 이승배 씨와 함께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SBS <양세형의 숏터뷰>. ⓒSBS 화면 캡처

"남편이 집안 살림을 책임져 주면서 자유로운 의정 활동이 가능했다. 남편에게 제일 고마운 점은 제가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 했는데 남편이 아들과 굉장히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래서 아들이 밝고 반듯하게 자라줬다는 점이다."


세 번째 사람은 청년 노동자 임선재 씨입니다. 임 씨는 지난 9일 '여의도 벚꽃축제' 마지막 날에 4년 동안 사귄 여자 친구와 함께 결혼 예복을 입고 동료들과 함께 "최저임금을 1만 원으로 올려달라"는 퍼포먼스를 했습니다. 임 씨는 지하철 스크린도어 유지·보수업체에서 일합니다. 19세 청년이 서울 구의역에서 사고를 당했던 바로 그 일입니다. 임 씨는 야간노동까지 해야 한 달에 190만 원 정도를 버는데 이 돈으로는 결혼을 할 수 없다며 최저임금 1만 원 인상을 요구했습니다. 심 후보는 이 시대 수 많은 청년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임 씨의 얘기를 매우 가슴 아프게 들었다고 합니다.

"이 청년의 소박한 꿈을 이뤄주는, 청년이 사랑하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 이 친구 결혼시키는 게 내 목표다."


▲ '최저임금 1만 원' 인상을 요구하는 '장미파업'이 5월 1일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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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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