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 재래시장 상인 150여명과 슈퍼마켓 상인 50명 등 200여 명이 무더기로 사업자 등록증을 반납하고, 인천 상인들은 홈플러스의 기업형 슈퍼마켓(SSM) 진출을 막기 위해 사업조정신청을 하는 등 대기업의 무차별적인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 사업 확장에 대한 상인들의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옥련점의 개점을 막기 위한 인천상인들의 사업조정신청은 중소기업중앙회가 이를 받아들여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견되는 지역상인들과 대기업 유통업체간 싸움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일 <조선일보>의 경제섹션 머릿기사로 실린 서울 중랑구 망우동 우림시장 르포는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였다. 전국의 상인들이 대형마트와 SSM 때문에 죽겠다고 하소연하는데 "대형마트가 겁나지 않는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상인들이 있다니….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서 우림시장이 현대식 서비스로 대형마트와 싸움에서 이겨왔다고 소개했다. 즉석복권 등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매출이 30%정도 늘었다고도 했다. 정말 현대화된 재래시장은 과연 대기업의 공세를 잘 막고 내고 있을까? 그렇다면 성공 비결은 뭘까?
우림시장을 찾게 된 것은 이런 궁금증 때문이었다. 혹시 <조선일보> 기사가 혹시 지나치게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킨 것은 아닌지 의심도 했다. 얼마전 재래시장을 찾아 상인들과 점심을 함께 하며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형마트에 대한 법적 규제를 요구하는 상인들에게 이 대통령은 "법적 규제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직거래 등 '경쟁력 강화'였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도 최근 이마트의 기업형 슈퍼마켓 사업 진출 의사를 밝히며 재래시장 및 영세상인들에게 한 조언이 '경쟁력 강화'였다. <조선일보>의 기사는 그렇게 이명박 대통령과 대기업 유통업체 CEO의 인식과 맞닿아 있었다.
"<조선> 기사는 너무 나갔다"
지난 21일 오후 4시 우림시범시장. 뜨거운 햇볕이 조금 수그러들고 주부들이 저녁거리를 사기위해 나오는 시간이다. <조선일보> 기사에 소개된 것처럼 입구에는 경품 안내판이 서있다.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시장 안팎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장 아케이드(비가림막) 안은 여기저기 흥정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상당수 상인이 전날 <조선일보> 기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들은 기사에 대해 "일부 옳은 표현도 있지만 왜곡된 내용이 많다"고 말했다.
▲ 즉석복권, 할인쿠폰 등 전략으로 손님을 끌고 있다는 우림시장의 내부. ⓒ프레시안 |
우림시장 조합 수석이사 김종규 씨는 "분명히 열흘 전에 (<조선일보> 기사에 소개된) '수박행사'를 통해 잠시 손님들이 많이 찾아 왔지만 그 후로는 다시 비슷해졌다"며 "그나마 우리는 재래시장 중에서는 잘 되는 곳이 맞다. 하지만 "(조선일보) 기사는 너무 나갔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점포 중에 비어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주변 대형마트에 대항하기 위한 우림시장의 현대화는 5년 전부터 시행된 것. 공공화장실, 주차장, 배달승합차가 운영된 것은 2003년부터이고, 마트용 카트를 비치한 것은 2002년, 시장통로에 천장을 단 것은 1996년이라고 김 씨는 밝혔다.
SSM 판매 여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상인들
무엇보다 상인들은 "지금 문제는 대형마트가 아니라 기업형 슈퍼마켓"이라며 답답해했다.
반찬가게를 하는 김영자(가명) 씨는 "여기 앞에 슈퍼(홈플러스 익스프레스)가 문제"라며 "내가 파는 반찬을 거기서 다 판다. 밤 12시까지 영업해서 평소의 반도 못 팔고 있다"고 울분을 터트렸다. 상인들은 기업형 슈퍼마켓에서 파는 물건에 따라 가게의 손익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건어물 가게를 운영하는 이정숙(가명) 씨도 한마디 거들었다.
"대기업 마트(홈플러스 익스프레스)에서 고추를 빻거나 참기름을 짤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언니네(앞집) 참기름가게는 그런대로 장사가 돼요. 그런데 우리같이 건어물 파는 사람은 어려워요. 저 마트에서 우리(건어물) 것을 파니까…. 저거 생긴 다음에 밑에 가게들(남쪽 입구 쪽 가게) 손님들이 많이 줄었다고 하더라고요."
우림시범시장은 남북으로 길게 놓여있다. 시장의 남쪽 입구 부근은 북쪽 입구와 달리 눈에 띄게 한산했다.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망우점은 우림시장 남쪽 입구 맞은편에 지난 2007년 9월 영업을 시작했다. 이 매장은 공산품 외에 청과물 등을 팔고 있었으며, 매장 내부에는 정육점 코너도 있었다.
▲ 남쪽 입구에서 바라본 우림시장은 한산해 보인다. ⓒ프레시안 |
기업형 슈퍼마켓이 재래시장보단 동네슈퍼와 골목상권에 영향을 미친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시장상인들은 기업형 슈퍼마켓은 충분히 재래시장도 잠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기업의 대규모 유통망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일부 품목을 빼면 시장 물건과 가격 차이가 크지 않고, 시장처럼 돌아다니지 않고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림시장 상인들도 SSM 진출 막으려 관할 구청 찾아 갔었다"
이 씨는 "만약에 위쪽(북쪽)에도 그런 슈퍼가 들어서면 위에 가게 손님들도 많이 줄어들 것"이라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시장상인들이 기업형 슈퍼마켓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관할 구청을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우림시장 조합이사 김 씨는 "경기도 좋지 않고, 기업형 마트도 생겨서 최근에 손님이 줄어든 게 사실"이라며 "그나마 여기가 이 정도 유지되는 것은 단골손님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기 (홈플러스) 익스프레스가 개점하면서 한달 내내 동네에 홍보했는데 우리는 중소기업청에서 겨우 200~300만 원 받아 전단지를 돌릴 뿐이다"고 덧붙였다.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망우점은 시장 입구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오후 5시 마트 안은 십 여 명의 손님이 있었다. 점장에게 몇 가지 물어보려 했지만, 점장은 "인터뷰는 안되니 본사에 연락하라"고 말했다. 이후 전화 통화에서 삼성테스코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망우점의 최근 매장 실적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아파트, 대형마트와 SSM
우림시장 이외에 또 인근에 대형마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사가 잘 된다는 시장을 찾았다. '스타급 재래시장.' 한 언론사가 붙여준 마포에 있는 망원시장의 별명이다. 22일 저녁 7시 망원역에서 시장입구로 가는 거리부터 사람들이 가득했다. 다세대 주택들이 가득한 망원동. 주민들은 200미터 남짓한 이 거리를 따라 퇴근을 하거나 외식하기 위해 주변 식당을 둘러보고 있었다.
▲ '스타급 시장' 망원시장의 입구. ⓒ프레시안 |
'스타급' 시장은 입구에서부터 달랐다. 입구에 달려 있는 대형 LED전광판에는 광고가 나오고, 시장 길은 비교적 넓지만 벌써 만원이었다. 연면적 2297㎡의 망원시장은 지난해 9월 현대화 공사를 한 이후 20%가량 매출이 늘었다. 이 때 편의시설과 휴게시설을 일부 확충했다.
시장상인들 대부분이 성공 이유로 "값이 싸고 물건 순환이 좋아서 싱싱한 것만 파니까 손님들이 몰린다"는 점을 들었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김옥순(가명) 씨는 "우리 집이 싸고 맛있는 거 아니까 항상 단골들이 온다"며 "요즘 주부들이 똑똑해서 물건 일일이 다 확인하기 때문에 쉽게 장사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망원시장 상인조합 전종철 이사는 "우리도 대형마트 입점 초기에는 위기감을 느꼈는데 젊은 상인들이 많아서인지 '한번 싸워보자'는 생각들이 많았다"며 "같은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물품을 들여오는 등 조합 차원에서 자구책을 마련해 단가를 낮췄다. "대형마트보다 우리 물건이 품질도 더 좋고 값도 싸다"라고 강조했다.
상인들은 지역민들의 구매력이 높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망원시장과 2차선 도로를 두고 맞닿은 월드컵시장에서 유기농식품점을 운영하는 이형곤 씨(39)는 "우리 시장(망원, 월드컵)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망원동 뿐만 아니라 서교동, 성산동, 합정동에도 다 있다. 지역별로 다양한 소득의 분들이 많이 찾는다"며 "처음 장사할 때는 '이게 될까' 싶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장사가 잘 된다"고 말했다.
"재래시장 찾는 이유? 습관이죠"
상인들이 제품의 질과 가격을 성공요인으로 꼽았다면 소비자들은 '동네와 가깝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했다.
유모차를 끌면서 부인이 과일을 사는 모습을 지켜보던 회사원 박광수 씨(가명)는 "왜 마트 대신 시장을 찾느냐"는 질문에 "습관"이라고 답했다.
"저녁 때 애들이 집에서 답답해하면 이 시장에 나와요. 근처 공원도 없고, 여기 걸으면서 구경도 하고 산책할 수 있잖아요. 아마 이 시간에 나온 사람들은 다들 그럴 거예요. 부인도 여기가 편하고 가까우니까 평일이면 나와요. 주말이면 홈플러스로 가서 쇼핑하지만요. 단골가게는 특별히 없는데요?"
망원시장은 지리적으로 차별성을 가진다. 망원역에서 인근 주택가로 가는 길목에 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한강변이 가까워 집값이 많이 올랐지만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지 않고 여전히 단독 주택단지가 남아 있다. 지역에서 30년 넘게 곡물을 팔았다는 김문자(가명) 씨는 "여기 건설회사에서 땅을 다 사서 아파트 지으려고 했는데 지역민들이 반대해서 못 들어왔다. 망원동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 망원역에서 망원시장으로 들어가는 길. 다세대 주택단지에서 주민들은 망원시장 앞을 지날 수 밖에 없다. ⓒ프레시안 |
오랜 기간 지역에 터를 잡고 살면서 생활패턴이 고정된 사람들이 꾸준히 재래시장을 집앞 골목 드나들 듯 드나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통상 도로가 새로 나고 거주민이 대거 물갈이되면서 지역 접근로와 생활환경, 거주민의 생활습관 등 모든 것이 바뀐다. 물건을 소비하는 방식도 이런 거주민의 특성, 생활환경 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홍인옥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재래시장을 비롯해 동네상권은 필연적으로 지역민의 생활습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며 "인근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시장을 찾을 수 있는 주변환경이 조성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홍 연구원은 "대형마트나 아파트는 기본적으로 자가용 운반, 일괄구매라는 특성을 지닌다"며 "재래시장과는 대립되는 생활 방식"이라고 말했다.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의 문제가 대기업과 영세상인 사이의 '상권 다툼'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 이유다. '골리앗' 유통업체들이 짓밟은 것은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던 '시장' 그 자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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