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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

[기고] 최종 수호자는 헌재가 아니라 시민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끝이 아니다. 새로운 헌법적 논쟁의 시작일 뿐이다.

헌법적 논쟁이 여전히 계속 중이라면, 미디어법의 위헌 논쟁은 당연히 계속 중인 것이고, 미디어법 자체의 위헌 논쟁이 계속 중이라면 미디어 정책을 담을 대통령령에 대한 위법 논쟁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헌법의 위기는 공화정, 민주정의 위기

독일헌법학계에 유명한 논쟁이 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라는 논쟁이다. 헌법학자 칼 슈미트와 한스 켈젠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정치적 결단주의에 입각한 칼 슈미트는 통치권자인 대통령이 헌법의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법실증주의자인 켈젠은 당연히 비판적이었다. 제도로서의 헌법재판소가 당연히 헌법의 최종적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근본에는 주권자인 시민이 있다. 주권자인 시민의 헌법의지를 실현해내는 한도 내에서 헌법재판소가 있고, 헌법수호자가 있다. 이것이 헌법학계에 널리 통용되는 얘기다.

이제 이 논쟁이 21세기 한국에서 버전을 달리해 계속될 운명에 놓여 있다. 과연 헌법재판소는 우리 헌법의 최종적 수호자가 될 수 있는가. 되고 있는가. 헌법수호자 논쟁이 시작될 수밖에 없는 형편, 이는 곧 헌법의 위기를 의미한다. 헌법의 위기는 곧 공화정의 위기다. 민주정의 위기다.

헌재결정문을 다시 짚어보니

수없이 반복되어진 헌재결정문을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맨 먼저 강조되어야할 사실은 헌재가 이번 미디어법과 관련된 의회의 국법상 행위가 헌법상의 적법절차 원칙을 침해했다고 본 점이다. 헌법상 일사부재의 원칙도 침해했다고 했다. 의회주의의 핵심절차를 위배했다는 것이다. 위헌이라는 것이다. 위법이 아니라, 위헌이라는 것이다.

의회주의는 대의주의고, 대의주의가 곧 민주주의라면 이번 미디어법 가결 선포 행위의 반헌법성·몰역사성을 이제는 시인해야 한다.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논쟁이지만, 오로지 논쟁을 위해 한 발짝 양보해보자. 9인의 재판관 중 3인은 가결선포행위 자체가 위법하므로 무효를 확인하거나 취소해야한다고 했고, 재판관 3인(최소한 2인)은 위헌위법에 책임이 있는 국회의장 또는 국회가 시정하라고 했다.

여기에다 이미 책임자이자 당사자이자 헌법기관인 국회의장은 누차 "헌재에서 미디어법 가결선포 과정에서 위법이 있었다고 결정하면, 스스로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고 했었다. 국회의장도 헌법재판소만큼이나 헌법의 수호자이다. 또 다른 헌법수호자가 이미 위헌, 위법 논란에 대한 책임과 기준을 공시했다. 헌법재판소법은 헌재의 모든 결정이 모든 헌법기관을 기속한다고 정했다. 이 법은 국회가 만들었다.

견제와 균형, 수평적 책임의 기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선거라는 수직적 책임 말고 의회와 행정부, 사법부와 헌법재판소들 사이에 수평적 책임이 상시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의회와 행정부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사법부와 헌법재판소가 제대로 견제와 균형을 잡아주어야 한다. 수평적 책임을 통해 권력기관들 사이의 전횡이 교정되고, 오로지 시민을 위한 시민의 헌법이 실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책임 구조가 잠자고 있다. 무시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예정하고 헌법이 부여해 둔 권리 위에 잠자고 있다.

헌법재판소야 그렇다 하더라도 위헌 사실을 지적받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은 또 다른 헌법기관인 국회와 국회의장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국회는 당장 미디어법에 대한 재논의를 시작해야 될 의무가 있다. 재논의에 게으른 자들은 당장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다시 읽어야 한다. 이것은 헌법적 숙제다.

헌법기관들의 헌법행위라고 해서 무조건 합헌은 아니다. 때로는 위법하거나 위헌일 수 있다. 이 때 헌법 절차를 통해 바르게 교정해 낼 수 있는지가 헌정국가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 자연과 환경의 자기조정기능과 마찬가지 맥락이다. 살아있는 자연이 스스로를 교정해내듯, 살아있는 헌법 역시 스스로의 교정 능력을 갖는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헌법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과점하고 있는 언론의 의무는?

헌법기관이 스스로 이를 조정해 낼 수 없다면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거의 과점하고 있는 언론기관이 나서야 한다. 언론의 자유는 시민의 자기지배를 촉진하기 위하여, 사상의 자유 시장을 통한 진실 발견을 도와주기 위하여, 자유를 증진하기 위하여, 관용을 기르기 위하여 보호된다.

다시 강조컨대 표현의 자유를 과점하고 있는 언론기관의 입장에서, 특히 대한민국 보수언론의 입장이라면, 이번 미디어법 논쟁은 곧 자신들의 문제이고 자신들이 곧 이해당사자이기 때문에 절대적 중립 내지는 '회피'가 요구됐다. 언론의 자유가 언론기관의 자유일 수 있고, 언론인의 자유일 수는 있겠지만, 언론사 사주나 언론 재벌의 자유일 수는 없다.

저명한 저널리스트 톰 플레이트는 자신의 저서 「어느 언론인의 고백」에서 "언론사의 목표가 비누 재벌의 목표와 다르지 않다면, 왜 언론사가 미국 수정헌법 제1조(표현의 자유)에 따라 운영되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정치적 자유의 중심에 표현의 자유가 있고, 그 자유의 과점에 언론기관이 있다. 그렇다면 언론 또한 제4부 혹은 5부의 권력으로서, 헌법적 수호자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언론의 책임을 묻는다. 특히 미디어법과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있는 언론기관의 책임을 묻는다.

헌법의 최종적 수호자는 시민

다시 묻고자 한다. 누가 헌법의 최종적 수호자인가. 어쩌면 물을 필요조차도 없는 어리석은 질문이다. 이제는 시민들이 직접 나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자는 제안이 있다. 또 다시 헌법재판을 제기하자는 것이다. 결론을 한번 예상해 보자. 과연 현재와 같은 헌재의 정치적 현실주의 앞에서 가능할까.

헌법재판의 특성 중 정치 재판성만이 강조되는 현재의 헌재가 이전 결정을 뛰어넘는 적극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정치적 소극주의'에 급급한 헌재가 시민의 예상을 뛰어넘어 기본권의 직접적 침해를 선언할 수 있을까. 헌법재판소도 아니고 의회도 아니고 행정부도 아니고, 언론기관도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헌법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는가. 누가 이 위헌성을 교정할 책임과 의무를 담보해야 하는가. 여기에 시민이 있다.

민주주의는 4년 혹은 5년마다 한 번 있는 직접선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시장을 내 손으로 뽑고, 시장경제가 돌아가고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민주주의야 말로 '앙상한 민주주의'다. 모든 헌법적 과거행위를 흘러간 강물처럼 여기고, 제발 조용히 생업에만 종사하면 좋겠다는 사고방식이야말로 민주주의 위기의 또 다른 얼굴이다. '정치는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시민들은 생업에만 종사하라'는 사고방식이야말로 공화정의 위기를 부채질 한다.

주권자를 관객으로 내모는 대표적 술책이다. 다른 한편 정치인들에게 선거를 통해 모든 것을 내맡겨둔 채, 단지 정치에 대한 비난과 불신만으로 주권자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은 없다. 바꾸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바꾸기에 앞서 감시해야 한다. 주권과 헌법해석에 대한 권한을 일상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공론의 절차를 통해 공동체의 생각을 모으고, 헌법적 의지를 현재의 정책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믿고 맡길 일이 따로 있다. 아니다 싶으면 나서야 한다. 공론의 이름으로 공동체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정책에 개입해야 한다. 헌법적 주권 위에 잠자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시민성 회복이고, 시민의 의무다.

후세인의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민주공화국에서 시민은 주권자요, 헌법해석의 최종 권력자요, 헌법의 수호자이다. 1인1표를 가진 평등한 주권자(主權者)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에서는 정치인이 CEO가 되고, 시민은 소비자이거나 주주에 그치고 만다. 주주가 된다 하더라도 1인1주가 아닌, 돈 많고 힘치고 만다연고 많은 사람이 주식 여러 주를 갖는 불평등한 주권자(株券者)다. 과연 우리는 어떤 주권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번 미디어법에 대한 시민의 의무는 분명하다.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의 기본권은 시대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또한 언제나 혁명과 혁명의 기본 원칙과 보조를 맞출 것이다."

이 말이 불편하다면 헌법과 미디어법을 다시 들춰보아야 한다. 한 문장 한 문장 따져보아야 한다. 헌법 위에 졸아서는 안 된다. 헌법의 수호자는 바로 주권자인 우리, 시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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