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대선 후보, 모두 탈핵 정책을 지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결정이 내려진 이후, 많은 이들의 예상처럼 정치권은 조기 대선 국면에 돌입하고 있다.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에 활성화된 한국의 탈핵운동은 2017년을 '탈핵 원년'으로 삼자고 선언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대선 후보를 대상으로 한 탈핵 정책 캠페인을 강화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대선 후보들이 호응하면서 "탈핵 에너지 전환" 정책 방향에 동의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탈핵운동의 중요한 진전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우선 탈핵 에너지 전환 국회의원 모임과 환경운동연합은 주요 대선 예비후보 캠프들과 함께 "원전을 넘어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에너지 사회를 위한 대선후보 공동정책"을 발표하였다(2017년 3월 23일).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를 비롯하여 7명의 후보들이 '원전 축소', '에너지 전환', '원전 안전' 그리고 '핵폐기물 안전관리'의 4가지 분야에서 9개의 정책을 약속하였다.
또한 핵없는사회를위한공동행동과 '탈핵 에너지 전환 시민사회 로드맵' 연구팀은 각 당의 대선 (예비)후보들에게 핵발전, 전력정책,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등에 관한 총 7개의 질의서를 보내 답변을 받아냈다. 그 결과 "후보별로 재검토와 백지화 등 세부적인 입장의 차이는 일부 있지만 절대 다수의 후보들이 핵발전소 중심의 전력정책과 연구개발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고 분석되었다(2017년 3월 27일).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23일의 대선후보 공동정책 발표에 함께하지 않아서 눈길을 끌었다. 심 후보가 이미 공약했던 것보다 느슨한 정책을 공약하는 자리에 함께 서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단다. 게다가 많은 후보들을 동참시킨다는 명분으로 탈핵운동 진영의 정책 요구를 후퇴시키지 않겠다는 핵없는사회를위한공동행동의 결정을 존중한 결과라고도 밝히고 있다. 40년 후에나 탈핵하겠다는 문재인 후보(2060년 탈핵)와 20여 년 후에 탈핵을 공약한 심상정 후보(2040년 탈핵)를 한 묶음으로 셈하는 것은 분명 올바른 일은 아닐 것이다.
에너지 분권과 지역 에너지 전환은 의제화 되지 않아
그런데 대선을 둘러싼 이런 움직임에서 아쉽게도 '에너지 분권’과 '지역 에너지 전환'의 의제는 충분히 부각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이번에 추진된 "탈핵 에너지 전환"에 관한 공동정책이나 질의서의 내용은 주로 신규 핵발발전소 '건설 중단'과 '백지화' 그리고 노후 원전의 수명연장 금지 및 폐쇄,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및 사용후 핵연료 처리 등에 초점을 두거나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탈핵 에너지 전환'이라는 용어에 '에너지 분권'과 '지역 에너지 전환'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의제들을 독립적으로 부각시켜야 할 필요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핵발전(과 석탄화력발전)에서 벗어난다는 '탈(post)'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 그것이 추진될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만, 적절하고 효과적인 에너지 전환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에너지 전환, 분산형 전원 그리고 에너지 분권
'에너지 전환'에 관한 고전적인 논의는 오일 쇼크를 배경으로 하여 1970년대 후반, 미국의 에머리 로빈스(Amory Lovins)이 주장하는 '경성 에너지 경로'와 '연성 에너지 경로'에 대한 토론으로 시작됐다. 그는 '경성 에너지 경로'는 환경 파괴, 자원 고갈 그리고 민주주의의 억압․제약 등을 유발하기 때문에 '연성 에너지 경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경성 에너지 경로'는 핵발전소 석탄발전소와 같은 대규모 중앙집중적 에너지 시스템의 성장을 의미하며, '연성 에너지 경로'는 재생에너지에 기반을 둔 소규모 지역분산적인 에너지 시스템으로의 분화를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환은 단지 기술 시스템만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밀접히 연계된 정치,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동시에 수반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즉, 사회-기술 시스템의 전환). 즉 작고 지역으로 분산된 재생에너지 기술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역적으로 소유, 통제, 운영하며 이에 관한 의사결정 권한이 지자체로 분산되고 지역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쿠시마 핵사고 및 밀양 송전탑 갈등의 여파 속에서 작성된 제2차 에너지 기본 계획에는 중요한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분산형 발전 시스템의 구축"이라는 정책 방향이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2035년까지 발전량의 15% 이상을 분산형으로 공급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분산형 발전 시스템이 무엇인가를 논의하면서 주로 기술적인 차원을 다루었을 뿐, 이와 병행되어야 할 '에너지 분권'에 관한 논의는 생략하였다. 작고 지역적으로 분산된 발전원의 확대와 이를 통한 전력의 공급의 문제 역시도 여전히 중앙정부, 한전, 일부 기업들이 결정하고 집행해야 할 사안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역 에너지 전환과 전력산업 구조 개편
'지역 에너지 전환'이라는 용어를 심상치 않게 쓰고 있지만(예를 들어서, 2015년 11월의 서울-경기-충남-제주의 '지역 에너지 전환 공동 선언'), 그 의미는 아직 모호한 상황이다. 지역 에너지 전환에 대한 논의에서 에너지시스템을 지역적, 기술적으로 분산, 독립시키겠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이에 필요한 제도 변화, 행정권한의 분산, 재정 및 기술적 역량의 확보 등이라는 점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쟁점은 '지역 에너지(계획/시스템)'가 '국가 에너지(계획/시스템)'의 보조적/보완적 것인지 아니면 대체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실질적인 차원에서 보조적/보완적 역할을 하도록 해야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대체적 역할을 하도록 구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경기도가 2015년에 선언한 <에너지비전 2030>에 담았던 '에너지 독립'이라는 표현이 단지 레토릭이 아니라, 실제로 추구해야 할 목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토론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전력산업 구조 개편 문제라고 생각한다. 즉 지역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분권에 합당하며 이를 가능하도록 만드는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거대 중앙집중적/집권적 에너지(전략) 시스템은 한전이라는 국가독점적 공기업과 산하 발전자회사에 의해서 실행, 유지되고 있으며, 이들은 탈핵 에너지 전환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저항하면서 현재의 시스템을 옹호․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는 '원자력 마피아'와 같은 용어가 이런 사실의 일부를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유럽에서 논의되고 있는 '지속 가능성 전환'에 관한 연구들은 새로운 시스템의 등장을 촉진․지원하는 정책뿐만 아니라, 기존의 시스템을 해체하는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행의 에너지(전력)시스템은 핵발전/화석발전 및 송배전 기술뿐만 아니라, 전원개발촉진법과 같은 제도적 요소와 함께 한전이라는 국가독점 기업의 조직적 요소 등이 상호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 시스템의 이들 요소들은 서로를 강화하면서 변화를 거부한 채 잠겨져(lock-in) 있다. 이것을 약화, 해체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
에너지 전환과 전력산업의 지역화/공유화 전략
그 노력 중 하나로 국가독점적인 한전의 지배와 일부 민간 대기업에 참여로 묘사할 수 있는 한국 전력산업을 지역 에너지 전환과 전력산업의 '사회 공공성'에 부합하게 재편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회 공공성'은 값싼 전기의 안정적 공급이라는 개발주의 시대의 공공성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한전의 배전/판매 부문을 분할하고 지역별로 설립되는 지역에너지공사에 의해서 소유, 운영, 통제되도록 개편을 추진하는 안에 대해서 토론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방향의 전력산업 구조개편 구상을 '전력산업의 지역화/공유화 전략'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이런 전략은 에너지 전환의 선구적인 국가인 독일의 '재지역화(re-municipalization)'의 경험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유럽연합 차원에서 요구받은 전력자유화 조치 이후에, 독일의 많은 지자체들은 해당 주민들에게 전력을 공급하는 사업의 운영권을 민간 거대기업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들은 전력망 관리를 위한 투자에 게을리 하여 정전 등이 발생하는 일이 잦음에도 전기요금은 계속 인상하는 반면, 핵발전과 석탄발전을 버리고 재생에너지 전기를 공급하라는 주민들의 요구는 외면하고 있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많은 지자체들이 계약 기간이 종료되는 시점에서 기업들로부터 운영권을 되찾고 에너지공기업(Stadtwerk, 시영회사)을 설립하여 직접 전력을 공급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2013년에 주민투표를 통해서 전력 운영권을 되찾은, 대도시 함부르크의 사례가 유명하다. 1999년에 설립된 뮌헨에너지공사도 두드러진다. 이 공사는 뮌헨시가 100% 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전력의 생산, 배전과 판매의 모든 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가스와 열, 그리고 교통 등 뮌헨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10년에 뮌헨시가 세운 목표에 따라서 2015년까지 2025년까지 도시 전체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독일 에너지 전환의 선구자이자 재생에너지의 아버지로 칭송되고 있는 고(故) 헤르만 셰어가 지역에너지공사에 대해서 "신속한 에너지 전환"을 위한 근본적인 전제이며, "자치 행정의 결정 권한을 재획득하고 민주주의에 새로운 자극을 줄 것"(<에너지 명령>, 251쪽)이라는 평가를 기억하고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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