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멀고 먼 하토야마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멀고 먼 하토야마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

[기고] 하토야마의 '우애(友愛)'는 박애(博愛)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수상의 정치철학의 핵심 키워드인 '우애'는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우애'보다는 '박애'에 가깝다.

"내가 우애를 말하면 다수의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나를 유약하게 보는 듯하다. (사실 그랬다. 1996년 하토야마가 민주당을 창당했을 때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그를 가리켜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우애는 이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의 슬로건인 자유, 평등, 박애에서 말하는 박애(fraternity)를 가리킨다(하토야마 유키오, 나의 정치철학, 월간 '보이스' 2009. 8. 10.)."

하토야마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난 8월 일본의 월간지 '보이스'에 하토야마의 글이 실렸다. 하토야마가 일본 수상에 취임하자 이 글은 전 세계로 번역돼 나갔다. 하토야마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 자료였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즈 등 미국 언론들도 이 글을 요약해서 소개했다.

"하지만 5300단어의 원문을 1300단어로 줄인 영어 번역문은 원문과는 달리 미국과 세계화를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장광설 같은 인상을 줬다. 그에 따라 미국 정책 담당자들 사이에서 하토야마가 미·일 동맹의 전면적인 재편을 고려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졌다.(뉴스위크 한국판 9월 30일자, The Real Yukio Hatoyama)" 물론 원문과 정확한 번역본이 알려지면서 오해는 정리됐다. 그럼에도 중국과 미국 사이의 교량역할을 하겠다는 하토야마의 외교안보 노선은 미국과 아시아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칼레르기에서 하토야마의 조부로, 다시 하토야마로

하토야마의 우애론은 그의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에게서 비롯됐다. 그의 조부는 1953년 '극단적인 좌익과 우익 이념을 피하는 우애혁명'을 주창했다. 일종의 제3의 길이었던 셈이다. 조부는 쿠덴호프 칼레르기(Nikolaus von Coudenhove-Kalergi)의 저서 「Totalitarian State Against Man(전체주의 국가 대 인간 : 인간을 거스르는 전체주의 국가)」를 「자유와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했는데, 이때 fraternity를 박애가 아닌 우애라고 번역했다. 다시 하토야마의 설명이다. "따라서 우애는 유약한 개념이 아니라 혁명의 기치를 수반한 전투적 개념인 것이다."

칼레르기는 1923년 「Pan-Europa」이라는 저서를 통해 범유럽 운동을 제창했다. 그는 일본 공사를 지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귀족과 일본 골동품 상의 딸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는데 에이지로라고 하는 일본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2차 대전 후 수상이 되기 직전 공직에서 추방됐던 그의 조부는 칼레르기의 서적을 읽어 나가던 중 특히 「자유와 인생」의 이론체계에 주목했다. 조부는 패전 이후 "기세를 더해가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양당에 대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관료파 요사다 정권을 타도해 당료파 하토야마 정권을 수립하는 기치로서 '우애'를 내걸었다. 그의 무기가 되는 '우애청년동지회강령(1953년)'은 그것의 단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그의 조부는 "우리는 자유주의 깃발아래서 우애혁명에 투신해 좌우양극단적인 사상을 배제하고 건전하고 명랑한 민주사회의 실현과 자주독립의 문화국가건설에 매진한다"고 말했다.

'자립과 공생의 원리'로서의 우애론의 현대화

하토야마는 조부의 '우애'의 이념이 전후 보수정당의 본류로서 계속 유지되었다고 평가한다. 우애론은 칼레르기에서 다시 자신의 조부에게로, 그리고 자민당의 기본노선으로 유지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했다. 냉전이 끝이 났다. 고도성장을 떠 받쳐온 자민당의 역사적 역할도 끝이 났다. 새로운 정치적 책임 세력이 요구됐다. 하토야마는 조부가 창당한 자민당을 탈당해 신당 사끼가게의 창당에 참가한 뒤 당수가 되어 민주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조부의 우애론도 다시 현대화된다. 하토야마는 1996년 9월 11일 구 민주당 창당 당시 이때 이미 창당선언문에 '우애'정신을 집어넣었다.

13년이 흘렀다. "그 시기동안 냉전 후 일본은 미국발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 하의 시장원리주의에 계속 농락당했다." 2009년 5월 16일 밤 하토야마는 민주당 대표 선거에 임하면서 "모두와 더불어 사는 사회, '우애'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정권교체를 이루고 싶다"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현재의 하토야마에게 있어 '우애'란 무엇일까. "그것은 정치의 방향을 판단하는 나침반이며 정책을 결정할 때의 판단 기준이다. 그리고 우리가 목표로 하는 '자립과 공생의 시대'를 지지하는 시대정신이라고도 믿고 있다." 하토야마는 조부의 '우애'를 '자립과 공생의 원리'라고 재정의했다.

그렇다면 '우애'의 정치철학은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을까.
하나는 시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나 공생의 경제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둘은 글로벌화에 대한 보완으로 지방자치를 중시하는 지역주권국가로 가자는 것이다.
셋은 민족주의를 억제하는 동아시아공동체를 창조하겠다는 것이다. 미일안보체제를 일본외교의 기본 축으로 유지하되, 아시아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살려 경제협력과 안전보장의 체제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이다.

미·중 양대 패권국가 사이의 균형자로서의 일본

하토야마는 미국의 종언을 예감한다.

"이라크 전쟁의 실패와 금융위기에 의해서 미국 주도의 글로벌리즘의 시대는 끝났으며, 세계는 미국 일극지배의 시대로부터 벗어나 다극화의 시대가 다가올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향후 2~30년 동안에도 그 군사적 경제적인 실력은 세계의 제일일 것이다."

하토야마는 중국의 부상을 예감한다. "군사력을 확대하면서 경제강대국화해 가는 일도 불가피한 추세다. 일본이 경제 규모로 중국에 추월당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양대 패권국가 사이에서 일본의 국익은 어떻게 지키겠다는 것일까.

하토야마는 희망한다.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방종은 가능한 한 억제"하되 "눈앞에 펼쳐지는 중국의 군사적 위협은 감소시키면서 그 거대화 하고 있는 경제활동의 질서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안은 아시아국가들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벗어나 EU와 같은 공동체의 길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 균형의 중심에 일본이 서겠다는 것이다. 하토야마 총리의 안보전략 자문역인 데라시마 지쓰로 일본총합연구소 회장은 '문예춘추' 10월호에서 미국으로 기울어진 일본의 전략적 무게중심을 조정해 미·일·중 3국의 관계를 '정삼각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3국 사이의 견제와 균형의 관계를 정립함과 동시에 일본이 그 무게중심에 위치하겠다는 발상이다.

하토야마는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이야말로 "일본헌법이 이상으로 한 평화주의, 국제협조주의를 실천해나가는 길인 동시에 미중 양대국 사이에서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자립을 지켜 국익에 이바지하는 길"이 될 것이며, "또 그것은 일찍이 칼레르기가 주장한 '우애 혁명'의 현대적 전개라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부딪힌 하토야마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

지난 10일 중국 베이징에서 한·중·일 3국 정상회의가 열렸다. 하토야마는 "일본은 지금까지 미국에 너무 의존해왔다"라는 말까지 했다. 자신의 우애론의 외교안보 분야의 핵심 비전에 해당하는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에 대한 호소였다. 중국은 예상보다 차갑게 반응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동아시아에 기존 매커니즘은 많이 있다"고 했다.

하루 전 서울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의 한국쪽 반응과는 많이 달랐다. 당시 하토야마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그랜드 바겐'에 대해 지지했고, 이 대통령은 하토야마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에 대해 지지했다. (당시 하토야마는 이 대통령의 '그랜드 바겐' 속에는 일본인 납치범 문제가 포함돼 있음을 확인했다며 납치범 문제를 끼워 넣었었다. 사실상 지지의 전제조건화 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하토야마는 한중일 정상회담에서는 각 나라마다 북핵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이 같지는 않다고 표현하는 방식으로 애둘러 '그랜드 바겐'에 대한 지지를 조정했다.)

결국 3국 공동성명에는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이 '장기적인 목표'로 명기되는 데 그쳤다. '3국간 고위급 접촉 및 전략적 대화 노력을 경주하며, 상생의 협력적 동반자 관계를 지향'하자는 정도가 합의됐을 뿐이다. 일본의 지지통신은 이를 두고 "미국을 배제한 공동체 구상의 현실성과 관련해 중국은 회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토야마의 구상이 현실의 벽에 부닥치는 이유는

이렇듯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의 길은 험난하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첫째, 과거에 대한 반성의 결여다. 유럽의 EU 구상은 독일의 철저한 반성과 영토 등을 포함한 기득권 포기가 전제됐다. 하지만 일본은 반성도, 기득권 포기도 없다. 무라야마 담화 수준의 사과는 있을지언정 한반도 분단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부담할 생각이 없다. 주변국의 동의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둘째, 과연 일본이 미일동맹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한·미·일·호(주)로 이어지는 군사안보의 축이 한미일 간의 축성과 공존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한국 또한 노무현 행정부에서 이명박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전략동맹에 대한 깊숙한 합의를 통해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을 전면적으로 수용했다. '동북아균형자론'을 포기하고 한미전략동맹 노선을 채택한 것이다. 이 점에서는 한미동맹도 마찬가지고 미호동맹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중미 패권국가 사이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일본이 자임하고 나설 때 기존 한미일호 동맹과 새로운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지난 7일 일본의 오카다 외상은 한중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도쿄 외국특파원협회 강연에 나섰다. 이 자리에서 오카다 외상은 동아시아공동체의 구성국으로 "일본과 중국·한국·동남아시아국가연합·인도·호주·뉴질랜드 등을 상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구상에 미국이 빠진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힌 첫 번째 발언이다. 구상 속에 내재된 일이었지만, 발언이 주는 충격은 상당했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이 배제된 구상의 현실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일본은 늘 그렇듯 미국이 일본에서 손을 떼고 중국과 손을 잡게 되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한다. 이에 반해 중국은 당분간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을 희망한다. 미국과의 대립보다는 협력을 원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의 입장이다. 당분간은 일본보다 중국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넷째, 동북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일본과 중국 사이의 견제가 결국은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어렵게 할 것이다. 하토야마는 지난 달 21일 뉴욕에서 열린 중·일 정상회담에서도, 가스유전을 둘러싸고 양국이 분쟁 중인 동중국해를 "우애의 바다로 만들자"고 했다. 하지만 중국이 이런 구상에 섣불리 동의할 리 없다. 가스유전을 공동으로 개발하자는 제안에 대해서도 여전히 부정적이다. 시작단계에서부터 논의를 차단하려는 중국 의지는 분명해 보인다.

다섯째, 자칫 이상주의라는 비판에 정체될 수 있다. 뉴스위크는 "하토야마는 북한의 핵프로그램 같은 지역 안정을 저해하는 현안에 '우애'개념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물으면 종종 얼버무리기도 한다"고 했다. 바로 그 점이다. 일본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에 대해 강경입장을 주도해왔다. 이런 입장은 지난 9월 24일 국제무대의 첫 데뷔장인 유엔 총회 본회의 연설에서도 반복됐다. 기존 자민당 노선과 어떠한 차이도 없었다. 다만 유화의 여지는 남겼다. "북·일 평양선언에 따라 납치·핵·미사일 등 현안을 포괄적으로 해결하고 불행한 과거를 성의 있게 청산해 국교 정상화를 도모하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하토야마는 자국민에 대한 납치범 문제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결국 외교적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동북아의 조정자를 자임하면서도 동북아 최대의 핵심현안인 북핵문제에 대해 어떠한 제안이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면 어떻게 구상을 현실로 만들어 나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역사적 이상주의는 필요하다. 하토야마 가문의 오랜 숙제이고 하토야마 수상 개인의 정치적 이상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분명 안타까운 구상이다. 언젠가는 그렇게 가야하고 누군가는 시작해야 한다. 비록 여리고 가냘픈 싹이지만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은 키워나가야 한다. 특히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사이의 반도국가로서 끊임없이 분쟁과 세력 균형 속에 시달려 온 우리 한반도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토야마는 자신의 에세이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오늘날 'EU의 아버지'라고 칭송되는 쿠덴호프 칼레르기는 85년 전 「범유럽」을 간행했을 때 '모든 위대한 역사적 사건은 유토피아로 시작되어 현실로서 끝났다', 그리고 '하나의 생각이 유토피아에 머무르는지 현실이 될 수 있는지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수와 실행력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분명한 역사적 반성을 전제로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은 계속될 필요가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