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소위 '민주‧개혁‧진보' 진영에 속하는 정치인들의 지도력이 부재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는 "지금 야당은 대중의 의사를 앞장서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의회가 국민에게 끌려다니고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도 의회보다는 국민의 힘이라고 봐야 한다. 탄핵이 이루어진 것은 야당이 주도적으로 했다기 보다는 새누리당 내 수도권 의원들이 민심에 '앗 뜨거'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이러한 민심을 이어받아 다음 정권이 적폐 청산에 나서야 하지만, 한 번에 모든 적폐를 해소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교육이나 사법, 언론, 경제 등 모든 분야에 적폐가 다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만 청산해도 5년 단임 대통령은 엄청 큰 일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한 교수는 "계급 불평등으로 상징되는 '헬조선'을 극복하는 것과 함께 분단도 여기에 묶여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이를 함께 타파하려는 비전을 가진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왜 20대가 2년 동안 군대에 있어야 하고 그들에게 최저임금도 주지 않는 것인가? 강바닥에 22조 원씩 갖다 박으면서, 군 의무복무 하고 제대하는 사람들한테 대학 등록금이라도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면서 "분단을 내부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고 이를 극복함으로써 남쪽 사람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민주주의, 분단 등과 관련한 문제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힘을 얻으려면 이 문제가 어떻게 먹고사는 문제와 연관돼있는지, 어떻게 민생과 연결돼있는지 그 고리를 보여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당장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취임 2~3달 안에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누가 당선되는 여소야대 국면을 피할 수 없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웅크리고 있던 보수 세력이 어떻게든 반격의 기회를 노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한 교수는 과거 민주화운동 시절이나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와는 달리 지금은 1000만 명이 넘는 '촛불 시민'들과 언론, 노조, 시민사회 등이 살아있다면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거리의 정치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고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제도 정치를 강력하게 견인하고 자극하는 장치로서 시민들이 나오는데, 이 시민들이 동원돼서 나오는 시민들은 아니다. 국민주권이라는 원칙 하에 깨어있는 시민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13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인터뷰 1편 : "헌재는 보수체제 유지를 위해 박근혜를 파면했다")
프레시안 : 끓어오르는 국민의 분노를 이대로 놔두면 모두가 망한다는 생각에 헌재가 어쩔 수 없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을 내린 것으로 봐야할 것 같은데,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소위 민주‧개혁‧진보 진영에 속하는 정치인들의 지도력이 부재했던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한홍구 : 누구의 지시 받아서 광장에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지도력에 대한 기준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이미 이 진영은 김대중-노무현 없이 강을 건너야 하는 상황이 됐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시대의 격동을 온몸으로 받아 안았던 인물이다. 대통령으로서는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지만 적어도 정치인으로서는 그렇다. 그런데 이런 인물들이 또 나올 수 있을까?
김대중이나 노무현 같은 지도자가 없다는 점 이외에 또 하나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다. 지금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과제는 김대중이나 노무현 같은 걸출한 지도자가 각각 5년간 집권하고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답답했던 것은 야당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4월 총선과 가장 유사했던 선거가 1978년 10대 총선이다. 당시 민심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아직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상황에서 신민당이나 김영삼 총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와 비교해보면 지금 야당은 앞장서서 대중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의회가 국민에게 끌려다니고 있는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도 의회보다는 국민의 힘이라고 봐야 한다. 탄핵이 이루어진 것은 야당이 주도적으로 했다기 보다는 새누리당 내 수도권 의원들이 민심에 '앗 뜨거' 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사람들은 이번 탄핵을 계기로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지만, 야당은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이번 대선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를 비롯한 야권 세력은 야권의 공동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안보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보수세력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과연 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개혁적인 정부가 세워질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전망도 나온다.
한홍구 : 적폐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본다. 다만 욕심을 내지 말았으면 좋겠다. 교육이나 사법, 언론, 경제 등 모든 분야에 적폐가 다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만 청산해도 5년 단임 대통령은 엄청 큰 일을 한 것이다. 적폐를 완전히 청산하는 것은 일종의 '꿈'이다.
그래서 민주‧개혁‧진보진영이 30년 집권 계획을 세우고 그 안에서 분단문제, 경제 불균형 문제, 교육 문제 등을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본다. 또 이를 해결하는 핵심 고리가 검찰 개혁이라고 생각하는데, 5년 짜리 정부가 검찰 개혁만 잘해도 아주 큰 성과를 냈다고 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박영수 특검으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은 검찰은 특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검찰이 사활을 걸고 달려들 가능성이 높은데, 그걸 보고 '검찰 많이 좋아졌네'라고 생각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활을 걸고 달려들 수 있도록 제도화가 뒷받침돼야 한다.
5월 대선에서 민주진영이 집권한다 하더라도 더위가 가시기 전에 위기가 올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보수도 어떻게든 반격의 기회를 노릴 것이고, 집권당이 될 가능성이 큰 더불어민주당과 다른 야당의 공조나 협력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과거 민주화운동 시절이나 김대중-노무현 집권 때와 달리 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그 때는 없었던 1000만의 촛불 시민이 있다. 유신 때만 해도 500명이 모인 적이 없었다. 또 언론도, 노조도, 시민사회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런 요소들이 살아있지 않나.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거리의 정치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고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제도 정치를 강력하게 견인하고 자극하는 장치로서 시민들이 나오는데, 이 시민들이 동원돼서 나오는 시민들은 아니다. 국민주권이라는 원칙 하에 깨어있는 시민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자산이다.
역설적이게도 세월호 사건을 통해 이 말도 안되는 대한민국호가 아직 침몰하지 않은 이유를 봤다. 대통령이 저 모양이고 배의 항해사나 갑판장 격인 김기춘 전 실장이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저런 정도의 인물이라면 진작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가라앉았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박지영 같은 비정규직 선원이 있었다. 높은 직위에 있던 사람들은 무책임하게 도망갔지만, 책임을 가지고 자리를 지켰던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끝까지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학교 선생님들이 계셨다. 세월호에 탑승한 전체 승객 중 선생님은 15명으로 비율은 3%이지만, 전체 미수습자 9명 중 2명이 선생님이었다. 22%의 비율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의인'이자, 곧 촛불 시민이다.
프레시안 : 많은 사람들이 개혁과제들을 얘기 하지만 유독 '정치개혁'은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근본적 전환을 바라는 민심과 제도권 정치인들의 현실인식과 청사진간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민심을 제도정치권에 제대로 반영하는 정치체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제도 정치권은 권력구조 개편을, 시민단체와 지자체 등은 기본권 강화와 지방분권 강화를 강조하면서 개헌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선거법 및 정당법 개혁을 골자로 하는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홍구 : 우리가 이렇게 자꾸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야 했던 것은 한국사회에서 정당정치 또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을 크게 혼내주면서 구성된 현재의 국회도 사실 민심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비정규직들의 고통이 국회에서 얼마나 반영될까? 비정규직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합치면 국민의 거의 절반에 가깝지만 국회에서 비정규직 문제에 진정 귀 기울이는 의원이 300명 중 한 50명은 될까?
대의민주주의를 인간이 찾아낸 제도 중 가장 좋은 제도라고 하지만,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는 한국만이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모순이 사람들을 계속 거리로 내몰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국회의원을 추첨을 해서 돌아가면서 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직접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강화하면서 대의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것이다.
국회가 입법기관이니 국회의원 중에는 법률 지식이나 특수한 분야의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건 입법의 방향이 잡힌 뒤에 실행해나갈 때 필요한 전문성이다. 입법의 전문성만이 아니라 정말 바닥 민심을 반영하여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를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거리에 모였던 우리가 왜 집으로 돌아갔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일정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항쟁 때 시민들이 요구했던 직선제를 정권이 받아줬다. 또 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학생들에 대해 항의하는 촛불을 들었을 때는 '반미감정을 가지면 어떠냐'는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국민은 새로운 국회를 만들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시민들이 뭘 더 해야 하나? 권력 다 만들어줬는데 시민들이 뭘 더 하겠나? 문제는 정당이 이러한 시민의 요구를 제대로 받아 안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대의제 민주주의를 하루아침에 개선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이나 비례대표제 개혁, 선거구 개편 등 민심을 제도정치에 반영하는 개혁을 해야 할 필요는 점점 커지고 있다.
분단체제 깨지 않으면 희망 없어
프레시안 : 이명박-박근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면서 말도 안되는 비방을 쏟아 부으며 정권을 잡았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개성공단 폐쇄와, 한일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등 눈에 띄는 잘못을 많이 했는데 야당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것 같다. 역사의식이 없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분단의식에 빠져있어서 그런 건가?
한홍구 : 그런 부분이 크다고 본다. 그런데 이제 민주당 내에서도 과감한 진보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단체제에 대해 민주당의 깃발을 들고 정면으로 도전하는 정치인이 등장해야 한다.
이제는 민주당 내에서 확실한 포지션으로 분단의 벽을 들이받아야 할 때다. 언제까지 진보와 보수 양쪽의 표가 다 필요하다고 양쪽을 다 기웃거리며 왔다갔다하다 양쪽에서 모두 외면받는 짓을 되풀이 하려는가? 노무현이 대중들의 열망을 끌고 나갔던 것처럼, 대중들의 바람을 결집시키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헬조선'을 극복하는 것과 함께 분단도 여기에 묶여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이를 함께 타파하려는 비전을 가진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 최근에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담론이 나오는데 경제와 안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다. 따로 갈 수가 없는 영역이다.
지금은 분단과 관련해서 지도자보다는 선지자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온몸을 내던지는 사람이 필요한 시기일수도 있다. 마치 노무현이 지역감정에 맞섰고 결국 그걸 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게 의미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흔히 '적폐'의 상징으로 부르는 소위 '친일파'는 해방 이후에도 한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다. 세계 2차대전 이후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세력이 집권한 나라는 우리와 베트남밖에 없다. 분단돼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바꾸지 못하고 21세기인 지금까지 흘러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로 승리해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감옥에도 보내봤고 박근혜 전 대통령도 탄핵했다. 굉장히 열심히 싸워온 것이긴 했는데, 이제 이를 제도화하고 세력을 교체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 정상적인 보수 진보의 대립 구도가 한국 사회에 만들어져야 한다.
지금 한국의 공안검사나 국정원 청사에서 공작을 하는 사람들이 만약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일을 했을까? 대상만 다를 뿐이지 공작을 하는 일은 똑같이 있을 것이다. 분단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분단이라는 허상을 가지고 싸우고 있는 셈이다. 이념과 냉전은 이미 세계적으로 끝났는데 우리만 여기에 발이 묶여 있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목욕을 해서 이러한 때를 벗겨내야 한다.
프레시안 : 관련해서 보수 세력의 분화가 '종북 몰이' 같은 것을 하지 않는 정상적인 정치로 가는 단초가 될 수 있을까?
한홍구 : 일시적인 분리인데 쉽지 않을 거라고 본다. 2004년에도 한나라당이 영남 '자민련'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지금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등 수구세력의 정치 생명을 온존시킬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부분은 보수의 선택이다. 그런데 기존 보수 세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같이 가장 위쪽에 있는 인물을 희생양으로 바치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다. 뿌리 깊은 지역주의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예전 새누리당에서 바른정당으로 갈라져 나온 의원들은 대부분 수도권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정치인들이다. 수도권에서는 1000~2000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동조하지 않으면 의원직을 유지하기 힘든 의원들은 나온 것이고, 이와 상관 없이 보수의 깃발만 들고 있으면 당선될 가능성이 큰 사람들은 지금의 자유한국당에 남은 것이다.
이런 사태의 원인은 지역주의의 공고함 때문인데, 이걸 깨려면 계급의식밖에 없다. 영남과 호남의 노동자들이 노동자라는 정체성으로 결합돼야만 지역주의를 깰 수 있다. 그러려면 결국 진보가 세력을 확장해야 하는데, 촛불 시민들은 한국사회에서 '진보는 아직 아니' 라며 이들을 밀어 넣었다. 총선에서도 새누리당이 저렇게 쪼그라들었는데 그 표가 진보정당으로는 많이 가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난 10여 년의 실험결과 대중들은 진보정당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크게는 분단이라는 제약, 가깝게는 민주노동당의 분열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2016년 총선은 새누리당 뿐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도 사실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진보정당은 선택지로 고려 받지 못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10석의 국회의원을 배출했을 때 2012년에는 집권을 해보자는 구호가 나왔다. 하지만 13년이 지난 지금 결과는 어떤가? 야당과 함께 진보세력이나 시민운동 세력의 역할이 거의 없이 길바닥에 쏟아져 나온 대중들의 힘이 상황을 만들어낸 형국이다.
문제는 늘 이럴 수는 없다는 점이다. 15년 전 노무현이 당선됐을 때는 지금의 민주당도, 진보정당도, 시민사회도 다 밝은 앞날을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 이들은 초라하고 촛불만 타고 있을 뿐이다.
프레시안 :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남북관계는 악화됐고 북한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은 높아졌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이를 재생산하면서 더 강한 반북 의식을 보였다. 지금과 같은 정치 지형에서는 안보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 같다. 분단체제가 더 공고화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한홍구 : 한국에 계급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다. 이게 한반도의 분단상황과 어떻게 연결돼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북핵 문제가 있고 북한이 3대 세습을 한데다가 최근에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피살되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 됐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소위 '수구' 세력들이 어떻게 북한을 의존하고 활용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 전쟁 당시 남한군의 병력은 20만 명이었고 전쟁이 끝날 때쯤 3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현재는 60만 명에 이른다. 전쟁을 하지 않는데도 병력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면 이른바 '종북 좌빨'이 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왜 20대가 2년 동안 군대에 있어야 하고 그들에게 최저임금도 주지 않는 것인가? 강바닥에 22조 원 씩 갖다 박을 돈 있으면 군 의무복무 하고 제대하는 사람들한테 대학 등록금이라도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군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우리나라 군대에서 '비전투인명손실'이 한국 전쟁 이후 6만 명에 달한다. 이승만 집권 시기에는 매년 2500명이 죽었고 박정희 때 1500명이 죽었다. 민주화가 가져온 가장 의미 있는 변화가 군대에서 사람이 덜 죽었다는 점이다. 이게 분단체제를 극복해야 하는 주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분단을 이렇게 내부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고 분단을 극복함으로써 남쪽 사람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을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예전에 국정원에서 과거사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는 일을 했을 때 과거에 문제가 있던 민낯을 파헤쳐서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사건을 발표하면 할수록 파급효과가 줄어드는 상황에 직면했다. 진실이 알려졌기 때문에 대중이 더 분노하는게 아니라, '저것들은 경제도 안 좋은데 맨날 과거 타령만 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여졌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분단 등과 관련한 문제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힘을 얻으려면 이 문제가 어떻게 먹고사는 문제와 연관돼있는지, 어떻게 민생과 연결돼있는지 그 고리를 보여줘야 한다.
이번 국정농단도 부정부패하고 연관이 있지 않나. 재벌들이 저렇게 일반 국민들을 쥐어 짜서 얻어낸 돈으로 누군가에게 말을 사주고 특혜를 주고, 이를 통해 몸집을 키웠다는 것이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
그렇다고 재벌들이 가진 것을 다 빼앗자는 것이 아니라, 가진 만큼만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재용 일가가 왜 겨우 2~3%의 주식으로 삼성 전체를 지배하나? 거기에서 나오는 축적된 부는 대한민국 전체의 것이다. 삼성 문제를 잘 풀면 이번에는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프레시안 : 결국 분단을 먹고 사는 문제랑 연결해서 정치 어젠다로 제시해야 하고, 남한 내의 개혁에만 멈춰 있다면 더 진전할 수 없다는 점을 남한의 국민들과 공유하려면 분단 의식이라는 문제를 건드릴 수밖에 없지 않나?
한홍구 : 분단의식 문제가 중요한데, 이게 통일을 외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거꾸로 분단이 남한 사회를 어떻게 악화시켰고,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한참 통일운동을 중시할 때는 통일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라고 답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정말 통일운동이 힘차게 진행되려면 통일이 사실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통일은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남한주민들, 아니 내 삶을 놀랍게 개선시켜줄 문제라는 인식이 있어야 우리가 통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통일운동은 남북교류에만 매몰되었다. 또 한국의 시민운동이 발전적으로 분화하다 보니 다양한 운동이 생겨났는데, 그러다보니 통일운동에는 거의 예전 통합진보당만 남게 되었다. 솔직히 박근혜가 '통일은 대박'이라고 외쳤을 때 통일문제가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몸은 통일운동을 하고 있지 않았던 처지에서 한 편으로 모욕감을 느꼈고, 또 한 편으로 부끄러움과 책임감을 느꼈다. 분단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민생을 파괴하고 있는지, 최순실같은 허접스러운 자들이 국정을 농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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