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X, 왜 외국X 만나고 다니냐"는 발언으로 갑작스럽게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된 당신, '양복사내'님의 기사를 읽으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을 떠올렸습니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저에게 기억되는 영화 <괴물>은 이렇습니다. '진짜 적'과는 마주할 수 없고, 싸울 수도 없는 우리들의 '괴물'같은 현실. 그 불가피한 현실에서 적어도 눈앞의 '괴물'과 싸워야하지만, '박강두'(송강호)는 딸의 장례식장에서도 널부러져 잠들어버리는 그런 찌질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분명 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분노와 슬픔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눈을 감아 버리게 되는 아마도 영화 속 '강두'의 장례식장은 '용산'의 장례식장을 대하는 우리들 현실의 풍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영화 <괴물>을 도식적으로 처리하면 이렇습니다. 영화에는 독극물 방류자 → 괴물 → 바이러스의 연쇄가 있습니다. 이 셋 모두 '괴물'일 겁니다. 그러나 독극물 방류자는 끝내 싸움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찌질한' '강두'네 가족은 '괴물'과의 싸움을 이어나가지만, '멀쩡한' 사회는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를 만들어 내서 그 공포와 헛된 싸움질을 합니다. 방류된 독극물이 만들어 낸 더 큰 괴물은 한강의 '괴물'이 아니라, '바이러스'라는 공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공포는 '괴물'보다 더한 괴력으로 사회를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멀쩡한 '양복사내'님 당신도 '바이러스'라는 가상의 공포와 잘못된 싸움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NO, VIRUS ! 유색 피부의 외국인들이 우리 사회의 안전과 순수성을 위협하는 바이러스라는 잘못된 가정과 공포로 인해서, 당신의 편견과 감정이 표출된 것은 아닌지요?
'체제는 빈곤과 싸울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과 싸운다'고 합니다. '진짜 적'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좌절이 '가짜 적'을 만들어 내곤 합니다. '불안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난 분노가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언론은 당신을 31살의 '박아무개씨'라고 보도하더군요. 설령 '88만원 세대'의 좌절과 불만이 짱돌을 들고 바리케이트를 치게 하더라도, 그 표적만은 정확히 해야 할일입니다. 독극물 방류자를 알 수 없더라도, 적어도 방향만은 '괴물'을 겨누어야하는 것이지, 가상의 공포와 '적'을 만들어 돌팔매질을 해서는 안됩니다.
정치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면, 적을 오인하는 것은 정치에 반(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적을 오인하게 만드는 체제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이미 반(半)이상의 정치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것을 '우리 찌질한 이들의 반정치'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연대'의 의미를 일깨워준 당신
당신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회에 그런 정도의 인종주의는 늘 있어온 것이 아니냐고. 당신을 향한 비난이 너무 과도한 것이 아니냐고. 감당하기 힘들다고.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적지 않은 시간동안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저로서도, 이 사건에 대한 사회의 폭발적인 관심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우선, 저는 당신에게 분노하기 보다는 당신을 안타까워한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행위는 너무나도 상징적인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당신의 행위로 인해서 은폐되어 있던 우리 사회의 '진짜 적'(독극물 방류자)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양복사내'님의 행위로 인한 사건이 상징적이었던 것은 이렇습니다. 잘못된 분노를 집단적 정체성의 형식으로 표출하는 방식의 전형이, 당신의 행위에 집약적으로 들어있었습니다. 좌절과 분노가 외출을 위해 빌려 입는 옷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주의, 국가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등 다양한 집단적 정체성의 형식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점은, 인종주의나 국가주의는 순수하게 인종주의나 국가주의만으로 표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인종주의는 성차별적인 방식으로, 또는 계급적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당신의 발언도 그랬습니다. "더러운 X, 왜 외국X 만나고 다니냐"는 발언은 다음과 같은 인종주의적 신화에 의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자리를 훔치는 이방인들이 우리의 여성과 안전까지도 훔치고 있다.' 인종적 편견이 성차별적인 표현으로 또는 성적 편견이 인종주의적 방식으로 드러나면서, 서로를 강화하고 근거 없는 불안을 재생산한다는 점을, 당신의 발언은 명확히 해주었습니다.
당신께는 미안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양복사내'님은 훌륭한 반면교사입니다. 당신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차별적 정체성의 형식들인, 여성과 인종이 서로의 관점을 교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동안은 이주여성 문제와 이주노동자의 문제마저도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분리되어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사회의 여성 문제와 인종 문제가 서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차별의 문제가 복합적이고 뿌리가 깊은 만큼, 그 문제의 해결도 한 가지 정체성의 단편적 해결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되었지요.
다시 영화 <괴물>로 돌아가면, 괴물을 쓰러뜨리는 것은 강두네 가족의 '연대'였습니다. '희봉'(변희봉)의 총, '남일'(박해일)의 화염병, '남주'(배두나)의 활과 '강두'의 힘, 모래알 같던 가족들의 힘이 합치고 포개져서야 '괴물'을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의 계기적 사건으로 인해서, 남의 문제에 힘을 보태는 방식으로서의 협력이 아니라, 문제의 뿌리 길은 연관성 속에서 차별에 맞서는 진정한 의미의 '연대'가 시작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범' 사건, 물구나무 선 인종주의
▲ JYP엔터테인먼트 |
단지 '양복사내'님의 인종적 편견이 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인종에 대한 비하적 방식이었다면, '재범'에 대한 젊은 사람들의 반응은 우월하다고 간주되는 미국 국적자에 대한 '콤플렉스'가 발현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인종적 편견이 물구나무를 선 형태였다는 것이 차이일 수 있습니다.
또한 문제가 드러나는 복합성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핵심이 "수컷 경쟁자로서의 반응"(김어준)이었는지 여부를 떠나서, 그 표현 형식은 국가주의적 방식, (타자를 위계적으로 배치하는)인종적 방식으로 드러났으며, 마찬가지로 젠더적 함의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사건에서처럼, 편견과 증오는 겹의 옷을 걸치고 드러납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한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이 먼저인 것처럼, '재범'을 떠나게 한 많은 익명의 젊음들에게도 너무 빠른 실망이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분명 그들의 분노를 키우는 것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이며, 증오의 바이러스를 확대시킨 것은 언론이었습니다. 또한 저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젊음들일 것이며, 용산의 무례한 야만에 분노하고, 노무현,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던 그들과 같은 젊음이라는 것임을 믿습니다. 물론 그러한 방식의 개체 내부에서의 정치적, 문화적인 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내적인 '분열성' 때문에 실망할 것이 아니라, 아직 그 분열에 희망을 거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양복사내'님이 실수를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를 한 것처럼, 그들도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변화의 기회가 주어질 것임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정신에 희망을 두지 않는 '연대'가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턱없는 희망으로 문제를 덮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정확한 진단을 통해 그 내적 분열의 간격이 좁혀지고 극복될 수 있도록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것, 그것이 연대라고 믿습니다.
은폐된 '진짜 적' - 법과 제도의 인종주의
저 개인적으로는 당신이 형사적으로 처벌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당신의 사과가 진심이기를 바랬고, 그 진심이 화해의 결과를 얻길 기대했습니다. 물론 당신의 사과가 진심이라면, "이 사건이 공식적으로 기록"되기를 바란다는 피해자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제가 우려하는 것은, 인종차별적 발언에 대한 형사적 처벌과 그 법적 기록이 제도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가 되지나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그저 '모욕죄'를 적용해 쿨하게 기소하는 것으로 인종적 차별에 대한 국가의 대응을 전시하는 알리바이가 되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정작 단죄되어야 할 대상은 제도 그 자신이고, 그 제도 내부에 뿌리 깊은 인종주의입니다. 제도에 대한 반성 없이 이루어지는 개인에 대한 처벌은 '법치'를 거꾸로 세우는 길입니다.
10년을 훌쩍 넘기는 기간 동안 '산업연수생'이라는 위선의 언어로 '노예'의 삶을 강요한 국가는 그들에게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습니다. 글로벌 엘리트들에게는 복수국적을 허용하는 법안을 제출하면서도, 화교나 결혼이주민, 그 자녀들의 문제에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노동법이 완전히 적용되는 '근로자'라고 하면서도, 자유는 삼세번뿐이라는 고용허가제의 위선도 그대로입니다. 이주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으며, 전쟁하듯 단속했던 마석의 사건은 얼마나 오래된 이야기입니까? 위장전입은 고위 공직자의 결격사유가 되지 않지만, 단 한번의 성매매 사실이나 음주운전만으로도 국적취득을 허가하지 않는 법원의 판결은 인종적 혐의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요?
드러나지 않았던 '진짜 괴물'은 바로 법과 제도 내부에 뿌리박은 인종적 편견들입니다. 그 편견들이 사회에 방류되어 '차별'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당신 개인이 아니라, 제도로부터 나와 개인에게 되먹임(feedback)되는 과정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이번 사건의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인종주의라는 '우리들의 찌질한 반정치'에 대하여 차별에 맞서는 진짜 '우리들의 정치'를 열어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 대한 사회적 질타가 너무 깊은 상처가 되지 않았기를 바라며, 제 편지가 당신에 대한 조금의 비난으로도 읽히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저는 당신이 가졌던 편견이 제게도 다른 형태로 존재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과가 진심이었을 것임을 믿습니다. 제 자신의 30대의 시기가 그랬듯, '양복사내'님의 젊은 30대, 그 힘겨운 싸움의 시기에도 건투를 빕니다.
※ 이 글의 '양복사내'라는 표현 및 상황은 한겨레 21의 관련 보도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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