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씨에 대해 대통령직 탄핵 결정을 내림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가원수 겸 행정 수반의 자리는 공석이 됐다. 향후 60일 간의 대선 경쟁은, 헌재가 결정 선고 망치를 두드리는 순간 이미 시작됐다.
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
10일 오후 현재, 차기 주자들 가운데 가장 앞서나가고 있는 것은 물론 대세론을 형성하고 있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그는 이미 대선 구도에서 '상수'가 돼 있다.
문 전 대표는 전날인 9일부터 이날까지 공개 일정을 잡지 않고 서울 홍은동 자택에서 '탄핵 이후' 메시지를 가다듬는 데 골몰해 왔다.
조기 대선이라는 특성상, 인물이나 정책 검증 및 상호 토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때문에, 지지율 1위 후보인 문 전 대표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셈이다.
문 전 대표를 돕고 있는 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대선까지는 시간이 얼마 없다. '문재인 대세'가 뒤집힐 만한 여유가 많지 않다"며 "우리 쪽에서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뒤집힐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반면 문 전 대표의 숙제는 '확장력'으로 꼽힌다. '팬'도 많지만, '안티'도 많다는 것. 또 지지세가 강하긴 하지만, 2012년 박근혜 당시 후보만큼 확고하지는 않다는 점도 고민거리다.
야권 내의 '反문재인' 기류, 구심점은…김종인? 안철수?
문 전 대표의 '안티'는 사실 보수층에만 있는 게 아니다. 야권 내에서도 '문재인으로는 안 된다'는 심리는 있다. 이는 민주당 내 경선에서 안희정 충남지사나 이재명 성남시장을 돕거나, 이후 대선 본선에서 '반(反) 문재인 연대'를 구상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최근 민주당 내 비문계로 꼽히는 박영선 의원 등 현역 의원 일부는 안희정 지사에 대한 공개 지지 선언을 하기도 했다. 안 지사를 돕는 의원들은 "패권이 적폐를 낳는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기도 한다.
또 안 지사는 지난달 28일 언론 인터뷰에서 개헌과 관련해 "어떤 방식의 민주공화정을 작동시킬지 논의를 촉진할 것이며 그 결과가 임기 단축까지 포함한다면 따를 계획"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개헌을 고리로 한 비문 그룹과의 연대 가능성을 열어 놓은 포석으로 해석됐다.
실제로 야권 내 '반문 연대'의 기치·명분 가운데 하나가 개헌이다. 지난 8일 민주당을 탈당한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 역시 개헌을 고리로 한 '180석 연대'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관련 기사 : 김종인 "180석 연합" 구상, 다목적 포석?)
하지만 안 지사가 민주당 경선에서 결선투표제까지 가는 혈투 끝에 문 전 대표를 꺾을 확률은, 현 상황만 놓고 보면 그리 높지 않다는 관측이 많다. 김 전 비대위원장이 여야를 포괄하는 '180석 연대'를 건설하고, 그 지휘봉을 잡아 대선에서 역할을 하는 것까지의 모든 과정을 2달 안에 끝낼 가능성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민주당 경선이 문 전 대표의 무난한 승리로 끝나고, 이른바 '제3지대' 연대가 대선의 격랑에 별 힘을 못 쓰고 사그라지는 상황에 승부수를 걸고 있는 것은 안철수 전 공동대표와 국민의당이다.
안 전 대표는 올해 초부터 공공연히 "대선은 안철수와 문재인의 대결이 될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는 9일 SBS 인터뷰에서 "탄핵이 인용되면 이제는 앞으로 우리나라를 누가,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지, 미래에 대한 준비를 누가 더 잘 할 수 있는가로 기준이 바뀌게 된다"며 "그때부터가 본격적 시작"이라고 했다.
안 전 대표를 돕고 있는 참모들 역시 "현재까지의 지지율은 의미가 없다. 탄핵 인용 이후, 민주당 경선이 끝난 뒤부터가 진짜 싸움"이라고 한다. 즉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등 보수 성향 후보들이 20% 이하의 득표율에 머물고, 본선이 '사실상' 문재인 대 안철수의 1:1 대결이 되면 보수 쪽 표심에 더 확장력이 큰 자신에게 더 승산이 높다는 게 안 전 대표 쪽의 계산이다. 일종의 '막판 뒤집기'라고도 할 수 있다.
보수는 가만히 있을 것인가…박근혜, 깃발 드나?
문제는 안 전 대표 쪽의 계산이 맞아 들어가려면, 보수가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있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전무후무한 '대통령 탄핵' 상황 이후에 보수가 재집권을 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때문에 사태를 논리적으로만 보면 이번 대선에서 보수는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선에서 이들이 꼭 얌전히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대선에 임하는 보수 세력의 동력은 집권 가능성에 대한 희구라기보다는, 그와는 좀 다른 데 있을 확률이 높다. 크게는 두 가지다. 대선 이후의 정계 개편 지분에 대한 선행 투자, 그리고 '인정 투쟁.'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이나 남경필 경기지사 등이 사실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을 잡고 청와대에 입성'하는 꿈을 꾸고 있을 확률은 낮다. 오히려 대선 이후 보수의 맹주, 적어도 '영주' 정도는 될 것이라는 기대가 더 현실적 요인이다. 자유한국당에 난립한, 홍준표 경남지사를 제외하면 지지율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후보들의 동력은 말할 것도 없다.
또 다른 동인은 현실적이지조차 않지만, 그게 현실에서 발휘할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일 수도 있다. 박근혜 씨를 지지했던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받고 싶은 유권자들의 심리를 이용한, 친박 세력의 '인정 투쟁'이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 가부설이 횡행하지만, 만약 황 대행이 출마를 감행한다면 그의 동기는 현실적인 승리 가능성이나 '대선 이후' 따위가 아니라 이같은 정치적 소명 의식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황 대행은 보수 진영의 잠재적 후보들 가운데 유일하게 야권 후보들에게 '현실적'으로 위협이 될 만한 지지도를 받고 있다.
이들의 인정 투쟁에 기름을 부을 것은 물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움직임이 될 것이다. 검찰 수사와 재판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서도 박 전 대통령은 '나는 억울하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내며 정치판에 지속적으로 불씨를 던질 것으로 보인다. 구속이라도 되지 않는다면, 탄핵 이후에도 지역과 세대를 기반으로 한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은 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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