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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그머니 '적폐'와 대화하려는 시도가 있다

[민교협의 정치시평] '촛불집회 vs.극우집회' 프레임 벗어나야 한다

대통령 탄핵소추가 의결된 지 두 달여, 지금의 정치상황은 다소 혼란스럽다. 특검의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대통령과 최순실 씨 일당의 국정농단과 범죄행위가 드러나고 범법자들이 차례차례 구속되고 있다. 사태의 흐름으로는 한 달 이내에 탄핵 절차가 끝나고 조기 대선 돌입이 예상된다. 대권 도전자들이 잇달아 출마를 선언하고 유력 후보들이 소속된 더불어민주당은 선거인단 모집을 시작하였다. 사실상의 대선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탄핵 인용을 전제로 한 정치 일정으로 정작 헌법재판소의 심판은 결과는 물론 언제 선고될지조차 불확실하다. 대통령의 뇌물죄 여부는 더 가려져야겠지만 드러난 국정농단만으로도 탄핵은 인용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만 헌재 자체는 재판관들의 독립적인 결정기구이며 현 정권의 주도로 구성되었다. 탄핵에 동의하는 국민이 80%에 달하는 압도적인 다수라는 여론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소수 재판관의 반대만으로도 부결이 가능한 구조라는 점이 불안요소다.

최근 탄핵 반대 세력들이 발호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불확실성에 기인한다. '태극기집회'를 내세워서 극우세력들이 세를 키우고 이를 정치적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기회주의 정치가들이 합세하여 국회의 탄핵소추 결정을 비난하고 색깔 논쟁을 복원하고자 목청을 높이고 있다. 역사의 죄인이라고 머리를 조아리던 새누리당은 당명 개명으로 쇄신 흉내를 내는 한편으로 탄핵을 무산시키거나 연기시키려는 의도를 노골화한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쏟아내는 극우적인 발언들은 그 대표적인 본보기다. 여기에 사태의 본질보다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의 세대결을 부각시키는 보수 언론들의 물타기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대한 이같은 반동은 촛불로 시작된 변화의 대세가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지난 총선에서 표출된 민의로부터 비롯한 변화의 물결에 위기감을 느낀 구체제의 수혜자들은 갖은 술수와 힘을 동원해서 이를 막아보려고 한다. 관제의 혐의가 다분한 '태극기집회'를 부추기면서 시대착오에 빠진 '어르신'들을 이용하는 것은 그렇다하더라도, 체제의 변화까지 원하지는 않을 보수 언론이 가진 영향력을 고려하면 상황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 분노한 민심 앞에 납작 엎드리는 시늉을 하고 있을 뿐 기득권세 력은 엄연히 각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고 해야 옳다.

이런 상황에서 통합이라든가 화해를 위장한 반동의 흐름이 득세할 여건이 조성된다. 한때 보수파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국민대통합'을 내세우며 정치권을 기웃거린 것도 그 하나지만, 최근 들어 보수언론들이 부쩍 국론의 분열이니 찢겨진 국민이니 하는 탄식이나 자성을 빙자한 양비론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 그렇다. 보수 세력만이 아니다. 야권에서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발언이나 행보가 엿보인다. 법치주의의 미명 아래 헌재에 대한 촛불 시민의 압력을 비판하는 사람도 나오고 현실론을 내세워 새누리당조차 배제하지 않는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한다.

국민의 통합과 화해가 국가나 개인의 안위와 복리를 위해서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기득권 구조의 억압이 극에 달해서 그 체제를 혁신하라는 요구에 직면한 '혁명'의 시기에 통합이니 협치니 화해를 앞세우는 것은 변화를 기피하거나 늦추려는 움직임에 복무하거나 보수층의 정서에 영합하려는 정치적 계산으로 여겨질 뿐이다. 차후 구체적인 실행의 과정에서 협력이나 대화가 불가피하더라도 현재의 의석을 반영한 대연정을 하겠다는 발상은 터무니없다. 의회구성이 민심과 괴리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기득권 구조를 고려한 협의체를 통해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단순히 야당으로의 정권 교체만이 아니라 어떤 내용을 가진 정권 교체인가가 중요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위기의 순간일수록 촛불 민심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되새길 필요가 있다. 국민들이 분노한 것은 직접적으로는 권력자들의 국정농단과 부패 때문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열악해질 대로 열악해진 민중의 삶과 부의 대물림이 구조화된 암담한 현실이 깔려 있다. 극도로 왜곡된 사회체제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국민들이 직접 정치 현장에 등장한 것이다. 애초 무기력한 야당이 제 역할을 하도록 총선 승리를 안긴 것도 국민이고, 이후 협치 운운하며 타협하려던 야당으로 하여금 대통령 탄핵과 적폐 청산에 나서도록 추동한 것도 국민이다. 현실론이나 정치공학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을 매듭을 촛불을 든 국민들의 시민적 실천이 끊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론을 내세우는 것은 소수당의 한계를 되뇌던 과거 야당의 책임 회피를 되풀이하자는 것에 불과하다.

한 나라의 발전이나 운영을 위해서는 국민의 통합된 힘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통합은 소리내어 외친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때이른 화해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소수에게 부와 권력이 독점되고 대다수가 더욱 빈곤해져가는 현실은 국민을 끊임없이 분열시킨다. 불평등한 분배구조가 개혁되고 불공정한 관행이 혁파될 때 비로소 통합의 전망이 열린다. 기득권구조의 적폐를 청산하고 부역자들을 징벌하라고 촛불민심은 요구한다. 말로만 통합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강력한 개혁의지를 가지고 적폐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국민통합이 이룩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구조를 개혁함으로써 정상화되느냐 아니면 수구세력의 반격이 성공하여 다시 어둡고 미래를 알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드느냐는 갈림길에 서 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 소수자의 주장도 존중되어야 하지만 소위 태극기집회로 대변되는 탄핵 반대의 주장이나 행태가 민주주의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평화시위로 사회변화를 요구하고 이룩해가는 시민사회의 이 민주화 운동을 계엄령이나 폭력으로 진압하라고 외치는 세력은 소수자로서의 권리를 내세울 자격이 없다. 만에 하나 헌법재판소가 이같은 과격하고 폭력적인 주장에 부응하는 결정을 내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불붙은 시민불복종에 기름을 붓는 반국민적 행위가 될 것이다. 사회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과거로의 회귀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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