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지역주의에 이끌려 투표한다. ② 지역주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③ 지역주의의 중심은 영·호남 사이의 갈등이다. ④ 지역주의와 지역 구도의 고착화 정도는 매우 심하다. ⑤ 지역주의 극복 없이 정치 발전 없다. ⑥ 지역주의는 망국적 고질병이라서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박상훈은 1998년 이래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같은 통념에 도전했다.'이데올로기가 된 현실, 현실이 된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역주의에 학자적 양심으로 맞섰다. 포커스는 둘이다. 하나는 지역 차별, 지역 감정 등으로 나타나는 '지역주의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 패권주의", "저항적 지역주의" 등으로 나타나는 '지역주의를 둘러싼 해석의 차원'이다.
둘은 끊임없이 교직하며 실체적 진실을 드러낸다.
2. 진실은 이렇다. 첫째, 영·호남 갈등이 아닌 반호남 지역주의가 있다. "반호남주의는 호남 출신에 대해 거리감과 배제적 행위를 동반하면서 엘리트 충원과 경제 발전의 성과를 차별적으로 배분하고 소외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호남 출신에 대한 차별이 그 핵심이다. 호남 지역주의 이전에 호남 차별의 지역주의가 있었다.
▲ <만들어진 현실>(박상훈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프레시안 |
셋째, 반호남주의를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과 편견의 문제로 이해한다면 잘못이다.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욕구를 실현하는데 그런 편견의 이데올로기 효과를 필요로 하는 체제와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넷째, 시민이나 유권자들 속에 있는 지역주의가 아니라, 모든 문제를 지역주의로 설명하면서 상황의 어려움을 지역주의 때문으로 합리화하려는 집권 세력의 욕구로 인해 한국 정치에 있어서 지역주의는 늘 동원되고 이데올로기가 됐다.
다섯째, 선거 경쟁만 개방되었을뿐, 권위주의 하에서 주형된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권위구조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호남 지역 간 표의 편차가 생겨나고 있다. 한국의 지역 정당 체계는 지역주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여섯째, 그렇다면 지역 문제의 해법은 "지역성을 작위적으로 동원하고 불러들이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의 해소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상훈은 지역주의 문제를 환원론적 논리 구조에서 벗어나 "인과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합리적으로 이해가능하며, 규범적으로 타당하게 다루는 일"로 만들었다. 특별히 이견을 제시할 부분은 없다.
3. 조선 초기 무오사화가 있었다. 경북 안동 땅에서 대대로 살다 벼슬길에 오른 한 선비도 한양에서 가장 먼 땅끝 해남으로 귀양살이를 가야만 했다. 두 아들이 부친의 옥바라지를 위해 따라 나섰다. 쇠락한 양반가의 큰아들은 그곳에서 혼사를 맺어야 했다. 선비는 다시 함경도 북청 땅으로 재귀양살이 보내졌다. 그만큼 중죄인이었다. 큰아들은 살림을 위해 땅끝에 남겨두고 , 둘째 아들만 따라 나섰다. 큰아들은 해남에서 후대를 이어 갔고, 작은 아들은 북청 땅에서 핏줄을 이어갔다. 일제시대쯤 되어서야 가까스로 길이 열렸다. 땅끝 해남의 후손은 북청땅을 찾아 수소문 끝에 작은집 후손들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가까스로 족보를 이었다. 그런데 분단이 되고 말았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북청땅을 찾아 다시 족보를 이어야 하는 일은 해남 쪽 후손들의 의무가 됐다.
필자의 집안 이야기다. 할아버지도 해남 분이고 할머니도 해남 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해남의 같은 면 태생이시다. 이런 핏줄로,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해남에서 태어났고, 능력과 환경의 범위 안에서 전라남도와 광주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학업을 마쳤다. 굳이 따지자면 전라도 토종인 셈이다.
지역주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었다. 서평을 쓰는 일마저도 자칫 오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박상훈도 지적했듯, 자칫 "정치 이념화된 반지역주의 내지 거꾸로 전도된 저항적 지역주의"로 비춰질 위험성 때문이었다. 호남의 역사적 한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과도하게 인식된 '피해자성'이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데 장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스스로의 편견 내지는 자기 검열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저자도 고백했듯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심층 심리의 구조를 객관화시킬 때 느끼게 될 미묘한 감정상의 거북함을 회피해 보려는 심리(최장집)"도 상당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맹목은 퇴행의 증거(스탠리 코언)'인 법, 저자의 정확하고 정직한 시선이 즐겁게 책을 읽게 했고, 서평을 쓰게 했고, 책을 권면케 했다. 우상화된 현실, 이데올로기화된 현실로서의 지역주의를 제대로 인식하게 했다.
4. 지난 2월 2일자 <매일경제>는 세계적 기업, 삼성전자 전무급 이상 고위 임원에 대한 출신 지역 분석 기사를 실었다. 역시 이제는 서울 출신이 과반을 넘어 51.2%를 차지했다. 대구·경북은 18.1%, 부산·경남은 10.2%, 충청은 6.3%, 경기·인천은 4.7%, 호남은 2.4%였다. 부산과 대구를 합해 영남으로 분류하면 28.3%다. 여기에 다시 호남의 2.4%를 대비하면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 특정 집단의 지역주의에 대한 현실이 된다.
구별의 문제가 아니다. 차별의 문제이다. 차별은 인권의 문제이다. 인권은 인간의 존엄이요, 존재 그 자체다. 내 의지와 능력에 상관없이 선천적 요소로 평가받는 사회는 결코 공정한 사회가 못된다. 향·소·부곡 등 출신지와 거주지와 부모의 신분으로 구분하던 사회와 별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차별에 바탕을 둔 지역주의는 단순한 지역 감정을 넘어 폭력이 될 수 있는 중대한 근거를 획득하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노골적인 인종주의자가 없는 것처럼, 노골적인 지역주의자는 없다. 그런데 신인종주의가 있는 것처럼 신지역주의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인권 침해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염려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피부색보다는, 지역색보다는 문화적 차이, 경제적 차이가 이들의 논거다. 재미교포보다는 재일동포를 차별하고, 재일동포보다는 연변동포를 차별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탈북 이주민인 새터민을 차별한다. 이들은 한국 사회 적응에 실패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고 있다. 사회적, 경제적 지위의 열악함이 학력과 문화적 차이로 이어진다. 공정한 기회는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어느새 신분은 세습화된다. 이런 식의 악순환에 결합된 전근대적 정치 시스템은 신지역주의를 고착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폐쇄적 지배체계에 동원되는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역주의는 현실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공정한 평가 제도의 결여에 있다. 공정성이 사라진 곳에 전근대적 연고주의는 우상으로 재림한다. 학연, 지연, 혈연의 범주가 아니다. 학벌, 지벌, 혈벌이라고 이름 지어야 마땅하다. 이
이른바 '고소영' 논란을 보라. 서울이라는 일극중심주의, 권위주의적이고 사적인 대통령제, 공정한 공론의 기회가 배격되는 단순한 숫자 개념의 다수결 원칙이 득세하는 우리의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특정 지역에 바탕을 둔 가족주의와 학벌주의의 기괴한 결합은 하나의 우상이요, 괴물이다. 대한민국 특유의 전근대적이고 불공정하며 폐쇄적인 정치 시스템, 비즈니스 시스템, 족내혼 성격마저 띠어가는 퇴행적 신분 사회의 흐름 속에서, 시민이라는 보편적 지위는 외롭고 힘들어진다.
왜곡된 정치적 기제로서의 지역주의에 대한 박상훈의 분석은 탁월하다. 대부분의 유권자와 정당은 지역주의에 젖어 있지도 않고, 정치와 사회의 모든 문제를 지역주의 탓으로 돌리는 방식 또한 맞지 않다. 인식의 틀을 바꿔야 한다는 박상훈의 문제의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지역주의는 문제다. 이데올로기화된 지역주의, 폐쇄적 지배체계로서의 지역주의는 이미 하나의 우상이요, 돌연변이다. 앞선 삼성전자의 인사 자료에서 훔쳐볼 수 있었듯, 우리 사회 특유의 사회, 경제, 정치적 지배체제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고 공론을 통해 대안을 만들어 가야만 하는 시대적 이유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비로소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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