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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수일 선생, '침묵'의 뜻을 되새깁니다"

<추모사> 서동만 교수가 이수일 선생 영전에

지난 20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수일 전 국가정보원 제2차장은 유서를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은 스스로 '할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불법도청 문제로 인해 전직 국정원장 두 명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부담이 그를 짓눌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상황을 헤아려 서동만 상지대 교수가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서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첫 국정원 체제에서 기획조정실장을 지냈다. 숨진 이 씨와는 정권인수위원회 시절 '개혁자'와 '개혁대상'으로 만나 뜻밖에 의기투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글은 <한겨레신문>과 <프레시안>이 함께 게재한다. <편집자>

비보를 접한 밤에는 한 숨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큰 충격이라 망설임 끝에 영결식장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어디 이런 심정은 저뿐이겠습니까. 수많은 국정원 직원들은 참담함과 비통함에 젖어서도 '입이 없는 존재'라 겉으로는 말도 못하고 속으로 삭이고 있을 것입니다. 차마 그냥 보내드릴 수가 없어 밖에서 말할 자유는 있는 저라도 펜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인수위 막바지 시절이었지요. 국정원 개혁과 관련된 일을 진행하다 일부 언론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을 무렵입니다. 처음 대면에 선생께서는 소주 한 잔을 사주시며 용기를 잃지 말고 소신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라는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더욱이 저의 거취가 전혀 확실치 않았던 그 시점에서 반드시 국정원에 와서 일할 기회를 가져라, 평생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저로서는 놀라움 자체였습니다. 선생이 현직에 있는 바로 그 기존 국정원 체제를 개혁 대상으로 생각하던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로는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생의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알려진 얘기는 아니지만 선생께서는 참여정부의 국정원 개혁에 동참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대학 총장에 취임하신 직후지요. 밝은 목소리로 이제 마지막으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전화로 하신 말씀도 여전히 귀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남기지 않고 침묵 속에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왜 하실 말씀이 없으셨겠습니까. 이미 자기 분야에서 체계적인 저서를 갖고 계신 선생의 필력이라면 몇 권의 책이라도 남길 수 있는 분량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의미는 이제 산 사람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지금 도청 수사 국면에서 정보맨으로서 업무 상 기밀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는 직업윤리와 국민들 앞에서 국정원의 과거를 털고 가야 한다는 역사적 의무 사이에서 느낄 갈등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전현직 직원 가운데 누구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적 의리로 도저히 못할 일을 했다는 자책감도 있었을 것임은 선생의 성품을 아는 사람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평생을 죄를 다스리는 일과 공직의 기강을 세우는 일에 종사하다 이제 젊은 세대의 사표가 될 교육자로서 봉사의 삶을 보내는 사람으로서 국가적 범죄의 수사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부끄러움이었을 것입니다. 이 고뇌를 죽음으로 해결하는 것이 선생의 성품에 맞는 깨끗한 처신이었다고 한다면 너무 무례한 해석일까요.

그러나 최근 상황과 선생의 죽음이 남긴 파장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감당하기에는 엄청난 일입니다. 전직 국정원장 두 사람이 구속되고 전직 국내정보 책임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소련, 동유럽의 사회주의 붕괴와 마찬가지로 국가적, 체제적 위기상황에서나 있을 법한 사태이기 때문입니다. 약 50만 명의 여론 형성력이 있다고 말하지는 거대 권력기관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국가안보의 중추기관이자 공직사회 안정의 중심추라 할 수 있는 조직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도 해결하지 못한 조직 내 지역갈등도 심각한 수준에 있고 정실, 줄서기 인사의 문제점도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정원의 향후 방향과 관련하여 이번 사태가 주고 있는 교훈은 도덕성, 윤리성 회복을 통한 조직의 기강 확립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도 생전에 강조하셨다시피 정보는 국민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도청 등 불법이나 강제는 독재나 권위주의 정권에서나 가능한 정보 수집 방법이지 민주정부 하에서는 낙후된 수법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이미 불법 도청 사건이 터지기 이전에 시대의 징후는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실미도', '효자동이발사', '그 때 그 사람', '하류인생' 등 수십만, 수백만의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에서 국정원은 직접 가해자로 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국민의 신뢰와 사랑이 없이는 정보기관은 정보를 얻고 생산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국민이 믿을 만큼의 윤리성, 도덕성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높은 수준의 정보를 얻기 위한 대전제라는 깨달음입니다. 국정원 재편과 관련된 수많은 방안도 이 토대 위에 서지 않는 한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입니다. 선생의 침묵은 산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시대의 압력으로 다가 옵니다.

사실 대다수 국정원 직원들은 선생의 침묵의 의미를 몸으로 직감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업무는 물론 직업, 신분을 평생 자식들에게조차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직원들은 명예, 헌신과 같은 가치 없이는 일의 보람을 찾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제 선생의 삶과 죽음의 진정한 뜻을 살리는 일은 산 사람들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고뇌의 짐을 벗고 편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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