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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국정원 국내담당 차장이 뭐 하는 자리길래…"

<진단> '이수일 자살'의 배경…'정보'와 '권력'의 결합

이수일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이 자살하면서 '국정원의 실세'라 불리는 국내담당 차장인 2차장 자리에 대한 관심도 따라서 높아지고 있다. 도대체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길래 국정원 또는 안기부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빼놓지 않고 거명되고 구속되고 말썽의 진원지로 꼽히느냐는 것이다.

국정원은 원장 바로 아래에 '해외담당'인 1차장과 '국내담당'인 2차장, 그리고 '대북담당'인 3차장을 주요 골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국내담당인 2차장이 조직의 80%는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정원 내에서의 비중이 높다. 따라서 2차장은 사실상 국정원의 '실세'로 통하기도 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 2차장들의 부침**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의 2차장을 지낸 인물은 신건(1998년 3월~1999년 6월), 엄익준(1999년 6월~2000년 4월. 작고) 김은성(2000년 4월~2001년 11월), 그리고 최근 안타깝게 목숨을 끊은 이수일(2001년11월~2003년4월) 씨 등 4명이다.

신건 씨는 DJ정부 출범과 함께 1차장(당시 안기부는 1차장이 국내담당)으로 안기부에 입성한 뒤 이종찬 원장 아래에서 DJ정부 초기의 국정원 살림을 맡았고, 후임인 엄익준 씨는 천용택 원장이 취임하면서 바로 2차장에 발탁돼 임무를 수행하다 2000년 2월 암 선고를 받았다. 엄 씨는 그해 4월 당시 대공정책실장이던 김은성 씨에게 2차장 자리를 물려줬고, 김 씨는 2차장에 재직하면서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되는 등 각종 구설에 오르내리다 2000년 11월 이수일 씨에게 2차장 자리를 내줬다.

신건 씨는 DJ정부 말기에 국정원장(2001년 3월~2003년 4월)을 지내기도 했는데 현재 도청 혐의로 구속 중이며, 김은성 씨 역시 같은 혐의로 구속된 상태다. 엄익준 씨는 암으로 2000년 5월 사망했고, 이수일 씨는 최근 도청 수사를 받다 자살했다.

그렇다면 이들과 도청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국정원 안팎에서는 2차장이 '실세'로 통하게 된 힘의 원천이 '정보의 집합지'라는 점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도청 정보는 물론이고 인적 정보를 포함한 모든 정보가 국장 등을 거쳐 2차장에게 집중되고, 2차장은 다시 원장에게 이를 보고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역대 2차장들은 도청의 1차적 책임자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실제 도청 작업에의 개입과 도청 정보의 활용 측면에서는 2차장들 사이에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이 국정원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신건 씨는 고등고시 사법분과(16회)에 합격한 검찰 출신이다. 중수부장 등 특수수사통으로 탄탄대로를 걷다가 YS정부 초기 슬롯머신 사건에 정덕진 씨와의 친분이 문제가 돼 검찰을 떠난 뒤 97년 국민회의에 입당해 김대중 총재의 법률특보를 맡으며 DJ와 인연을 맺어 2차장 자리에 올랐다.

신 씨는 그러나 '검찰 출신'이라는 측면에서 국정원 장악이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당시 국정원은 '북풍 사건' 등을 거치며 안기부 출신 인사들에 대한 '인적 청산'이 요구되는 시점이었고, 김대중 정부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 전 원장과 함께 신 씨도 '김현철 인맥' 등 과거 안기부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 및 국정원 개혁에 임무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2차장의 정치개입. 그 불행의 근원은?**

하지만 99년 6월 천용택 원장이 취임하면서부터 국정원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천 원장의 취임과 함께 등장한 인물이 엄익준 씨. 전직 국정원 고위관계자는 엄 씨가 청와대에서 직접 지목한 인물이라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천 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차나 한 잔 하고 가라'고 했다. 천 원장은 긴장했다. 무슨 특별한 주문이 나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은 이런저런 얘기를 빙빙 돌리더니 자신이 이종찬 직전 원장에게 그의 재임 시절 '엄익준을 국내담당 차장으로 기용해보라'고 다섯 차례나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말을 듣지 않더라는 얘기를 덧붙였다. 이때 천 원장은 '앗 뜨거라' 싶었다. 그건 엄익준을 기용하라는 얘기보다 더한 메시지, 다시 말해 그를 쓰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뜻으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임명 직후 당장 그를 국내담당 차장으로 기용했다."

엄 씨는 중앙정보부에서부터 안기부를 거쳐 국정원까지 살아 남은 '국정원맨'이었다. 전북 남원 출신으로 신 씨의 전주고 1년 후배이기도 한 엄 씨는 YS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요직에서 배제돼 왔으나, 역으로 바로 그런 이유로 '안기부 숙정'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게다가 YS정부 말기 대북담당인 3차장을 맡으며 대북 업무 능력에서 인정을 받았고, 남북정상회담을 추진 중이던 DJ측에서 엄 씨를 적극 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엄 씨는 2차장에 부임하자 마자 신속하게 국정원 조직을 장악하고 상당한 업무 추진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가 하면 엄 씨가 그렇게 국정원을 장악해 가면서 비로소 국정원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 국정원 내부 소식에 정통한 한 인사는 "엄 차장은 국정원 내에서도 입지전적인 인물로 직원들의 신망이 높았다"며 "엄 차장은 국정원 요직에 신속하게 자신의 호남 인맥 인물들을 배치한 뒤 국내정치 정보수집에 상당한 공을 기울였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때부터 국정원 일부 간부들과 동교동계 등 정치권의 대면이 거의 일상화됐다는 설명이다.

이는 엄 씨의 후임인 김은성 씨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엄 씨는 2000년 2월 암을 선고 받았으나, 이를 숨기고 직무를 수행하다 4월 더 이상 직무 수행이 힘들어지자 2차장 자리를 당시 대공정책실장이던 김은성 씨에게 넘겨줬다. 대공정책실장은 '대공'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국내업무에서는 2차장에 이어 '2인자'로까지 불리는 핵심 요직이다.

***김은성의 등장…끊임없는 정치 구설수**

김 씨는 국회 정보위 간사 등의 역할을 하며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등 동교동계에 상당히 줄을 댔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정치적 인물'이라는 설명이다. 본인이 호남 출신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전남 보성 출신으로 대검 차장까지 지낸 덕에 '호남 인맥'으로 평가 받는 김 씨도 중정시절부터 정보기관에 몸을 담아 온 '국정원맨'이다.

김 씨는 그러나 2차장으로 재직하며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라야 했다. 그가 2차장으로 부임한 직후 치러진 2000년 4월 총선에서는 국정원의 개입 의혹을 받았고, 결국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되며 권 전 고문과도 '적'이 되고 마는 등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DJ정부 시절 국정원 관계자의 증언.

"김은성은 당초 권노갑의 사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늘상 그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등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진승현을 시켜 권노갑에게 돈을 준 것처럼 진술하게 하는 바람에 완전히 적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이 대목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확정됐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가 아닌가 싶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는 최근 검찰의 도청수사에서 드러난 김 씨의 혐의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도청 등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통해 아주 구체적으로 국내 정치에 개입했던 것. 김 씨가 재직하는 동안 국정원은 여야는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족 등 주변까지 저인망식 도청했고, 김 씨는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국정원장은 물론 청와대 등 정치권에까지 보고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닦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 씨 스스로는 "대통령이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라고 도청 행위를 정당화 하고 있지만, 김 씨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청에 나서게 된 배경에는 김 씨 스스로 '정치적 주요인물'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었던 데에다가 정권 핵심에 선을 대려는 구시대적 체질이 작용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 그를 주위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설명이다.

실제 그는 권력의 요청이라면 무슨 일이든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한번 국정원 시절 한 관계자의 증언.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 정도 앞두고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게 김대중 대통령 측근인사 몇몇이 특사로 파견된 일이 있다. 그 시점만 해도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컨대 이회창 후보가 당선될 것에 대비해 '김대중 사후보장'을 위한 선을 대두려는 것이었다. 그때 파견되어 이회창 후보를 직접 만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김은성 차장이었다."

***국내담당 2차장 김은성, 도청 정보로 정치 거물로 성장**

그런가 하면 김 씨는 동교동계를 맹렬히 공격하던 장성민 전 민주당 의원을 찾아가 '경고성 독대'를 한 적도 있고, 그가 '진승현 게이트'로 인해 2차장 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야를 오가며 '은밀한 협상'을 진행하는 '밀사' 역할을 했을 정도로 비중있는 인물로 성장해 있었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가 "김 차장이 법정에서 임동원, 신건 전 원장을 공격하는 것은 김 차장이 외부에 던지는 경고성 멘트로도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할 정도로 김 씨는 당시 정권의 이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그 뒤에는 국정원 조직을 이용한 정보의 힘과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되고 권노갑 전 고문과의 갈등 등으로 국정원에서 김 씨가 퇴장하고, 뒤를 이어 2001년 11월 2차장에 오른 인물이 이수일 씨다.

신건 씨는 2001년 3월 국정원장이 되며 조직 장악의 필요성을 느꼈으나 당시 2차장이던 김은성 씨 인맥이 너무 막강해 쉽게 국정원을 장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김 씨를 중심으로 국정원 요직 인사들이 각종 구설에 오르며 정권교체기에 버금가는 '인적쇄신'이 요구됐고, 결국 신 씨는 김은성 인맥을 모두 쳐내고 새로운 인사들을 국정원 요직에 재배치했다.

이수일 씨는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경찰에서만 20여 년을 생활한 '엘리트 관료'로, '외부인사'라는 점에서 DJ정부 초대 2차장이던 신건 씨와 마찬가지로 파격 인사로 평가 받았다. 또한 이 씨는 전북 출신이라는 이유로 '신건 인맥'으로 불리기도 했다. 신 씨는 검찰 시절부터 자신의 인맥 관리에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이 씨는 검찰에서 "부임 1개월 뒤에야 국정원이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진술할 정도로 국정원 내 조직 장악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국정원이 주장하는 2002년 3월 도청장비 폐기까지는 사실상 DJ정부 초기 국정원의 밑그림을 그렸던 신건 씨가 직접 국정원 조직 관리와 업무를 도맡아 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이 씨가 국정원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다소 애매할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전임자 두 사람과 같은 '정치유착형'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만은 대개의 평가가 일치한다.

그러나 이런 점이 그에겐 훨씬 더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나름대로는 과거 악순환의 고리를 끊느라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도청의 당사자가 되고 자신의 상관들마저 구속되는 상황으로 몰아넣는 매개체 역할을 하게 된 역설적인 상황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얘기다.

***'국내파트 조직 개편' '국정원 견제장치'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 국정원 관계자는 "국정원 조직은 옆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직원간 업무는 서로 비밀이고, 오직 수직적 보고관계만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국정원 조직 특성상 정보는 수평적 공유 없이 수직적으로 한 지점에 모이게 되고 그 정점이 국내담당 2차장이라는 설명이다.

결국 정보가 한 곳에 모이게 되면 비로소 그 정보가 권력이 되고, 이를 악용하려 마음만 먹으면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최일선에 정보기관 국내파트의 도청이라는 불법적 감시수단이 있었음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과거 중정부터 안기부를 거쳐 국정원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정보권력은 정치권력으로 남용돼 왔고, 그 과정에서 정보권력과 정치권력의 화학적 결합이 있었던 것도 이제는 다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국정원 시절의 행태가 휴대전화에 대한 마구잡이 도청과 같은 국민적 정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수단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과거 정권에 비해 훨씬 '악성'이라고 평가를 받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따라서 이런 국정원 국내파트의 도청과 정치사찰을 근절하는 것은 단순히 도청 장비를 폐기한다든가 "정치사찰을 근절하겠다"는 식의 공허한 약속만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정보를 쥔 국정원은 언제든 '절대반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검찰의 도청 수사를 계기로, 또 이수일 차장의 비극적인 죽음을 계기로 국정원이 개편되고 다시 태어나려면 국정원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문제는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결단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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