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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흔드는 개' 꼴 된 2009년 대한민국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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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흔드는 개' 꼴 된 2009년 대한민국의 법

[법치의 표리(表裏)] 대통령부터 경찰까지, 법원도 마찬가지

내가 알기로 법은 사회 공동체가 안전하게 운영되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일 뿐이다. 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특히 형사법은 개인과 공동체가 안전하고 평온하게 사회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범위에서만 그 역할을 해야 한다.

모든 개인은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헌법상의 기본권을 갖고 있고, 국가는 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는 타인과 사회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보호된다. 그 '침범'을 막는 것이 형사법의 역할이고, 침범'만'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최소침해의 원칙이다.

법이 자신의 본질적 한계를 넘어서서 오버를 하게 되면 사회는 자기치유능력을 잃고 혼란에 빠져 결국은 개인과 공동체의 안전을 해치게 된다. 꼬리가 개를 흔드는 꼴이 된다. '법은 가정의 문턱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로마시대부터 내려오는 법언도 같은 취지이다. 학문의 자유영역에서 자유로운 이론과 주장이 나오고 비판과 반비판을 통해 해당 학문영역이 성장하고 자정능력을 강화해야지 법이 잣대를 들이대고 나서게 되면 아무도 새로운 이론과 주장을 할 수 없다. 학문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선 대한민국 법
▲ 법은 국민들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느가 아니면 침해하고 있는가ⓒ프레시안

불행히도 2009년 대한민국의 법은 넘어서지 말아야 할 문턱을 지나치게 넘어서고 있다. 법이 원래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고 정치권의 도구로 전락하여 미친 개처럼 날뛰고 있다.

그 주역은 법의 집행기관인 경찰, 검찰과 법원이다. 경찰은 법이 작동하는 처음에 해당하고, 법원은 그 마지막이다. 법이 움직이는 처음과 마지막이 모두 오버하니 우리 사회는 혼란의 극점에 다다랐다. 작년 촛불집회 때부터 경찰은 자기한계를 상실했다. 내 가정의 식탁에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올릴 수 없다며 거리로 나선 사람들, 심지어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에게까지 무시무시한 법을 들이대며 공권력을 동원하더니 1년이 지나 문화제에 참가하는 사람들까지 무더기로 연행했다.

폭력집회로 변질되거나 정치구호를 외칠 수도 없는 오체투지순례단을 공격용 방패로 밀어붙이고, 폭력이나 교통방해와는 아무 상관없는 삭발식, 자전거 순례단 행사를 막고, 참가자들을 연행했다. 10년 이상 아무런 조치가 없다가 갑자기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수많은 사회단체 회원들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집회 신고단계에서 적극대응'하는 경찰

화물연대의 노동자대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자극하여 충돌을 만드는가 하면 만장에 사용된 대나무 막대를 '죽창'이라고 우기기까지 한다. 이런 경찰의 태도변화는 '2009년 집회시위 관리지침'이라는 내부문건에서 확인되듯이 '집회를 신고단계부터 적극대응'하고, '금지된 집회를 강행하면 사전에 충분한 병력으로 예상장소를 선점하여 집결을 무산시킨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다.

경찰의 지침은 집회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헌법을 뒷간의 휴지조각보다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반헌법적 조치가 경찰차원에서 독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 더욱 문제이다.

대통령은 연일 '엄정한 법 집행'을 요구하고, 노동시장의 효율성을 위해 강력한 구조조정, 노동시장 유연화를 강조하며 하나도 효율성이 없는 밀어붙이기에 전념하고 있다. 국무총리도 덩달아 '민주노총, 화물연대와 같은 후진적 시위문화를 고쳐야 한다'며 들뜨고, 노동부 장관이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줄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개정안을 내고, '화물연대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동의할 수 없다'며 노동자의 생존요구에 칼을 꽂는다. 20년전 권위주의 정부시절에 자주 접했던 정부의 말을 다시 들어야 하는 우리 처지야말로 후진적이다. 대통령을 필두로 법을 현장에서 집행하는 일선 경찰까지 아무 꺼리김없이 법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법원은 어떠한가?

국민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법원도 마찬가지다. 신영철 대법관 사태로부터 확인되는 법원의 태도 말이다. 신 대법관의 행위도 헌법이 요구하고 있는 '재판독립'의 한계지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신영철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시절 했다는 여러 가지 말과 행동만으로도 대법원 진상조사단은 물론 일선 판사들조차 명백한 '재판권 침해, 사법행정권 남용'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드러난 것 보다 더욱 심각한 재판권 침해 행위가 있었다는 일부 언론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그 내용도 조만간 밝혀지겠지만 알려진 내용만으로도 신 대법관의 행위는 단순한 규정이나 법률위반 정도가 아니다. 진실을 밝히고 그에 따른 판결과 처벌을 내리는 법관이 '헌법과 법률, 양심' 이외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아야만 국민을 납득시키는 공정한 재판이 보장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하고, 그렇기 때문에 신 대법관의 행위는 사법부를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고 공정한 재판을 위한 헌법정신을 훼손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헌법이 명하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사법부의 존재근거를 손상시키고 법원의 신뢰를 실추시킨 데 분노한 전국의 판사들이 연일 회의를 열어 사퇴와 재발방지를 요구하지만 신 대법원은 '대법원장의 경고를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잘하려는 의도였는데 신중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버티기에 나섰다. 그런데 신 대법관은 국민적 분노와 법원 내 후배 법관들의 전국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 버티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무엇보다도 신대법관의 행위에 대해 '그 정도의 발언은 법원장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는 법관들이 법원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재판과 법관의 독립에 대해, 사법행정권의 한계에 대해 상당수 법관들이 신대법관과 마찬가지의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사법부의 현주소, 법관독립이라는 헌법적 명제를 이해하는 법관들의 인식수준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대법관 사태가 신대법관 개인의 거취문제로 종결되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법관 독립에 대한 법관들의 인식과 의지를 전반적으로 재고시켜야만 하는 이유이다.

헌법의 명령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법관들로부터 재판을 받는 국민들이 그 법관의 판결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이는 개별 사건에서 법관의 기피사유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이고, 자격과 자질이 없는 법관이 재판을 진행함으로써 국민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듯 우리 시대의 법은 일선 집행관인 경찰에 의해 남용되고, 동시에 최종적인 법 판단기관인 법관에 의해 무시되고 있다. 지금의 법은 힘없는 시민들에게는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보도이고, 법을 다루는 법원에게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우리시대의 법이 어디에서 권위와 힘을 가져야 할지 난처한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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