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영화 <판도라>는 개봉 6일만에 1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천만 관객의 영화 <국제시장>이 개봉 초반에 보여주었던 관객 수와 비교되고 있다. 앞으로도 더 큰 흥행이 이어지리라 예측하는 기사들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의 흥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제 때를 만났고 크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반핵 운동가들이 계속 이야기해왔지만 실감하기 어려웠던 우려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비록 '허구'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타났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많은 이들은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영화 상영 내내 극장은 깊은 한숨과 멈추지 않은 눈물이 가득했다. 종영 후 누구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핵발전소 폐쇄!"를 외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판도라> 신드롬이라고 부를만한 사회적 현상이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본이 나온 지 4년, 영화 촬영을 끝낸 지 1년 6개월. 박정우 감독의 이 영화는 그냥 묻혔을 수도 있었다. 영화를 찍는 동안에 직간접적으로 들어왔던 정치적 압력과 방해들이 언론을 통해서 공개되고 알려지고 있지만, 정치사회적 분위기도 그럴 만 했다.
후쿠시마 핵사고 후,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 등 핵마피아들은 잠시 흔들렸지만 급속히 전열을 정비했다. 고리 1호기 폐쇄라는 일부 양보를 내주었지만, 곧바로 월성 1호기 수명 연장, 신고리 5,6호기 건설 허가 승인을 얻어냈다.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일부 위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는 원자력안전위원회는 거수기 위원회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 탓이다. 후쿠시마 핵사고로 각성된 일부 시민들도 핵발전소 폐쇄를 위해서 싸우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영화는 제대로 시민들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위축된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가지 계기가 찾아왔다. 하나는 월성 핵발전소가 위치한 경주 인근에서 발생한 큰 지진과 이어지는 여진들이다. 그 순간에 애써 외면했을지 모를 핵발전소 사고의 공포가 경주, 울산, 부산 등의 시민들의 몸을 훑고 내려갔다. 이어 월성 핵발전 단지가 지진에 취약한 단층대 위에 건설되어 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면서, 시민들의 공포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기 시작했다.
둘째, 경주 지진을 이어서 찾아온 최순실-박근혜 사태는 한국 사회를 큰 충격에 몰아넣었지만, 그 반대 편에서는 그동안 숨죽여왔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핵발전소의 위험을 경고하는 보고서가 비선을 통해서야 대통령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었던 영화 속 이야기와 다르게, 이제 그 영화는 박근혜 정권으로 대표된 지배 체제의 이완 속에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시민들 앞에서 상영하게 되었다. 또한 시민들도 촛불의 자신감으로 '불편한 진실'을 직시할 용기를 얻었으리라.
영화를 보면서 세 가지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조금만 풀어보겠다.
첫째, 당연하게도 핵발전소 사고를 다룬 '재난 영화'다. 이 영화는 진도 6.1의 지진으로부터 시작된 핵발전소의 대재앙을 다루고 있다. 영화 속에서 후쿠시마의 핵사고가 보이고, 또한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지진 속 월성 핵발전소도 생각났다. 한수원은 영화가 모델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고리1호기는 부지 바로 밑에서 진도 6.5의 지진이 발생해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걱정할 것이 없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경주 인근에 더 큰 지진이 올 수도 있다는 일부 지질학자들의 주장이 나오고 있다. 또한 월성 핵발전소가 충분한 안전 검토 없이 수명연장이 되었으며 최근 지진으로 가동 중지되었다가 안전 대비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재가동이 승인되었다는 환경단체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김무성과 같은 정치인이 아니고서는 "지진·폭격에도 절대 폭발하지 않는다"고 쉽게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다. 수백억 원을 들여 핵발전소 안전을 홍보하고 비슷한 이름의 영화 <판도라의 약속>의 판권을 사서 상영해온 한수원의 주장을, 김무성이 앵무새처럼 되풀이 한 것이지만.
둘째, 한국사회에 구조화된 '세월호 사건'을 다룬 영화로 읽을 수 있다. 영화의 대통령 김명민은 "내가 할 수 있는 하나도 없다"며 좌절하고 무능 속으로 스스로를 추락시켰다. 그의 좌절과 무능은 핵발전소 주변 인근에 300여만 명 가량이 거주하고 있다는 구조적인 요인으로부터 기인한다. 이렇게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하면 어떤 대책을 세워 놓더라도 주민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현실 속 한수원이 '원자력 시설 등의 방호 및 방사능 방재 대책법'에 의한 주민대책이 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영화 속 대통령은 어떤 판단과 결정으로도 모든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지킬 수 없었다.
관객들은 현실의 법규정에 대한 신뢰보다 영화 속 대통령의 좌절에 더 동감을 하게 되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서 핵발전소 사고가 난다면 역대 어떤 대통령이 오더라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 속 대통령은 상황실을 떠나 유폐했다. 오히려 권위주의적이고 반인권적 태도로 일관한 국무총리 이경영만이 대통령이 사라진 상황실을 장악하고 무언가 일을 하는 듯이 보였다. 그의 최우선 목표는 한국사회의 기득권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고, 그에게 주민들의 안전은 쉽게 내줄 수 있는 카드였다.
국무총리는 핵발전소에서 방사능 물질이 대규모로 퍼져 나가자 반경 30km의 주민들에게 알리고 대피시킬 것을 명령하는 대통령에 맞섰다. 수백만 명이 일시에 거리로 쏟아져 나올 사회 혼란을 우려했고, 주민들을 속이는 거짓말을 지시하고 지역 봉쇄를 명령했다. 이 지점에서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거짓말과 은폐로 일관했던 청와대를 향한 분노가 다시 끓어오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핵발전소 반경 30km 안에 수백만 명이 사는 대도시가 있다는 사실은 세월호 사건와 같은 모순이 구조적으로 배태되어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다시 강조하지만 박근혜가 아닌 어떤 대통령이 들어서더라도 영화 속 대통령의 좌절과 무능 그리고 국무총리의 독단과 반인권적 태도로부터 크게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셋째, 이 영화는 '노동 영화'로 볼 수 있다. 1990년대의 <철의 노동자>나 최근의 <카트>와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핵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비중있게 그려냈다. 영화 속 핵발전소 사고에 투입되는 노동자들은 모두 하청업체 소속으로 "방사능을 묵으면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이미 방사능에 과다 노출되는 사고를 겪으면서 죽어갔다.
이는 실제의 현장 속 이야기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계기판 앞에 앉은 정규직 노동자들과 다르게 방사능 위험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현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핵발전소에 가면 지금 당장이라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하청업체의 바지 사장이 몇 번이나 바뀌어도 같은 현장에서,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적은 급여와 복지 그리고 차별을 감내하면서 일하고 있다.
영화 속 이들은 자신들이 이미 방사능에 많이 노출되었으니 목숨을 건 복구 작업에 들어가겠다고 나선다. 순순히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화가 나 있었다. 정부와 회사는 자신들의 살던 고장에 억지로 핵발전소를 밀어 넣고 그곳에서 방사능에 노출되어가며 밥벌어 먹고 살게 만들더만, 결국은 큰 재앙을 불러 왔다. 그러고서는 사고 복구를 위해서 그들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부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다. 여기서 신파가 시작되고 영웅주의가 솟아 오르지만,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우리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같은 책이나 후쿠시마 현장의 노동자 실태를 고발한 일본의 나이즈마 히데아키와 같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 핵발전소 사고에 투입되고 죽어나간 수많은 노동자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방사능으로 더 오염된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대통령에게 발전소장이 보고한다. 무사히 작업을 마무리했다고. 그리고 '그 사람'의 안부를 묻는 대통령에게 발전소장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 사람 이름은 장재혁입니다."
더 큰 재앙을 막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이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름도 없이 "그 사람"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대통령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겠다고 약속했다.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기억해야 할 이름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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