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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민주화'를 성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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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30대, '민주화'를 성찰하다

[민미연 포럼] 포스트박근혜 시대와 개헌론

이제 '민주주의'는 일상과 광장의 언어가 되었다. 요즘처럼 헌정 질서와 국민 주권이 대다수 국민의 화두가 된 적은 없었다. 국민들은 온라인에서, 광장에서, 직장과 집에서 다채로운 방식으로 현 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현하거나 문제 해결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를 체험하고, 연습하고, 구성해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이처럼 자유롭게 타락한 정권을 압박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의식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정도의' 자유는 누릴 수 있는 민주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의 시계는 '이 정도에' 멈춰있다.


87년체제에도 불구하고 왜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대표자가 선출되었을까. 미봉책일 뿐인 정치권력구조 개편만으로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안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치적 권리의 형식적 민주화를 '민주화'로 착각하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논하면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박근혜-최순실 사태로 우리가 획득한 참정권이 껍데기에 불과한 주권이었음을 확인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전제인 '민주화'마저 완결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민주화'도 다 같은 민주화가 아니라 그 종류가 다르며, 그 성취는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정치적 권리의 평등인 형식적 민주주의를 먼저 이룬 후, 사회권적 기본권인 경제생활의 공정성과 균등을 추구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발전 경로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완결'을 전제하고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소위 '경제 민주화'는 정치민주화의 완결 그 이후 단계에 추진되는 보충적인 민주주의의 과제가 아니다. 경제적 수탈의 구조는 그대로 둔 상태에서 형식적인 대의절차의 민주화가 이루어진다 한들 오늘의 사태에서 보듯 민주주의의 장치는 여전히 작동하지 않는다. 정치적 민주화는 곧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권리를 제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절차이자 수단이지 이 자체는 완결된 목적이 될 수 없다.


'포스트 박정희'시대와 '포스트 박근혜'시대는 같지 않다. '박근혜 그 이후'의 민주주의는 박정희라는 압착된 폭압이 걷힌 직후의 다소 폭발적인 그 '정치적 민주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구성되어야 한다. 박정희 사후부터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민주화의 과정은 험난했지만 그 목표는 비교적 단순했다. 당시의 민주주의는 독재를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국민에게 실질적 선거권을 보장해주는 것 등 정치적 주권 회복으로 이해되었고, 그 문제가 가장 시급했다. 그런데 오늘날 박근혜 정권이 물러선 자리에 새로 구축해야 하는 민주주의의 형태는 이보다는 더 복잡다단한 것이기에 이를 이해하고 현실화하기가 더욱 어렵다. 즉 오늘의 민주화는 예전처럼 독재체제에 대한 반동적 성격으로 연임제를 단임제로 바꾸거나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는 등의 정치권력행사 제도를 개혁하는 것으로 일단락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여전히 단기적 시야에 갇힌 정부 형태 개헌론으로 현 사태를 대충 수습하려는 자들이 있다.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는 대통령제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대통령제건 내각제건 이원집정부제건 이들 권력 기관에 주권을 대의하는 국민들의 안정된 생활 여건과 성숙된 정치적 의식, 합리적이고 능력 있는 정당 없이는 이 최소한의 민주주의의 장치는 기능하지 못한다. 우리 정치 현실을 고려한 대안인 4년 중임의 대통령제나 내각제적 요소를 부각시킨 이원집정부제나 모두 대통령 및 정당의 자질 부족과 권력 독점의 우려가 문제점으로 지적 된다. 우리 정치 구도와 문화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이 그대로 현실로 드러날 것이 뻔한 실정이다. 그런데 정치권력의 구성 문제는 사실 헌법상 통치구조까지 개혁하지 않더라도 선거법 등 현행 법률의 일부를 개정하거나 기존의 법률을 공정하게 잘 집행하는 것만으로도 개선 가능하다. 굳이 지금 단계에서 비본질적인 사안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놓고 논쟁할 필요는 없다.


물론 정치 문화를 합리화 하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사회경제적 수탈의 구조를 개혁하려는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헌법에 대한 성찰 및 개정 논의는 필요하다. 오늘날의 개헌은 온 국민의 사회적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한다. 87년 체제의 현실적 부조리를 실질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개헌론은 전반적인 사회경제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국민이 공감하는 공정성의 척도를 파악하는 데부터 시작해야 한다. 단지 현재의 난국을 일시적으로 타개하기 위해, 또한 각 정파의 이해관계 때문에 추진되는 개헌론은 오히려 본질적인 문제를 흐릴 뿐이다.


헌법은 국민이 표출하는 '정의감'의 요체다. 정의에 대한 감각은 시대적이면서도 보편성을 띤다. 우리 헌법은 여타의 근대입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기본 원리이자 궁극적 이상으로 삼고 있다. 인간다운 삶의 본질적 요소를 '자유'라고 한다면 '민주'의 원리는 이 자유를 보장하고 실현할 수 있는 적합한 수단이다. 즉 민주주의의 내용은 당대의 국민들이 어떤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받기를 원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민주주의는 어떤 고정된 이론이나 정치체제가 아니라 질적으로 보다 나은 자유, 보다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원하는 이들의 축적된 실패와 고민의 결과이자 과정이다. 민주주의는 점차로 더 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하고 요구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즉,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실질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의 범주도 점점 넓어진다. 이는 곧 오늘의 민주주의와 헌법이 두 가지의 과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가지는 더 많은 이들의 실질적 자유의 향유를 꺼리는 소수 기득권의 저항이며, 또 한 가지는 더욱 복잡다단해진 요구를 대의제로 풀어내야 하는 어려움이다.


다수의 실질적 자유 획득을 꺼리는 기득권은 '자유'개념을 왜곡하고 호도함으로써 자유의 확장에 저항한다. 정유라의 '돈도 실력이다'라는 명제는 사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지탱한 뿌리 깊은 정신이었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주의, 성장주의를 통해 추구되었다. 그리고 이 성찰 없는 성장위주의 삶의 방식은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한국적' 자유주의자들은 '노오력'의 가치와 이 노력으로 얻은 재산의 온전한 사적 귀속성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변호했다. 물론 개인의 정당한 노력과 그 가치를 인정한 대가는 건강한 사회의 중요한 원동력이다. 돈은 실력이 맞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종류의 돈이냐는 것이다. 최순실의 돈처럼 수탈을 통해 얻은 돈이 실력이라면 도둑질도 실력이라는 말이 된다. 이러한 '수탈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며 이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자유의 전제 –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을 것 – 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 현대사는 곧 이와 같은 사이비 자유주의자들의 가면무도회장이었다. 박근혜 집권에 일조한 성공주의, 개발 신화에 젖어있던 사람들도 이 논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소수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주며 권력의 사유화를 방조하고 이 거대한 수탈의 체제에 일조했다.


그 결과 지금 한국 사회는 총체적 수탈의 구조 아래 신음하고 있다. 재벌대기업은 하청기업을, 1차 하청기업은 2차 하청기업을, 공공부문이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서로서로 순차적으로 수탈하며 존속하고 있다. 그래서 이 수탈의 구조 가장 밑에 깔린 청년들은 결혼은 물론 연애, 꿈, 인간관계 등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포기하며 침묵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와 같은 순환적 수탈관계를 공생관계로 전환할 수 있는 힘은 '자유의 포기를 강요받은' 다수의 자각과 분노에서 나온다. 다행히도(?) 이번 사태로 국민들은 '정의감'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물질적 개발 일색의 성장주의를 상징하는 박근혜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의 자유만을 추구한, 만연한 부정의의 상징인 최순실 및 그에 부역했거나 그를 이용한 기업, 검찰, 언론집단의 행태를 통해 국민들은 한국 사회를 지탱해 온 이 두 힘의 패악함과 허망함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이 처참한 감정과 분노로부터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와 헌법의 정신은 그 다음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몇 년 전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이 유행했을 때만해도 국민들은 억울함 정서를 정의가 무엇인지 점잖게 '정의'해보는 것으로 풀어내는데 그쳤다. 노력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억울함의 원인이 뚜렷한 실체로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 실체를 직시하게 되자 국민들의 정서는 억울함을 넘어 황망한 분노가 되었다. '자유'는 고매한 이론이 아니다. 자유는 이를 원하는 세력과 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세력 간의 양보와 타협의 현실적 결과물이다. 소수의 사적 재산을 불리는 것으로 한정되었던 자유를 모든 사람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실현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 확장하고 향유할 수 있게끔 소수의 독점을 제어하는 기능이 바로 '실질적 민주주의'이며 이를 구현하는 것이 오늘의 헌법정신이다.


헌법은 이와 같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권을 보장하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해석되거나 개정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현행 헌법상 권력분립 및 대의시스템에 대한 성찰 및 개선 노력은 필요하다. 흔히 '대의제'라 하면 다수의 공통된 의사를 단순히 입법부에 투영하는 방식과 이 입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하고 동시에 행정부 및 사법부도 서로의 권력을 견제하는 삼권분립을 떠올린다. 그러나 권력요체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서구의 근대입헌주의 국가 당대의 권력구조 – 축소된 왕의 권력인 행정부, 왕권에 대항한 귀족세력인 입법부, 종교 세력의 안착점인 사법부–를 그대로 이식한 것이기에 우리 역사의 경로로 형성된 현실 속 권력의 실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다수의 공통된 의사'가 있다는 것도 환상이며, 입법부가 '모든 국민'을 대의한다는 것, 즉 단선적인 대의절차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정에 불과하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첨예한 각종 현안들이 결정되고 처리되는 방식을 보면 정당, 기업, 언론, 관료, 기득시민단체 등 몇몇의 제한된 이해집단들 만이 그 과정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국민주권의 1차적 대리자로 여겨지는 국회의원도 사실상 정당의 영향력 하에서 움직인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들 사이의 세력균형은 헌법상 명백히 지정되어 있지 않다.


기업, 언론, 관료 등이 사회적 자본의 공정한 순환을 저해하는 세력이라면 본래 민주 정치세력은 이에 대항하여 대다수 국민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 이처럼 각 세력 간 견제와 균형을 통해 각기 이해관계를 관철하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자유의 선'을 정할 수 있는 국가가 진정한 '공화국'이다. 그러나 현재 제도권 정치는 영세자영업자, 조직에서 소외된 노동자, 경제 구조에 편입되지 못한 청년 등 목소리를 내야 하는 절대 다수의 약자들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공화국을 이루는 한 축이 완전히 무너져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입법권과 행정권의 견제와 균형 혹은 단선적인 책임성의 제고만을 내세운 반쪽짜리 개헌론은 대의 시스템 개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분명 민주적 절차를 거쳤는데도' 이런 지도자가 선출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대표 선출 시스템이 실질적으로 민주적이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실질적 민주화를 위해서는 1차적으로 경제적 수탈구조가 개혁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공생의 자유만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임을 깨닫고 이 자유권을 참정권을 통해 실현하려는 국민의 정치의식 향상과 이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지금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논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하면 '정상적인', '의미 있는 행동을 하는' 대표자를 선출할 수 있을지를 논해야 할 때다. 오늘날 우리가 달성해야 할 민주주의의 과제는 정치의 정상화와 정치의 정상화를 통한 사회경제적 주권의 획득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과제를 감추려는 단순한 해법으로서의 개헌론에 매몰되어 또다시 요즘과 같은 사회적 합의의 호기를 놓친다면 이제는 '최악의 지도자'를 선출하게 되는 선거의 실패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의 구조 자체가 붕괴되는 상황에 이를 것이다.


무제약적 '자유'와 획일적 '통제'의 중간 그 어디쯤 존재하는, 공공복리와 조화될 수 있는 자유, 삶의 고유성을 표출하는 것이 곧 공생의 사회 구조로 연결되는 참정권의 자유를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권력균형 속에서 제도화하고 실현할 수 있을 때 대한민국은 비로소 '민주공화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실질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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