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만 터지면 자판기처럼 나오는 법률
용산 대참사가 있었다. 한나라당은 재개발사업 등에 제3자의 개입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재개발3자개입금지법'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해 12월 민주당은 이른바 'MB 악법'을 저지하기 위해 국회의사당을 점거했다. 이때 한나라당은 "해외투자자들을 상대로 쌓아올린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가 국회폭력점거로 완전히 무너졌다"면서 '국회폭력방지특별법'을 들고 나왔다.
지난해 최진실 씨 자살 사건은 우리 모두를 아프게 했다. 정부대책은 '사이버모욕죄'의 신설이었다.
즉응이다. 즉자적이다. 즉흥이다. 인스턴트다. 이런 정치적 모습이야말로 즉응 정치요, 즉흥 정치요, 즉자적 정치이고, 인스턴트 정치이다. 좀 더 속된 표현을 빌자면 '땜빵' 정치다.
사태의 원인은 온데 간데 없다. 원인에 따른 대응은 인과율의 기초다. 하지만 즉응정치는 동네축구다. 조직과 전략과 비전은 부재하다. 공이 있는 곳을 따라 모든 선수들이 움직인다. 이쪽으로 공이 몰리면 11명의 선수가 그쪽으로 달려가 공을 막는다. 그러는 사이 반대편은 공간이 열린다. 뻥뻥 뚫린다.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가 바로 이런 형국이다.
원인 따로 대책 따로
지난 1년 동안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위기가 찾아왔다. 이때 마다 정부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즉흥적인 힘을 통해 막아보려 했다. 문제의 원인은 늘 도외시되었다. 이를테면, 한미 FTA를 위해서 미국산 쇠고기를 전면 수입했다. 지금 미국은 한미 FTA에 대해 무관심하다. 괜히 쇠고기만 먼저 퍼준 셈이 됐다.
다음으로 정부는 늘 법과 질서를 강조한다. 사건의 원인, 사태의 원인, 좀 더 정부식으로 표현하자면 '범죄의 원인', '사회무질서 원인'에 대해선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일단 사법권이 발동되고 사법절차가 진행되면 모든 문제는 끝난 것이라고 착각한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못하고, 다시 결과와 원인 사이에 피드백이 성립되지 않는다. 원인 따로 대책 따로다.
정치학자 엘스터(J. Elster)는 제도적 안정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시민의 동의를 끌어내지 못하는 정치체제를 서술하는 개념으로 '인스턴트'(instant) 정치라는 말을 사용했다. 본래는 선거제도의 불안정성이 대표성과의 괴리로 이어지는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적 논법이었다. 이 논법은 현재의 한국 사회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지지율 30%에 처절하리만큼 고착돼 있다.
어떤 정책도 국민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다. 결국 즉응정치다. 단지 일회적인 위임만으로 임기 내내의, 모든 정책의 정당성과 위임성이 확보 된다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하다. 국민주권의 범위를 일회적인 투표행위로 가둬버리는 발상 또한 턱없이 위험하다. 위임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발상이 인스턴트 정치를 낳는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위험한 발상의 정치적 발현이 즉응정치다.
니노(C. S. Nino)라는 학자도 인스턴트 정치를 이야기 한다. 여기에서는 시간이 변수다. 이를테면 주요한 결정은 이미 1년 전에 내려졌다. 구체적 효과는 지금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시절의 다수결에 구속당하기 불편하다. 그럼 어떤 절차가 필요할까? 현재의 시점에서 또 다른 암묵적 동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이럴 때 정치는 항상적인 변화에 대응하는 '즉응적'(instantaneous)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피하기 위해 니노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어떤 도덕적·규범적 끈 그리고 이 관계를 강제적으로 묶는 외부적 제도로서의 헌법이 필요하다고 본다. 시대는 변한다. 정치도 변한다. 시민의 선호도 변한다. 이 때 중심을 잡아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헌법 뿐이다. 니노는 인스턴트 정치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 대안으로서의 헌법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안정의 중심축으로서의 헌법을 이야기 한다.(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109-110면)
인스턴트 정치, 이대로 두고볼 수 있나
최진실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단지 '사이버모욕죄' 정도만을 신설하겠다는 한나라당식 사고의 편협함을 염려한다. 이는 자칫 고인의 인격을 '소문' 정도의 틀에 가둬버리는 전제적 발상이다. 인격의 존엄함을 무시하는 일이다. 죽음의 원인이 오로지 악플이라고 단정 짓는 것만이 고인의 명예회복인가? 한 인격이 단지 그 사건에 의해 그토록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 갔다고 믿고 싶은가? 죽음을 부르는, 우리 사회의 온갖 모순을 악플 하나에 담아 사법처리하면 OECD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는 씻김되는가?
'국회폭력방지법'도 그렇다. 한나라당은 국회도, 서울시의회도, 구의회도 지배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행정부도, 서울시도, 서울 25개 자치구도 모두 지배한다. 힘과 권력은 한나라당 것이다. 소통의 책임과 의무는 대통령의 것이고, 서울 시장의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져야 하는가? 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문제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향해 폭력이라고 매도해야 하는가? 원인과 현상을 잘못 읽은 대표적 사례이다. 현상을 통해 원인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제3자개입금지' 발상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연대는 인간 삶의 기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 것이, 바로 정치의 기초가 됐다. 인간은 서로 끈과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부담과 부담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 이런 발상은 인간의 사회성, 상호의존성을 무시한다. 인간의 본질적 특성인 사회성, 정치성을 무시하는 턱없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헌법재판소는 우리 사회를 "대저 전체주의 사회와는 달리, 국가의 무오류성을 믿지 않으며, 다원성과 가치 상대주의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말한바 있다. 지나치게 조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좀 더 차분했으면 좋겠다. 아직 4년이나 남았다고 여유를 부렸으면 좋겠다. 장기적 관점에서 한반도의 미래와 시민의 삶에 대해 묵상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전시가 아니다. 신속하고 빠른 기동전은 군대의 가치다. 한 사람의 열 걸음 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정치다. 너무 앞서 나가는 나머지 시민들의 손을 놓아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즉응 정치요, 즉흥 정치다. 즉자적 정치요, 인스턴트 정치다. 다시 속되게 표현하자면 땜빵 정치다. 지금의 정치적 흐름을 분석하는 여러 화두 중 하나로 즉응 정치, 인스턴트 정치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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