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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와 '살인', 말들의 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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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와 '살인', 말들의 속살

[작은책] '낙태 선택',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10월 3일 폴란드 거리는 검은 옷의 여성들로 넘쳐 났다. '검은 월요일'라 불린 대규모 시위가 바르샤바, 크라쿠프, 브로츠와프 등 폴란드 대도시 곳곳에서 벌어졌다. 여성들은 직장에 휴가를 내고, 가사와 육아도 뒤로하고 거리로 행진했다. 낙태 전면 금지법 제정에 반대하고, 여성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여성들의 선택권을 옹호하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에도 검은 월요일의 시위 소식이 전해졌고, 사진들은 SNS를 타고 흘렀다. 폴란드 여성들의 투쟁 소식을 전하는 뉴스와 사람들의 의견을 보면서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여전히 '낙태 반대론자'에 대한 대구로 '낙태 찬성론자'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세상에, 어디에 낙태 찬성론자가 있단 말인가. "낙태를 하자. 더 많이 낙태하자." 과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누구보다 이 말을 주저하게 될 이는 여성들이다. 정확히 하자면 여성들은 낙태를 찬성하자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자기 결정과 선택권을 찬성한다. 낙태 반대론자라는 말에서 뒤 단어는 앞 단어와 연관됨이 분명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집단이 낙태 찬성론자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속 편한 대구라니!

▲ 지난 10월 29일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 참가자들이 펼쳐놓은 다양한 손피켓. ⓒ프레시안(서어리)

모든 단어에는 속살이 있다. 흔히 그 속살이 생각에 길을 낸다.

낙태(落胎). 낙태는 '태아를 떨어뜨린다', '죽인다'는 말이다. 이 단어에서는 모체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없다. 오직 태아만이 있다. 자연스레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하는 식으로 논리가 흐르도록 방향키가 잡힌 말인 셈이다. 낙태라는 단어에서 태아를 '落' 하는 것은 살인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 느낌 속에서 태아는 '胎'라는 단어도 뚫고 나와 인간으로 진화한다. '태아도 인간이다'라는 주장은 사실 낙태라는 단어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씨앗이다. 그러므로 '언제부터 인간인가'라는 논점은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다. 이 단어는 원래 생명존중이라는 말들로 직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때 존중받는 생명은 누구의 생명인가. 이럴 때 낙태는 '선택'의 사안이 아닌 '죄'의 문제가 된다. 여성들은 '임신 중지'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선택의 사안으로 옮겨 이를 여성의 권리로 요구하려는 의지가 실린다.

'낙태 반대를 반대한다'는 사실이 낙태 찬성론자가 되어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이해에 따르면, 낙태하는 여성은 이기적이고 냉혈일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무렇지도 않게 임신 중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왜냐고? 임신 중지는 태아에게 벌어지는 일일 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에서 벌어질 일이기 때문이다. 태아와 여성은 분리 불가능하다.

임신 중인 몸을 상상해야 한다. 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두 몸이지만, 하나의 몸인 상태. 꽤 독립적인 타자(他者)이지만, 완벽한 타인(他人)도 아닌 채로 있는 상태. 이것이 임신이다. 품고 있다는 말은 편파적이며, 둘이라는 말은 정 없고, 하나라는 말은 부분적이고, 공유라는 말도 제한적이다. 이런 주장을 하면, 그러니 산모가 아이를 느끼고, 사랑한다면 낙태를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이야말로 임신 상태를 '모성의 전조'로 보는 것이다. 임신은 충만의 탄탄대로가 아니다. 물론 행복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지만…. 우리 사회는 임신한 몸을 너무 만만하게 본다. 최근 저출산 공익광고가 보여 주었듯 임산부에게서 보는 것은 오로지 미래의 주인공인 아이일 뿐이지 임신한 몸이 아니다. 임신 중 몸의 변화도 태아 중심에서의 의학적 설명이다. 우리는 임신한 '몸'을 직시한 적이 별로 없다. 이런 상상력의 부재 위에서 낙태는 대개 살인과 등치된다.

낙태와 살인의 배경은 전혀 다르다. 일단 살인이라는 설정에 근거하여 죽인 자와 죽는 자가 있다고 치자. 살인의 맥락도 속속들이 복잡하고 혼란스럽겠지만, 종국에 남는 것은 상대적으로 명백하다. 죽인 자와 죽은 자, 그 둘은 명백히 분리된 몸을 지닌 타인이라는 것.

그렇다면 낙태는? 죽는 자는 태아라 치자. 그럼 죽인 자는 누구인가? 낙태하는 여성은 죄다 이기적인 살인마라고 여기는 자에게는 죽인 자는 산모일 것이다. 그러나 죽은 태아는 어떤 면에서 그녀의 몸이다. 다음 질문, 과연 죽는 자는 단지 태아뿐일까? 여성은 낳고 싶었는데, 남자친구나 시어머니가 낙태를 종용했다면? 이런 일은 우리 현대사에 숱할 뿐만 아니라 지금도 횡행하고 있다. 하물며 한때 우리나라는 '가족계획사업'이라는 거창한 국가 계획에 따라 체계적으로 낙태를 종용했다. 그렇다면 죽인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죽은 자는 단지 태아뿐인가? 낙태가 불허된 사회상황에서 위험한 불법 낙태를 하다가 목숨을 잃는 숱한 여성들은 죽이는 자인가, 죽는 자인가? 우리가 잃는 것은 오로지 생명뿐인가?

여성들은 낙태를 '선택'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프레임 안에 놓으려 했다. 찬성론자란, 여성의 자기 몸에 대한 '선택 옹호론자(pro-choice)'를 말한다. 이게 어찌 낙태 찬성론자로 이해되는지 모를 일이다.

임신 중지와 관련할 때 '선택'이란 단어는 우선권이라는 의미와 함께 이해하면 좋겠다. 여성들이 선택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내었을 때의 폭넓은 함의는 자꾸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선택이라는 함의를 태아냐, 산모냐 사이의 양자택일로 제시한다. 사실 낙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한쪽 선택지는 애초에 상정하지도 않았으니, 이런 식의 양자택일 구도는 정해진 답을 고르라는 강요에 불과하다.

원치 않는 임신 전에는 불완전한 피임이 있었고, 뒤로는 출산과 양육에 대한 고민들이 길길이 놓여 있다. 낙태 선택이란,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느냐의 문제로 한정될 수 없다. 어떤 섹스를 했어야 했는지, 해야 하는지의 사후 성찰이면서, 앞으로 이 아이를 어떻게 낳고 키울 수 있는지의 현실적 고민이며, 동시에 출산 이후 여성 개인의 삶은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을지의 총체적인 모색이다. 그 모든 체크리스트에서 마땅한 것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이 아이를 낳는 것이 나은지, 아닌지를 고려한다. 그 상황에서 아이는 이미 그녀 몸이므로,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이런 모든 고민이 선택이라는 단어의 속살을 두루 채운다. 그리고 그 선택의 최우선권을 가진 이들은 태아와의 관계에서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인간, 임신 가능한 당사자여야 한다.

'낙태 반대론자 vs. 낙태 찬성론자'라는 손쉬운 대구. 이때 사용되는 말들에서 여성의 자기 결정과 선택의 요구를 살인마의 속성처럼 호도하는 속살을 본다. 폴란드에서 낙태 전면 금지법을 지지하는 정당 이름이 '법과 정의당'이라는 것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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