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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금지법' 대신 '사정 금지법'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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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낙태 금지법' 대신 '사정 금지법'을 만들자

[사회 책임 혁명] 여성의 자궁은 '국가의 것'?

이른 바 '낙태금지법'이 논란이 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22일 의료인의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관한 기준을 담은 '의료법 관계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공개하면서다. 비도덕적 의료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자는 취지로 내어놓은 개정안에서 '비도덕적 의료행위'에 임신중절수술을 포함하자 의료계가 반발했다. 강화한 처벌규정을 그대로 적용하면 낙태 수술을 시행한 산부인과 의사는 향후 의사로서 생업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불법'이었지만 관행적으로 암암리에 임신중절수술이 이루어진 현실과 전면 배치되는 정책을 보건복지부가 내어놓은 셈이다. 의료계와 보건복지부 사이 대립의 핵심은 임신중절 자체보다는 수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수술을 통한, 합법이 아니라 해도 관행적 돈벌이가 앞으로 가능할지 여부이다. 임신중절의 주체인 여성은 이 대립에서 소거되어 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 하더니, 보건복지부의 비도덕적 의료 행위 근절 의지는 예기치 않은 지점으로 논란을 확산시키고 있다. 정부 추산으로 연간 17만~34만 건의 낙태가 이뤄지는데 실제 낙태건수는 그 이상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 낙태 건수 중에서 상당수를 '규제'를 통해 출산으로 강제하면 현재의 연간 신생아 숫자에 근접한 새 인구가 생겨날 수 있다. 웃자고 하는 얘기 같기는 하나, 이게 정부의 진짜 노림수라는 분석이 있다. 어쩌면 자다가 봉창이 아닐 수 있는 게, 출산율 저하라는 국가적 난제에 직면하여 이 정부가 내어놓은 저출산 대책 가운데 사실 낙태금지처럼 확실한 정책은 없어 보인다. 원하지 않은 임신을 원하지 않은 출산으로 강제하는 사회는 그동안 등장한 어떠한 파시즘을 능가하는 악몽이기에 이런 해괴한 저출산 대책이 분명 농담이리라고 믿지만 말이다. 이 대목에서도 여성은 빠져 있다.

이번 논란의 시발점이 의료행위의 비도덕성에 관한 것이기에 논의의 초기 주체가 규제당국인 정부와 의료계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논의가 전개되면서 다른 모든 현안에 우선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바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다. 즉 그동안 여성의 동의 없이 부과된 가부장적이고 파시즘적 규제와 논의의 당사자임에도 오랫동안 논의에서 배제된 여성의 탈주체성이란 문제가 새롭게 부각된 것이다.

낙태가 불법으로 취급된다는 건 어렴풋이 인지하였지만 과문한 탓에 낙태가 형법이 규정하는 범죄의 한 종류라는 사실은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낙태가 형법에 범죄로 규정된 시점은 1953년으로, 요즘처럼 인구절벽이 거론되기 전에는 인구억제가 국가의 주요 정책이었기에 그동안 사실상 사문화한 법조문이었다. 그렇다 하여도 형법 제269조 1항에서 "(여성이)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명시한 문구를 보고는 적잖이 놀랐다. 모자보건법 14조에는 강간, 전염병 등 예외적으로 임신중절수술을 시행할 수 있는 5가지 사례를 적시하였는데, 낙태가 허용되는 그때에도 여성 본인의 의사 외에 "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문구를 읽고 다시 한번 놀랐다.

정리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임신한 여자가 낙태하면 국법을 어긴 것으로 되어 감옥에 가거나 벌금을 내야하며, 그 임신을 출산으로 연결 짓기 힘든 '국법에 의한' 불가피한 낙태 사유가 발생했을 때도 낙태를 위해선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낙태한 여성을 형법 위반으로 감옥에 보낼 리야 없겠고, 현실은 조금 다른 모습이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여성이 스스로 낙태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게 대한민국의 법 정신이다.

대한민국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 그러한 법조문이 상징적이더라도 불가피하다는 논리는 매우 전근대적이다. 여성의 몸결정권은 기본적인 인권이자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관련된다. 아무리 보수적인 사람도 대놓고 여성을 국가나 가문의 존속, 또는 번식의 도구로 간주하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조선이 아닌 문명국가인 대한민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형법의 낙태죄가 여성의 도구화를 전제하지 않는다고 보기는 힘들기에, 여성에 관한 한 대한민국에는 전근대성이 온존한다.

더불어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에 우선할 수 없다는 입장은 공준은 아니다. 개인적 신념, 종교적 신념,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에는 태아를 생명으로 인정하는 견해와 여성의 몸에서 자라는 일부 세포로 보는 견해가 병존한다. 대한민국은 가톨릭을 국교로 하는 신정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신념과 생각이 공존할 수 있는 민주국가이다. 그렇다면 태아에 대한 태도 또한 개인의 가치에 맡겨야지 형법에 낙태죄를 넣은 것처럼 국가가 강제할 일은 아니다.

이 문제를 두고 몇 년 전 토론이 벌어졌으나 일단 (여성의) 낙태를 범죄로 규정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2012년 8월 23일 헌법재판소는 '크게 보아' 낙태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조산원을 운영하는 송모 씨가 낙태 시술한 조산사에 대해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한 형법 270조 1항에 대해 제기한 헌법소원 심판사건에서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4(위헌) 대 4(합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린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에서 "임산부가 낙태하는 것 자체를 처벌하는 자기낙태죄와 관련해 낙태를 처벌하지 않거나 형벌보다 가벼운 제재를 가하게 된다면 현재보다도 훨씬 더 낙태가 만연하게 될 것"이라고 합헌 이유를 밝혔다. 반대의견에서는 "적어도 임신 초기에는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낙태를 허용해 줄 필요성이 있다. 자기낙태죄 조항은 침해의 최소성 원칙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자기결정권보다 국가의 '지속가능성'이 우선한다고 본 것이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는 400여 명의 시민이 모여 "내 자궁은 나의 것"을 주장하며 낙태죄 폐지 시위를 벌였다. 비도덕적 의료행위 같은 지엽적 문제가 아니라, 낙태를 죄악시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여성이 논의의 주체로서 나선 것이다. 보건복지부의 봉창 두드리기는 그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제 의미 있는 토론에 불을 붙였다.

최근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낙태죄 폐지 운동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가부장적이고 국가적인 억압구조가 쉽사리 무너질 것 같지도 않다. 하여 당장 낙태죄 폐지가 어렵다면 과도적으로 사정(射精)금지 입법 운동을 전개하면 어떨까. 임신이라는 게 남녀 공동 관여의 결과인 만큼 사정을 금지하면 임신이 없고 낙태도 원천 차단된다. 낙태죄를 폐지하지 않음으로써 대한민국의 법 정신을 살려두고 대신 사정금지를 입법화한다면 낙태문제를 두고 왈가왈부할 일 자체가 사라진다. 조금 심하게 느껴지면 상대방의 "동의 없는" 사정을 금지하고 위반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구체적인 정책 수립은 보건복지부에서 하는 게 좋겠다. 과도적으로 사정금지법안을 만들면 '비도덕적 의료행위'에 임신중절수술을 굳이 넣을 필요가 없어지고 그렇다면 의료계와 싸울 일도 저절로 없어질 테니 말이다.

(안치용 교수는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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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KSRN)는 국내 '사회책임' 관련 시민사회단체들 및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ISO26000 등 전 세계적인 흐름에 조응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사회책임 공시, 사회책임투자 등 '사회책임' 의제에 관하여 폭넓은 토론의 장을 열고 공론화를 통해 정책 및 제도화를 꾀하고 있다.(www.ksr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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